狐에서 人으로

천년이란 세월은 짧은 것일까? 긴 것일까?

그 시간 속에서 얼마만큼의 변화가 있었을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있었을 텐데.

그 변하지 않고 내재해 있거나 외부 형태로 지속해 온 것은 무엇인가?

그런 변화와 불멸의 규칙을 겪으면서 몇 만 년이나 살던 인간은 오랜 경험에서 삶의 사유체계를 만들었다. 이런 쟁여둔 노하우를 적용시켜보면 분명 인간은 뭔가 기록해 놓았을 것이 아닐까?

그게 무엇일까? 흔히 우리 민족이 삶의 힌트를 얻는 것이 천부경이라고 하는데 그것에 우리 선조들의 우주적 철학을 숨겨놓은 것일 게다.

우리 민족의 경, 천부경은 이걸 밝혀 놓았는가?

그 변화무쌍한 규칙을 그 경전(經典) 속에 넣어 놓았을 것이 아닐까

0의 이칭(異稱)은 무라고 한다.

1이 나오면서. 2는 땅이 되고 3이 작용으로 나타난다면 우린 끊임없는 3의 분화 속으로 수렴되면서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삼세번!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관여해 있는 리듬 같은 숫자 3.

1번은 믿지 못하고 2번은 아쉽고 꼭 3번, 삼세번을 맞춰야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이니 말이다. 결과는 세 번 해야 석연해지고 결판도 나올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사유 철학.

삶의 패턴이 3번이라는 숫자 속에 숨어서 우리의 생에 파동, 리듬을 무의식적으로 완성 시키고 있는 것이다.

천년 묵은 구미호가 ‘휘리릭∼’ 꼬리가 9가닥 달린 구미호가 허공으로 훌쩍 뛰어올라 세 번을 공중제비를 돌아야 사람으로 화신된다. 하늘에서 천기를 받아들이는 방식일까?

2, 3이란 숫자가 우리 민족의 삶 속에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가위바위보도 세 번으로 결말을 매듭지으려고 한다. 한두 번으로써는 뭔가 가슴의 응어리가 남은 듯 미진함을 느낀다. 씨름판도 삼세판이다. 그래야 깨끗하게 승복을 한다. 이기는 자야 한 판이든 두 판이든 쾌재를 부르지만 지는 편에선 뭔가 아쉽다. 탐색전일 수도 있고 확실한 파악이 필요하고 져도 억울하지 않고 깨끗이 승복하는 것이다.

셋은 한마디로 나오지 않고 3마디로 진출하면서 힘을 모은다.‘하낫 둘 셋!’에서 리듬을 타라. 호흡(숨결)을 타야 힘이 나오고 그 힘을 끌어내어 한 정점에 모은다.

둘, 넷은 이치에 적합 한 것을 선택한다. ‘하낫, 둘, 셋, 넷, 구령 붙여가!’라든지 이런 짝수 리듬은 뭔가 임팩이 없는 대신 안전감과 균형감을 지향한다.

‘하낫, 둘, 셋!’은 엄청난 힘을 한데 모울 때, 새로운 변화, 껍질이 깨어날 때, 기압을 넣을 때 등 생명의 움틀림으로 나아간다. 하늘이 본디 인간(생명)에게 준 힘을 최고조로 끌어내는 폭발적인 리듬이 아닐 수 없다. 압축된 것이 풀어지면 비로소 형상이 된다.

구미호(九尾狐)가 하늘로 세바퀴 공중제비를 돌면서 인간으로 화한다. 그 변화 속에서 한 순간 폭발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것은 0에서 1로 발현되는 순간일 것이다. 그리고 1에서 3으로 얼갈이가 되는 것이다. 3이란 감각을 생활 리듬에서 찾아본다.

컷·글 | 정노천(우리원형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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