유가의 경전은 공자가 지었다 한단고기 기록에 의하면 그 답은 틀렸다

기원전 2239년 부루단군 때 소련과 대련의 효에 대한 기록이 예기 잡기 하편에 실려 있다 또한 소학계고편에도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기록되어 있다

논어 안연 편에 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기록은 기원전 2182년 삼랑을 보륵이 가륵단군께 진언한 내용이다. 배달국의 홍도익중 즉 홍익인간 사상이다. 禮의 근원과 정치사상은 공자가 태어나기 1,600여 년 전 이미 단군조선이 실행했던 것들이다. 하지만 공자의 말씀으로 뒤바뀌었다. 우리는 이를 표절이라 부른다. 신생 조선이 고사서를 불 지른 단초이기도의 하다 일부 강단과 조선 유학자들은 단군조선은 미개하여 문명이 없었다고 평가 절하했다

환부역조다. 공자는 “나는 서술하기만 하고 지어내지 않았다 述而不作”고 고백했다 그러면 그는 난세의 채담가(採談家)였던가?.

“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며,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

이 글의 출처가 어디인가? 단군세기(檀君世紀)다. BC 2182년 삼랑 을보륵(三郞乙普勒)이 가륵(嘉勒) 단군께 진언한 내용이다. 이 뜻이 1천 6백여 년이 지나 공자가 답습, 제나라의 왕 경공에게 답한 내용으로 논어(論語) 안연(顔淵) 편에 기록되었다.

앞서 BC 2239년 효의 상징이었던 소련과 대련의 부모 상(先是少連大連善居喪)에 대한 기록이 예기(禮記) 잡기 하편에 기록됐다. 소학(小學) 제4편 계고편(稽古篇)에도 같은 내용을 썼다.

유가(儒家) 경전의 근원이 단군조선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 소중한 사료다. 이는 배달국 이전부터 가르침을 베푼 신시개천의 도(神市開天之道)라 을보륵이 설명했다. “나를 알아 자립을 구하며 나를 비워 만물을 잘 생존케 하여 능히 인간 세상을 복되게 할 따름”이라는 홍도익중(弘道益衆), 바로 홍익인간을 말함이다.

효(孝)와 예(禮)의 근본이념이 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절’은 자신의 뿌리인 ‘하늘과 조상’에 경외(敬畏)하고,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규범을 포함한다.

이러한 단군조선의 숭고한 이념과 사상들은 왜 사장되고 잊혀졌는가?. 존화양이(尊華攘夷)다. 공자의 춘추관, 즉 배타적인 동이관에 안주하여 ‘소중화의식’‘모화사상’에 사로잡힌 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음이다. BC 1833년 유위자(有爲子) 선사(仙士)가 ‘천년 후 광유(狂儒)가 만연하리라’ 예언했음을 유념할 일이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이라 말했다. 그러나 추종자들은 공자의 어록으로 포장했다. 사대주의에 의한 역사 왜곡의 극치다. 후일 조선 유학자들이 ‘단군조선은 미개하여 문명이 없었다’고 평가 절하한 사례는 제 조선(祖先)마져 부정하는 모양세가 되지 않았는가 자성할 필요가 있음이다.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