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터 크기의 타악기가 전해 주는 의미

미국의 메릴랜드 대학에서 연구하는 미아클 밀러 박사는 자신의 연구팀과 함께 매우 흥미 있는 연구 결과를 얻어냈다. 간단히 말해 귀에 좋은 음악은 심장에도 좋다.”는 게 해당 연구팀의 연구 결과였다.43 그들은 실험을 통해 음악과 신체적 상관성을 살핀 셈인데, 좋아하는 음악을 30분간 들려준 결과 실험 참가인들의 혈관 지름이 평균보다 무려 26%나 넓어진다는 놀라운 결과를 확인했다. 그들 실험의 의미는 쉽게 말해 즐거운 음악을 들을 때 인체의 혈관은 넓어져 혈액의 이동이 좀 더 편안해진다는 논리를 성립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거꾸로 싫어하는 음악이라 할 수 있는 헤비메탈 따위의 음악을 들은 실험 참가인들의 혈관은 도리어 6퍼센트 수축하는 현상도 확인하여, 사람이 싫은 음악을 들으면 혈액의 이동에 장애를 받는 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미아클 밀러 박사 연구팀의 연구 결과를 곱씹어 본다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입에 밥을 넣는 생계의 문제 못지않게 귀를 즐겁게 하고 기분을 유쾌하게 하는 음악이 얼마나 중대한 삶의 요소가 되는지를 깨달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경우에 음악은 언제부터 관련되었을까?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음악을 삶 속에서 느끼고 즐겼는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다만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홍산문화 유적과 하가점 하층 문화유적에서 각각 석경(石塔)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매우 이채롭고도 기이한 느낌을 전해 준다. 더불어 홍산문화가 한국의 선사문화와 연관될 가능성이 큰 만큼 단순하게 중국의 상고 악기 유물로 넘겨 버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석경이란 쉽게 말해 편평한 모습을 띤 돌널(石版)에 구멍을 뚫어 매달고서 두들기는 일종의 타악기로 맑은 소리를 내는 게 특징으로 알려졌다. 우리의 조선조시기에 정비된 악기 가운데 하나인 편경이란 악기에 매달린 돌덩이가 바로 석경 돌인 셈이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석경에 관한 소식에 따르면 고조선시대의

석경으로 요녕성 조양 수천유적 하가점 하층 문화층에서 온전한 모습의 석경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요녕성 건평현의 이도만자 동남구 유적에서도 석경이 발견되었다. 떨어져 나간 부분을 복원하면 대략 1미터 정도 되는 큰 석경이다. 석경의 몸체 윗부분에 직경 0.6센티미터 정도의 구멍을 뚫어 끈으로 매달도록 했다. 대략 서기전 2,000년 무렵의 것이라

규모가 무려 1미터에 달한다면 그 석경 돌을 매달아 고정시키는 지지대는 매우 튼튼하고 장대할 필요가 있었을 테고, 그 악기를 다루는 일은 웬만한 행사에나 쓰였을 것 같은 추론을 부른다. 다시 말해 선사시기에 대중적이고도 공식적인 모임이 있을 경우에 쓰이던 타악기로 여겨진다는 말이다.

여기서 석경에 관하여 언급한 《서경》의 한 부분을 잠간 살펴보고자 한다. 《서경》의 ‘익직(益稷)’을 보면 “석경(石磬)을 울리고, 부(缶)를 두드리고, 금슬(琴瑟)을 타라” 하자, 조상 신령이 강림하고 귀빈들이 자리를 잡고, 제후국 군주들이 서로 아래 자리에 앉았다. 관(管)을 불고 고(鼓)를 두드리고 축(筑)으로 시작해서 어(魚)로 끝나며, 생(笙)과 대종 소리가 중간에 메아리치니, 분장한 짐승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었다. (중략) 연주가 끝나자 봉황이 날아오니 기(고대 인물의 하나)가 흥분하여 말하기를 “내가 석경을 연주하면 사람들이 각종 짐승으로 분장해 따라서 춤을 추게 하라. 백성과 귀족들이 모두 융화되어 즐겨라.”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서경》에 보이는 석경의 쓰임을 볼 때, 제후국 군주들이 서로 모인 자리에서 다른 악기들과 짝을 이루어 조상 신령을 강림케 하는 목적으로 베풀던 악곡을 구성코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선사시기에 만들어진 홍산지역과 하가점 하층 지역에서 발견된 석경도 역시 상고시기에 주요 인물들이 조상에게 제례를 펼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을 개연성이 있다. 물론 반드시 조상을 모시는 제례에만 썼던 것인지는 좀 더 자료를 살펴야 한다. 그러나 요녕성 건평현의 이도만자 동남구 유적에서 발굴된 석정이 크기가 무려 1미터에 이르는 점은 해당 석경이 단순한 타악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공식적 행사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해 준다.

요녕성 조양 수천 유적 하가점 하층 문화층에서 나온 온전한 모습의 석경과 무려 1미터 크기로 추정되는 요녕성 건평현의 이도만자 동남구 유적의 석경은 반드시 우리의 옛 조선 악기라고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중국 역사 속의 유물이라고도 단정할 수 없다. 해당 유적은 현재 중국 땅이지만 상고시기에 그 쪽에 있던 정치체는 옛 조선이 가장 유력하기 때문에 섣불리 단정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나 적어도 한국의 입장에서는 상고시기 옛 조선의 영역에 속할 수 있는 지역에서 해당 석경들이 드러난 만큼 두 악기 유물은 한국의 문화적 원형성과 연관되는 물질 자료라는 의미만큼은 결코 저버릴 수 없다.

동북아시아 상고인류는 어떤 음악세계를 즐겼을까?

동북아시아의 상고시기에 살던 인류가 어떠한 음악 세계를 즐겼는지를 파악하는 문제는 역시 많은 자료로 검토할 부분이다. 그런데 《운급칠첨(雲芨七籤)》이라는 도교 관련 서적을 보면, 자부궁(紫府宮)이라는 곳이 청구 땅 풍산에 있었고, 그곳에서는 항상 소리가 울렸다고 한다. 게다가 그곳에는 천진선녀(天眞仙女)라는 여인이 노닐었다고도 표현하였다. 하지만 더욱 구체적인 언급은 없어 해당 문장에 관해 깊은 고찰이 쉽지 않다. 다만 주어진 내용에서 자부궁은 언뜻 자부선인을 연상하게 한다. 한국의 상고시기 대선인(大仙人)으로 알려진 인물로 황제 헌원에게 큰 지혜를 일깨워 준 그 시대 대지식인이기도 한 분이다. 그런데 그가 살고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에 어째서 항상 소리가 울렸다는 것일까? 또 천진선녀라는 여인은 무슨 까닭인가? 아마도 자부궁 근처의 울림은 어쩌면 음률 가락이 크게 울리던 상황을 그렇게 표현한 측면이 느껴진다. 그래서 천진선녀는 자부선인의 큰 가르침을 배우고 뒤따르던 여성 수행자가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렇다면 풍산의 자부궁은 수행의 공간이기도 했지만 음악 예술의 구체적인 연희 공간이었고, 천진선녀는 아주 까마득한 상고시기 여성 예인의 한 전형이었다고도 짐작될 여지가 있다. 혹시 자부궁에서는 이미 앞서 언급한 석경이라는 타악기도 두들겼을지 알 수가 없다.

더욱이 《동현영보육갑옥녀상궁가장(洞玄靈寶六甲玉女上宮歌章) 따위의 도교 문예 관련 기록도 함께 견주어 참고가 된다. 그 기록을 살펴보면, 신묘한 곡조는 공중을 노래하고/옥 같은 소리는 서로 자연스레 울리누나./궁(宮)소리요 상(商)소리요, 그윽하게 서로 어울리니/그윽한 조화가 삶의 경계를 무색케 하는구려. 등의 내용을 볼 수 있다. 그 같은 내용에서 신선술 등을 익히던 동북아의 상고시기 이래 수행 인사(修行人士)들이 구현한 일종의 풍류적 악무 문화(風流的 樂舞文化)의 한 단서로 이해할 수 있는 측면이 보인다. 그 같은 내용은 자부 선생이 기거했다는 풍산(風山)에서 소리가 떨쳤다고 전해지는 《운급칠첨》의 ‘자부궁(紫府宮) 관련 기록 내용과 짝을 이루어 흥미로운 상상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동현령보육갑옥녀상궁가장(洞玄靈寶六甲玉女上宮歌章)》의 내용과 같이 풍산(風山)에서 거주하며 수행 문화(修行文化)를 익히고 구현하던 신선도가(神仙道家)의 남녀 수행 인사들이 드러낸 악무 문화의 여음(餘音)을 넉넉히 헤아려 봄은 당연하다. 더불어 《태백진훈)에서 언급되는 두둘겨 풍속을 격동시켰고, 노래를 불러 덕을 찬양했던(皷以風動歌以讚德)’ 예악적 정경(禮樂的 情景)과도 비교가 된다.

한편 한반도의 함경북도 라선시 서포항 유적의 문화층에서 발굴된 뼈 피리와 라선시 초도 유적에서 나온 청동방울이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47 해당 뼈 피리는 한쪽 면에 10여개의 소리 구멍이 한 줄로 뚫려 있는 것으로 보아, 일종의 선율 악기로 사용되었음이 거론되었다. 특히 뼈 피리가 리듬 악기인 북과 함께 노래와 춤의 반주 음악에 쓰였거나 독주 악기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론된 점이 각별하다.

그런데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 보이는 인물이 기다란 막대처럼 생긴 기물(器物)을 입 주위에 두고 서 있는 모습을 통해 본다면 피리가 반드시 반주 악기나 독주 악기로만 사용되는 데에 그치지 않았을 개연성이 있다. 물론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 시기는 연구자마다 달라 시기를 편

년하는 데에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반구대 암각화의 해당 인물이 과연 무엇을 지니고 있던 것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수렵이나 어로 활동에 필요한 신호도구로서 대나무 통 따위의 관형(管) 도구를 마치 악기처럼 사용했을 여지가 있다.

현재 학계의 대체의 의견이 반구대 암각화가 청동기시기를 전후하여 제작됐을 개연성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청동기시기의 전후에 한반도인들의 일부가 마치 피리를 부는 모습으로 기다란 막대 모양의 도구를 들고서 수렵 및 어로활동을 펼쳤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만약 해당 암각화의 인물들이 정말 피리 등의 관형 악기를 사용했던 것이라면 선사시기의 피리 따위가 수렵이나 어로 활동에도 작업용 신호 도구로 사용됐다는 의미를 지닐 터이다. 물론 울산의 반구대 암각화에 보이는 인물이 입가에 가까이 한 기다란 물체가 피리와 같은 악기로써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했다고 볼 여지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또한 함경북도 라선시 서포항 유적의 문화층에서 발굴된 뼈 피리와 함께 청동방울이 발견된 초도 유적은 주목할 유적인데, 함경남도 토성리에서도 청동제 방울이 출토되어 적어도 청동기시기에 한반도에 거주하던 선사인이 청동 방울을 만들어 사용했던 점을 분명하게 해 준다. 초도유적(草島遺蹟)에서 드러난 청동 방울은 높이 7cm 정도의 작은 것으로 아래 위에 줄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초도의 청동기들은 당시의 청동 주조 기술이 이전 시기보다 한층 더 높아졌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리고 함경남도 북청군 토성리 토성리 유적에서 드러난 청동 방울은 유적의 동쪽 집 자리에서 여러 가지 청동기와 함께 출토되었다. 해당 청동 방울은 길이 6.5cm로 유적을 남긴 해당 주민들이 음악적 생활을 펼쳤음을 뚜렷하게 인식시켜 주는데, 청동방울의 사용 목적은 여러 방향에서 추론해 볼 수 있다. 초도 유적의 청동제 방울이나 토성리 출토 청동제 방울이나 모두 춤을 추는 평범한 예술 연희의 상황에서는 타악기로써 무용 도구의 하나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거론될 수 있다.

한편 함경남도 금야군 금야읍 금야강 기슭의 금야 유적(金野遺蹟)50에서는 방울 거푸집이 출토되었고, 거푸집의 형상은 초도 유적의 청동방울과 같은 점은 매우 주목할 부분이다.

초도 유적 등지의 청동 방울 제작 기술이 이후 청동기 시대에 이어져 전해졌음을 짐작하게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고고학적 발굴 사례를 통해 확인이 가능한 한반도에서의 악기 유물과 해당 유적은 물론 지금의 중국 현지에서 수습된 도고(鼓) 등의 자료는 적지 않은 가치가 있다.

연원을 고증하기 어려운 노래, 아리랑

떠나는 님은 잡지를 마라

못 보다 다시 보면 달콤하거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에 물새는 못 사네.”

제시한 노랫말은 일제강점기 평생을 조선의 독립과 혁명을 꿈꾸다 중국 경찰에 체포되어 죽어간 김산이 불렀던 ‘아리랑연가’이다. 이름이 장지락이라고도 알려진 김산이 부른 아리랑은 여느 한국인들이 아는 아리랑과는 그 노랫말이 너무 달라 낯설기만 하다. 왜 그럴까?

많은 사람이 아리랑을 한국인 고유의 정서와 문화를 담은 고유의 노래라고 여기고 그 가치를 그 어떤 음악적 유산보다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며 아리랑에 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과연 그러한 논리는 합당한 것일까?

지역마다 달리 부르는 것은 기본이고, 부르는 계층마다 드러내는 정서의 심도가 제 각각인 게 바로 아리랑이다. 여기서 아리랑의 한 갈래인 진도아리랑의 노랫말을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아리 아리랑!~ /서리 서리랑!~ 아라리가 났네!~~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언니는 좋겠네 언니는 좋겠네./ 우리 형부 코가 커서 언니는 좋겠네.

누이야 내 동생아 그런 말 말아라!~~/너의 형부 코만 컸지 실속은 없더라!~

아리 아리랑, / 서리서리 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를 날 넘겨주소!~

노랫말 자체가 자칫 천박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실상은 우리네 삶의 솔직한 부분을 별 여과 없이 노출하고 듣는 이나 부르는 이 모두 다함께 해학적 즐거움을 같이 만끽하는 정서를 읽어낼 수 있다. 이렇게 아리랑이란 노래는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펼쳐져 제각기 다른 양상을 드러내는 노래임에는 틀림없다. 그래서 아리랑의 표준적 전형성의 구별은 아예 가능치 않다.

따라서 아리랑에 관한 학문적 근거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바가 바로 아리랑의 문화적 연원과 학문적 근거와 민속적 뿌리를 찾는 일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불편한 진실이다. 더욱이 ‘아리랑’이라는 어휘는 처음부터 반복 사용된다. 마치 뒤에 후렴구처

럼 쓰여야 할 것처럼 느껴지는 어휘가 돌연 노래의 첫 머리부터 시작하고 있어 후렴구(後斂句)가 아닌 선렴구(先斂句)라고 표현해야 하는 게 아리랑’ 이라는 노래의 특징이라면 특징이 되기도 한다.

아리랑의 정체성을 나름대로 살피고자 한다면 먼저 도대체 아리랑이라는 어휘를 언제부터 사용했는지가 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황현(黃玹,1855~1910)이 남긴 《매천야록(梅泉野錄)》이 참고가 되는데 조정의 한 중신에게서 들었음을 전제하고, 황현은 아리랑 타령이 늦은 밤 궁궐 안에서 양전(고종과 민왕후)이 자리한 가운데 무려 40여 명의 예인 집단에 의해 불린 새로운 노래였음을 소개한다. 그러한 기사 내용은 당시 경복궁 중건에 따라 징발된 팔도 출신의 노역인들을 위로하려던 왕실의 의도와 결코 무관한 게 아닐 것이라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고종이 안성의 사당패 예인이던 바우덕이를 불러 재주를 놀게 하였던 점과 짝을 이루는 아리랑타령을 궁궐 안 행사로 부르게 한 것은 다분히 민중을 달래려던 통치자의 문화 정책적인 조치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기도 하다.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년)가 채보한 Korean Vocal Music (1896년 2월)

그런데 아리랑에 관하여 전해지는 악보 가운데 가장 앞선 자료로 알려진 ‘Korean Vocal Music(1896년 2월)이란 악보는 아리랑 유통의 역사를 고찰하는 데에 나름 중요하다. 더욱이 아리랑 악보를 채보한 당사자가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년)란 점은 자료의 객관성을 높이는 이유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또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가 채보를 하던 시기가 경복궁 중건의 시기와 엇비슷한 점도 자료가 주는 상관관계를 충분히 이해하게 한다. 그런데 이 악보의 하단에 “아르랑 아르랑 아라/아르랑 얼수 배 띄워라얼 비 니어라” 라고 표시된 가사는 도대체 어떤 경로로 기록된 것인지 의문이다. “아르랑 얼시·비 어라”라는 내용은 “아르랑 얼사 배띄워라”가 됨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내용이기에, 아리랑 노래가 배와 연관된 가사임을 추론케 하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아리랑이 본래 강원도 정선을 중심으로 하는 ‘긴 아리라와 연관될 수 있다는 견해들이 설득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정선의 아우라지를 중심으로 존재했던 벌목꾼들이 각 산판에서 잘라 끌어내린 기다란 나무들을 떼배에 묶어서 기다랗게 물굽이 치며 흐르는 강물에 몸을 신고 위험천만한 물줄기를 삿대로 헤쳐 가며 눈물겨운 삶의 애환을 끊어질 듯 끊어질듯 하면서도 끊어지지 않게 토하듯이 불러내던 노래가 눈물겨운 정선의 ‘긴 아리리’였다는 게 관련 연구자들의 설명인데, 언제 들어도 고개가 떨구어지며 숙연해진다.

하지만 문제는 ‘긴 아리라’가 됐든 경복궁 내의 아리랑 타령이 됐건 아리랑의 기원이 그 이상 소급될 수 있는 근거는 더 이상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아리랑을 두고 “근대에 만들어진 노래가 아니라 14세기 말에 해당하는 여말선초에 만들어진 참요(0謠)이다.”51라는 견해도 있기도 하다. 그래서 아리랑은 여러 과정을 거쳐 그 가사와 선율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한편 ‘아리랑과 관련된 여러 기록을 살펴 본 결과 나름 아리랑의 실상과 의미를 정리한 견해가 있어 주목된다. 그 요약한 바는 다음과 같다.52

첫째, 1894년 이전에 ‘아리랑’이란 음가의 명칭이 ‘아라랑’ · ‘아르랑’ ‘알으랑’·‘아르렁’ ‘아라리’에 앞서 불렸거나 아니면 함께 불렸을 것이다.

둘째, 이 아리랑은 이 시기 최하층 소리패인 남사당패와 광대패들이 부른 잡가이다. 그렇다면 이 아리랑은 경복궁을 중수할 때에 올라온 전국의 광대패나 소리패 같은 전문 예인 집단이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새로이 만든 통속화된 아리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헐버트의 Korean Vocal Music에서 아리랑의 전국적인 유행요임을 확인했고, 그 수는 무한하다고 하였다. 그만큼 연행 상황 즉, 가장 높은 신분까지도 함께 향유하고 소통한 노래이다.

넷째, 19세기말 유행했다는 아리랑 사설 각 편이 한양가》와 《俚及通俗的 讀物等 調査》에서 확인되었다. 그리고 각 편이 확인되는 안성 아리랑 현지답사를 통해서 토속 민요 아리랑을 도시로 끌어내어 통속화한 전승 주체는 전문 예인 집단인 사당패임이 확인된다.

글 김영해(한국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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