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서(古代史書) 분서(焚書)과정 4

1만 년 고조선의 흔적-《천문비기(天文秘記)

BC 1916년 감성(監星, 天文臺)을 설치했다. 이 또한 2,548년 후인 632년 신라 선덕여왕이 첨성대(瞻星臺)로 이름을 바꾸었다. BC 1836년 11세 도해(道) 단군 때 천문경(天文鏡), 자명종(自鳴鐘), 양우계(量雨計), 측풍계(測風計), 황룡선(黃龍船), 양수기(揚水機), 자행륜거(自行輪車), 경기구(輕氣球), 자발뢰차(自發電車), 조담경(照膽鏡) 등 26종의 발명품이 나왔다고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전하고 있다.
곽수경(郭守敬, 1231~1316)이 수시력(授時曆)을 만들기 위해 간의(簡儀), 규표(圭表), 앙의(仰儀) 등 12종의 관측기구를 설계, 제작했다고 했다. 곽수경이 석각(石刻)에 탁본된 연화루(蓮花漏, 시계의 일종)를 보고 그 제조 원리와 방법을 유추해 냈다는 기록에서 확인되듯, 단군조선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1434년(세종 16)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 청동 물시계(경점기), 자격루, 천상시계 옥루 등이 이순지(李純之), 장영실(蔣英實), 김빈(金鑑) 등의 손을 빌어 제작된다. 단군조선이 만든 천문관측의기(天文觀測儀器)들은 원, 명을 거쳐 3,270년 긴 잠에서 깨어나 신생 조선을 깨우는 불쏘시개가 되었음이다.
BC 1733년 ‘무진오십년 오성취루(戊辰五十年五星翠樓), 13세 흘달단군 50년 화성, 수성, 토성, 목성, 금성이 달과 함께 모인 오성취루 기록이 단군세기에서 확인된다. 앞서 혼천기로 별자리를 헤아렸고, 감성관, 황보덕이 관찰한 결과를 토대로 이룬 성과가 아니던가. 천문학자들은 ‘천문현상을 임의로 맞춘다는 것은 확률상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려 단군역대 천문기록이 정확하다는 것을 증빙했다.
고인돌에 천문을 새겨 천추(千秋)를 숨 쉬게 했다. <부도지> 제14장을 보자.
“(제사 지내는 존귀한 자리를 북진(北辰)과 칠요(七搖)의 위치를 잡아 정했다. 반석(盤石) 위에 제물을 놓고 번제를 지내서 부정을 씻었다
북진과 칠요(北辰 七搖: 七曜)는 북극성과 북두칠성이요, 번속(燔贖)은 속죄제로 해혹복본(解惑復本)이다. 반석(盤石)은 고인돌을 말한다. 1만 여 년의 천문역사가 시작된 시점이다. 고구려를 침공한 唐은 석각도(石刻圖)를 수장하고 동이의 천하관(天下觀)을 불용했다. 그러나 고구려는 벽화(壁畵)로 그 자취를 남겼다.
백제는 545년(성왕 23)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 《일본서기(日本書紀)》, 602년(무왕 3) 승려 관륵(觀勒)이 역본(曆本)과 천문서(天文書)를 일본에 전하고 가르쳤다고 했다. 《海東繹史》, 선대의 찬란한 천문연구서들은 다정가(多情歌)로만 남아 있는가?
천문, 산학(算學)자들을 발굴하여 고조선의 천문을 재현하게 한 세종,
훈민정음 창제는 ‘조상의 글자를 본떴다(字倣古篆)’고 고백했듯 ‘조상의 하늘을 본떴다(天做古篆)’라 고백했다면 어떠했을까? 그러나 군왕은 고조선의 찬란한 문화와 문명에 대해서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조선 사대부들은 다투어 단군시대는 미개(未開)했다고 외쳐 폄하하고 비하했다. 자주적 국가가 되지 못하고 속국의 암울한 시기였다고 변명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산재해 있다.
32년 통치 기간 《고려사(高麗史)》 편찬과정에서 단군 기록은 전면 삭제되었고, 조의선인(阜衣仙人) 후예들은 백정(白丁)이 되어 한(恨) 오백년 굴욕적 삶을 살아온 것도 보았다. 1424년 영락제의 죽음 앞에서 27일 동안 서쪽을 향해 지극한 부모상(父母喪)의 예(禮)로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충심을 다한 것도 보았다.
1426년 한양 도성의 대 화재에서 32명이 숨져 갔고, 1만여 명 이재민의 생사는 도외시한 채 사냥터 사기소(沙器所)에서 머문 임금도 보았다. 단, 이순지를 통해 천문류초(天文類秒)로 비기의 일말을 내비추어 고뇌를 갚았다 자위한 것일까?
이 기록은 천문분야에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게 하는 동력이 되었고, 만세에 찬란한 업적으로 남아 칭송되었다. 사람들은 이 시기를 불러 감히 태평성대(太平聖代)라 말한다.
“盡入書雲觀所藏 《天文秘記》 于內” 13자(字)의 비밀스러운 이 기록은 단군조선의 천문을 덮은 채, 이후 조선에서 영구히 사라지고 말았다.

맺음말
고구려가 동아시아 최강국으로 자리 매김을 한 것은 고조선으로부터 경당(扁堂)을 통해 교육에 심혈을 기울인 이유로 풀이된다. 부도지(符都誌)에서 적시했 듯, 천지창조 후 오미(五味)의 변(變)이 생기고 마고(麻姑)가 천부(天府)를 거두어 자재율이 파괴되다 보니 생존을 위한 수단인 식습관으로 인하여 뱀과 같은 독을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피와 육신이 탁해지고 인간 마음의 기운인 심기가 모질게 변(心氣酷變)한 사람들을 육례(六禮) 교육을 통해 교화, 선인(仙人)의 경지에 이르게 하고자 하는 데 목적을 둔 것으로 파악된다.
즉, 원시반본(原始反本)을 위해 육례는 이 처럼 목표와 목적을 둔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교육 시스템으로 오상지도(五常之道)와 치신득도(治身得道)를 꾀했을 것이다.
부도지는 또 “천부를 조증(照證)하여 수신(修信)하고, 해혹복본(解惑復本)할 것을 맹서하며 부도(符都)를 건설할 것을 약속하니 이는 지역은 멀고 소식은 끊어져 제족의 언어와 풍속이 점차로 변하여 서로 다르게 되었기 때문에 함께 모여 협화(協和)하는 자리에서 천부의 이치를 강(講)하여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것이더라. 이것은 후일에 회강(會講)의 실마리가 되니 인사가 번거롭고 바빠 강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때문이더라”라 하여 그 뜻을 강조했다.
행촌이 단군세기에 그 뜻을 전하고, 이맥이 태백일사에 그 뜻을 부기하여 정리했음은 천손민족의 자긍심을 되살리고자 하는 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염원은 숭유(崇儒)의 국교화와 사대명분론(事大名分論)에 의해 처절하게 맥(脈)이 절단되었음을 보게 된다. 경당의 학동 조의선인들은 백정 이름으로 한(恨) 오백 년 굴욕의 세월을 감수했다. 여말선초(麗末鮮初)부터 시작된 고사서(史書) 분서(焚書)는 고조선의 역사를 단절하게 했으며, 대륙 기반 하늘의 별자리(星座)는 반도의 하늘로 둔갑되었고, 지리지명(地理地名) 변경은 아름답던 우리 고유의 언어를 송두리째 없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1만 년을 꽃피울 토대가 마련되어 가고, 구리에서 시작된 한류열풍 기상이 일어나고 있지 아니한가. 소도(蘇塗)의 시발점이다. 여기에서 어아가(於阿之樂)를 하고, 천경신고(天經神誥)를 통해 신성(神性)을 찾아야 할 것이며 그러므로써 부도(符都)의 세상이 열리리라고 본다. 천추(千秋)의 기록에 비해 부족한 면이 너무 많다. 지속적인 연구를 통해 보충해 나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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