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철 영묘사 옥문지에 개구리가 울다

여음이 있던 곳이 부양이고 지금은 영주(潁州)

진평왕은 사로국(斯盧國)를 기록한 <북사>에서는 진평까지 30세이다. 하지만 <삼국사>에서 4대가 빠진 것은 사로국(斯盧國) 시대 4대가 빠진 것이다. 18사동이전은 <남제서>권58지역의 역사이다. 겨울철에 개구리가 모였다. 현재 <삼국사記>卷46지역에는 여음(女陰)이 여음곡일 때는 가능성이 있다. 여음이 있던 곳이 부양이 되고 지금은 영주(潁州)다. 20세기 여음(汝陰)에는 이런 지형이 있다.

진평 기록은 <북사>에서 사로국의 30세 진평에 이른다 했으니 4대가 바로 사로국(斯盧國)시대 역사인 것이다. 진평은 18사동이전과 공통부분이다.

제27대 덕만(德曼-曼)은 혹 만(萬)으로도 쓰는데 시호는 선덕여대왕이니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6년 임진에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색깔로 그린 모란과 그 씨 세되를 보내왔다. 왕은 그 그린 꽃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절대로 향기가 없을 것이다’ 이내 씨를 뜰에 심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떨어질 때에 과연 말과 같이 향기가 없었다.

둘째는 영묘사 옥문지에 겨울철에 많은 개구리가 모여서 3, 4일 동안이나 울고 있었다. 백성들이 이를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 필탄 등을 시켜 정병 2천명을 뽑아서 빨리 서교로 가서 여음곡을 탐문하면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덮쳐서 죽여라 했다.

두 각간이 명령을 받고 각각 군사 천명을 거느리고 서교에 가서 물었다. 부산아래에 과연 여음곡이 있고, 백제 군사 5백이 그곳에 와서 매복해 있으므로 모두 잡아서 죽였다. 백제의 장군 오소란 자는 남산 고개 바위위에 매복해 있었으므로 이를 포위하여 쏘아 죽였다. 또 후속부대 3백 명이 오는 것도 쳐서 죽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않았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했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음(女陰)에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선덕왕(善德王)이 영묘사(靈廟寺)를 세운 일은 <양지사전(良志師傳)>에 자세히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 말하기를, ‘이 임금 때에 돌을 다듬어서 첨성대(瞻星臺)를 쌓았다’고 했다.

(善德王知幾三事(第二十七 德曼(一作万) 諡善德女大王 姓金氏 父眞平王 以貞觀六年壬辰卽位 御國十六年 凡知幾有三事 初唐太宗送畫牧丹 三色紅紫白 以其實三升 王見畫花曰 此花定無香 仍命種於庭 待其開落 果如其言 二 於靈廟寺玉門池 冬月衆蛙集鳴三四日 國人怪之 問於王 王急命角干閼川 弼呑等 鍊精兵二千人 速去西郊 問女根谷 必有賊兵 掩取殺之 二角干旣受命 各率千人問西郊 富山下果有女根谷 百濟兵五百人 來藏於彼 竝取殺之 百濟將軍亏召者 藏於南山嶺石上 又圍而射之殪 又有後兵一千二百人來 亦擊而殺之 一無孑遺 三 王無恙時 謂群臣曰 朕死於某年某月日 葬我於忉利天中 群臣罔知其處 奏云何所 王曰 狼山南也 至其月日 王果崩 群臣葬於狼山之陽 後十餘年 文虎大王創四天王寺於王墳之下 佛經云 四天王天之上有忉利天 乃知大王之靈聖也 當時群臣啓於王曰 何知花蛙二事之然乎 王曰 畫花而無蝶 知其無香 斯乃唐帝欺寡人之無耦也 蛙有怒形 兵士之像 玉門者 女根也 女爲陰也 其色白 白西方也 故知兵在西方 男根入於女根 則必死矣 以是知其易捉 於是群臣皆服其聖智 送花三色者 盖知新羅有三女王而然耶 謂善德 眞德 眞聖是也 唐帝以有懸解之明 善德之創靈廟寺 具載良志師傅 詳之 別記云 是王代 鍊石築瞻星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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