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속의 여성, 사소를 말하다

사소(娑蘇)리고 불리는 뜨거운 자유연애주의자가 있었다
삼국유사를 보면 기원 1세기를 전후한 무렵에 지금의 경주 땅에 한 여성 지도자와 그녀를 뒤따르던 여성 세력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사소라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함양 박 씨 문중의 <힘양 박 씨 문헌록> 등에는 그녀의 이름이 일명 파사소(婆娑蘇)라고도 표현되어 있음이 눈길을 끈다. 여기서 파사소라는 이름이 지닌 뜻은 각별한 듯싶다. ‘파사(婆娑)는 파사(婆沙)와 비슷한데, 불교 어휘로 쓰일 경우, ‘바사‘로 발음되고, 실제로 ‘비바사(毘婆沙)’와 통하는데. 넓은 말씀이라는 광설 또는 승설로 풀이된다. 따라서 파사소로 불린 사소는 어쩌면 당시 불교 이론을 접한 일종의 시대적 선각자였을 가능성도 느껴진다.
그런데 그녀를 두고 삼국유사에는 중국 황실의 딸, 곧 중국 황실의 공주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일각의 재야 역사 기록에는 부여 황실의 공주라고 표현된 점이 다르다. 두 기록물 모두 공통적으로 사소가 남편 없이 아이를 밴 점을 분명히 한다. 남편 없이 아기를 가진 점은 유학적 윤리관으로는 따질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1세기 전후한 무렵에 동아시아에 유학적 생활관이 굳건하게 자리를 잡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유학은 한 대에 동중서를 비롯한 걸출한 학자들에 의해 기초를 다졌던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일상 주민들의 삶에 깊숙이 침투했는가의 문제가 별개라는 점을 거론하는 것이다.
사소가 남편 없이 아이를 가진 것은 그녀가 활달하고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연애를 추구한 점을 읽게 한다. 그렇다면 그녀에게 일종의 방탕기가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것에 관해 누구도 자신감 있게 답변할 일은 아닌 듯싶다. 경우에 따라서 애초에 있던 남편이 일정하게 건재했는데,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다쳐 더 이상 동행할 수 없었던 상황도 고려 될 수 있는 까닭이다.
그런데 선도 성모라고도 알려진 사소에 관한 내용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선도 성모의 겉모습은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인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에 구슬은 일종의 고급 사치품으로 옥구슬 제작 능력을 지닌 기술 세력과의 연관성을 생각하게 한다. 한편 북사를 보면, 신라 여인들의 복색은 그림을 그린 것, 흰 색을 고상하게 여겼다 부인들은 머리카락을 땋아 목에 두르고, 온갖 비단과 구슬로 장식한다고 전하고 있어, 선도 성모, 곧 사소 공주가 구슬을 사용하여 치장한 이래 관련 풍속이 신라 여인의 전통적 외양 꾸미기로 이어진 점을 읽을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하가점 11호 묘로 알려진 무덤에서 산융(山戎)의 여인이 드러났는데, 그 여인의 머리 부분과 목 부분에 구슬 합금 장식물이 있었다는 발굴 보고가 있다. 그 같은 점은 사소 공주가 머리에 구슬로 장식하였다는 설화 내용과 상관성을 느끼게 한다. 사소 공주가 활동했을 당시에 사로국 건국 초기 세력의 고위 여성들이 갖추었던 외양과 치장이 다분히 북방 풍속과 연관된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사소 공주에 관한 전승 설화 속에서 등장하는 구슬이란 실제로는 비취로 만든 경옥이란 점을 주목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경옥은 조개껍질과 함께 모두 ”피안 세계에서 좋은 운명을 받도록” 해 주는 역할을 한다는 견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도홍경>이란 책에 따르면, 경옥은 조개껍질과 함께 죽은 이의 주검과 함께하게 하여 그 부패를 막게 하는 놀라운 기능까지 지녔다는 내용이 전해지기도 한다. 사소 부인이 주검의 부패까지 지연시키는 효과를 지닌 것으로 알려진 경옥을 머리에 치장하고 다닌 점은 어떻게 이해되어야 할까. 작컨대 그녀는 죽은 이의 원가를 화복시키는 주술 능력을 지녔거나, 죽은 이의 원혼을 달래 주는 신녀(神女)의 이미지를 지녔을 개연성이 있다. 더욱이 상고시대의 무속서와 같은 성격을 담은 것으로 평가되는 <산해경>을 보면, 괴산 신에게 제사 지낼 때 여자 무당과 남자 무당이 함께 춤을 춘다. 웅산신에게 제사 지낼 때에는 간무(干舞)를 추고 병으로 재앙을 물리치는 의식을 거행하며, 구옥을 바치고 면복(冕服)을 입고 춤을 춘다”는 내용이 있어 주목된다. 역시 구옥이란 광물질로써 재앙을 물리치는 의식을 치렀음을 알 수 있다 .

사소를 뒤따른 세력은 당대 최고의 선진 기술 소유 집단이었나
한편 사소 공주 곧 선도 성모는 ”일찍이 신선 자술을 배워 해동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신선 지술은 아마도 한나라 시기의 황로지학과 연관되는 술법으로 여겨진다. 고래의 황제와 노자에 관련한 술법 체계를 공부한 것이 바로 황로지학이고, 한나라 당시에 그것은 보편 학문으로 보급된 점을 생각하면 사소 공주가 황로지학을 접하지 못할 까닭은 없어 보인다.
그런데 선도 성모가 머문 곳인 해동이란 다름 아닌 신라를 일컬음이다. 사소가 하필이면 지금의 경주 지역에 있는 한 곳의 산으로 도착했는지는 아무래도 소벌도리의 세력과 견주어 고민해 볼 점이다 여기서 소씨 가문의 이른바 <소 씨 상상계>나 <동근포서>라는 글의 내용을 견주어 볼 필요가 느껴진다. 소 씨 가문의 대동보(족보)의 앞부분에 자라한 <소 씨 상상계>나 <동근보서>라는 글에는 매우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지 않다. 특히 <소 씨 상상계>에서, 소 씨의 먼 조상이 당장경으로 도읍을 옮길 때에 공로가 있었다는 내용이며, <동근보서)의 경우 휘 백손이 천하가 크게 혼란하기 때문에 임진년 봄에 조선에서 나와 진지로 이사하여 후진한주가 되었다는 내용이나, 휘 백손 임금의 호칭은 도리요’ 등의 내용이 그렇다. 추성건대 사소 일행이 만난 소벌 도리 세력은 소벌을 임금(도리)으로 삼던 세력이며 그 먼저의 조상은 조선(위만조선?) 땅에서 이주한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사소가 이끈 세력이 본래 황실로부터 비롯된 점을 두고 볼 때 남방의 정착세력과의 결합은 일종의 타협과 같은 과정이 전제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타협의 내용이 궁금해지는데 현재로서는 추정이 쉽지 않다. 다만 사소가 낳고 소별의 세력이 보호하여 이후에 거서간이란 왕위에 오른 박혁거세가 황금으로 된 자(尺)를 신인(神人)으로부터 받았다는 금척(金尺)의 설화가 <동경잡기>에 보이는 것은 하나의 실마리를 느끼게 할 뿐이다. 그에 따르면 박혁거세는 왕위에 오르기에 앞서 꿈에 어느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얻었는데, 그것으로써 쇠붙이와 그릇 따위를 바로잡으라고 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한 전승의 의미는 쇠붙이와 그릇 등의 생활용 자재와 용기를 통해 부정부패를 엄정히 다스리라는 뜻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같은 <동경잡기>에 역시 금척 관련 설화가 보이는데, 박혁거세가 금척을 얻어서 그것을 죽은 이에게 자를 대면 살아나고 병든 이에게 대면 소생했다는 내용이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이고 허황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전승이 담은 의미는 박혁거세를 중심으로 하며 정치력을 장악한 세력이 다름 아닌 금속과 연관된 선진 기술을 확보한 것임을 엿보게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박혁거세를 낳은 사소 공주 일행 또한 같은 맥락에서 보아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싶다. 그러므로 고급의 금속 처리 기술을 습득한 사소 세력을 이미 정착한 소벌 세력이 맞이하여 그 기술을 전수받는 조건으로 소벌 세력의 관할 영지의 일부를 분할하여 건네 준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고민해 볼만하다고 할 수 있다.

김영해(한국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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