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이성계황제가 고려멸망 시겼다고 배웠는데?

우왕 창왕 부자를 몰아내고 공양왕으로 왕통을 계승하게 했다.

태조 이성계의 공적을 기리는 공양왕의 교지

공양왕이 교지를 내렸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공민왕이 불행히도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이인임(李仁任)이 정권을 마음대로 하고자 하여 거짓으로 신우(辛禑)로서 왕씨(王氏)라 일컬어 임금으로 삼았는데, 우(禑)가 완흉(頑凶)하고 광패(狂悖)하여 장차 요양(遼陽)068) 을 침범하고자 하므로, 시중(侍中) 이성계(李成桂) 등이 사직(社稷)의 큰 계책으로써 군사들을 타일러 회군(回軍)하고, 의논하여 왕씨를 왕으로 세우려고 하니, 조민수(曺敏修)가 인임(仁任)의 당(黨)임으로써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저지시키고 우(禑)의 아들 창(昌)을 세웠으니, 왕씨의 제사가 끊어진 지가 16년이나 되었다. 이성계가 충의(忠義)를 분발하여 이에 심덕부(沈德符)·정몽주(鄭夢周) 등과 함께 계책을 결정하여 위로는 천자(天子)의 밝은 명령을 받들고, 종친(宗親)·기로(耆老)·문무(文武)의 신료(臣僚)와 함께 모의하여 공민왕의 정비(定妃)의 명령을 받들어 우(禑)·창(昌) 부자를 폐하고, 내가 왕씨에게 가장 가까운 친족임으로써 조종(祖宗)의 왕통을 계승하게 하니, 내가 덕이 적은 사람이므로 책임을 감내하지 못한다. 이성계는 명분(名分)을 바로잡고 다시 나라를 일으켜 왕실을 재건했으니, 그 공은 실로 태조(太祖)069) 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의 아래에 있지 아니하다. 황하(黃河)가 띠와 같이 좁아지고 태산(泰山)이 숫돌과 같이 작게 되도록 공을 잊기 어려우니, 벽상(壁上)에 얼굴을 그리고, 부모와 처(妻)에게 작(爵)을 봉하고, 자손(子孫)은 음직(蔭職)을 주고, 유사(宥赦)는 10대(代)까지 미치게 하라.”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26장 B면【국편영인본】 1책 14면

원문

○恭讓下敎, 略曰:

恭愍王不幸無子薨逝, 李仁任欲全政權, 詐以辛禑稱王氏以爲主。 禑乃頑凶狂悖, 將欲凌犯遼陽, 侍中李 【太祖舊諱。】 等以社稷大計, 諭衆回軍, 議立王氏。 曺敏修以仁任之黨, 沮衆議立禑子昌, 王氏絶祀十有六年。 李 【太祖舊諱。】 奮忠倡義, 乃與德符、夢周等決策, 上奉天子明命, 謀及宗親耆老、文武臣僚, 啓奉恭愍王 定妃之命, 廢禑、昌父子, 以予於王氏最親, 俾承祖宗之統, 惟予寡德, 未堪負荷。 李 【太祖舊諱。】 正名復興, 再造王室, 其功實不在太祖開國功臣之下。 帶礪難忘, 壁上圖形, 父母妻封爵, 子孫蔭職, 宥及十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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