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最古)의 고려 ‘잠견지’ 고대사서와 함께 사라지다

고려지(高麗)의 이름 잠견지(蠶繭紙). 고려지라 했으나 이는 고구려를 칭한다. 고구려는 또 고조선의 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 BC 1419년 ‘뽕나무 껍질(桑皮)로 종이(紙)를 만들었다’ 단기고사의 기록이다. 이 기록으로 보면 고조선 문자를 남기기 위해 종이 제작은 꾸준히 이루어 졌다는 추론이 충분하다. 이 기록만으로도 종이 제작은 세계 최초요, 최고(最古)다. 전북 남원 실상사 극락전에 안치된 조선시대 건칠불(乾漆佛) 좌상의 머리 안에서 14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고려시대 불경이 발견됐다. 대한불교조계종 실상사와 불교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컴퓨터 단층촬영 결과 불경은 뽕나무 종이에 은가루로 쓴 ‘대반야바라밀다경’이라고 최근 밝혔다. 19대 구모소(緱牟蘇) 단군 때 ‘뽕나무 종이’를 발명했다는 기록이 증빙됐다.

BC 2240년 부루단군께서 ‘도랑을 파고 농업과 양잠(養蠶)을 권장하며, 학교를 지어 학문을 일으키시니 문화가 크게 진보하고 그 명성이 나날이 퍼져 갔다 [辛丑元年…勸農桑設寮興學文化大進聲聞日彰).”는 단군세기의 ‘양잠(養蠶)’ 기록은 종이 발명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보인다.

1273년 원(元)나라에서 편찬한 농상집요(農桑輯要)를 이암(1297∼1364)이 도입, 저술했다는 논리는 원(元)이 고려를 속박(束縛), 단군조선의 흔적을 지우고 학문을 기묘하게 인용했다고 보이는 대목이다. 이암이 고조선의 찬란했던 ‘농상(農桑)’ 기록을 남겼다. 3,500여 년이 지나 우리 것을 기록한 이웃 나라의 서책을 도입을 하면서 이암은 어떤 감회에 젖었을까? 후학들의 역사의식과 자중(自重)을 독려한 것은 아닐까?

송나라 서긍이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의 창고마다 서책이 가득하여 도저히 헤아릴 길이 없으며, 기서와 이서 또한 많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고대사서들. 황제국의 찬란한 문화와 함께 수많은 고대 사서를 장정했을 세계 최고의 종이 잠견지는 고려 멸망과 더불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도경>을 비롯, <고반여사(考槃餘事)>, <문방사고(文房肄攷)〉 등 고려지의 우수성을 예찬하는 고사서의 기록에서 선조들의 가녀린 숨결만을 확인해 볼 뿐 사라진 종이의 한 부분도 찾을 길이 없다.

‘고려의 종이부채 학같이 나는 듯 상당의 솔 그을음에 사향 향기라(麗紙扇鶴翎翔 上黨松煙麝澤香)’ 고려의 문신이며 재상이었던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고려지를 찬미한 시 구절이 그가 지은 <동국이상국전집> 제15권에 남아 고려의 찬란한 문화를 다시 엿보게 한다.

잠견지(蠶繭紙). 세상 어느 민족도 감히 그 제조 기술을 흉내 낼 수 없었던 고려의 종이였으며, 또한 최고의 품질로 명성을 떨치며 송, 당이 부러워하여 다투어 썼음을 이규보는 시를 빌어 노래했다.

고려지(高麗紙)라 불리운 잠견지는 “금견(錦 : 누에고치로 만든 비단)을 가지고 만드는데, 종이의 색깔이 하얗기가 명주[綾]와 같고, 질기기가 비단(帛)과 같아서, 여기에다 글씨를 쓰면 먹이 진하게 배어 아주 좋다. 이것은 중국에는 없는 것으로, 역시 기이한 물품이다”는 기록이 <고반여사(考案餘事)>에 보인다.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은 〈해동역사(海東繹史)〉 문방류(文房類)에서 상등·중등·하등의 당나라 진적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

모사한 육조(六朝)의 진적과 명나라의 명화(名畵)의 두루마리 또한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썼으며, 성호 이익(李翼, 1681~1763)도 그가 쓴 <성호사설〉 제4권 견지(紙)편에 송나라 조희곡(趙希鵠)이 지은 〈동천청록(洞天淸錄)〉에 “고려지는 면견(綿繭)으로 만들었는데 빛은 비단처럼 희고 질기기는 명주와 같아서 먹을 잘 받으니 사랑할 만하여 이는 중국에 없는 것이니 역시 기품이다. 면견 또는 잠견(蠶繭)으로 난정첩을 썼다는 것도 이 고려지를 가리킨 듯하다.”라는 기록을 인용해 밝혔다.

이어 이익은 “지금 견지란 것은 일본에서 들어오는데, 내가 사서 글씨를 시험해 보니 참으로 좋은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능히 만들 수 없는 것이다. 추측컨대, 조희곡이 봤다는 것도 일본에서 온 것인 듯하다”고 뜻밖의 증언을 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임진왜란을 겪은 지 1세기, 병자호란을 겪은 지 반세기가 경과된 기간으로 능히 만들 수 없는 것”의 의미는 이미 제지기술의 맥이 끊겼음을 밝혔으며, “일본에서 온 것인 듯하다”고 하여 전란 중에 일인들이 잠견지를 훔쳐 갔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서화사(書畵史)에는 “사릉(思陵)의 서화 가운데 상등의 진적(眞跡)과 법서(法書), 양한(兩漢)·삼국(三國)·이왕(二王)·육조(六朝)·수(隋)·당(唐)의 임금과 신하들의 묵적(墨跡)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하여 고려지의 우수성을 재확인하고 있다.

“비록 세상이 달라져서 모든 것이 변하겠지만 마음을 일으키는 까닭은 같을 것이다. 후세에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또한 이 글에 감회가 깊을 것이다[雖世殊事異 所以興懷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난정집서(蘭亭集序)>의 말미 구절이다. 이 글은 서성(書聖)의 칭호를 받은 왕희지(王羲之, 321~379)가 지은 것이다. 353년 난정(蘭亭)이라는 정자가 완성되자 초청한 명사들 앞에서 쓴 글이다. 동진(東晋) 사람인 그는 취중(醉中)에 누에고치로 만든 최상의 잠견지(蠶絹紙)에 쥐의 수염으로 만든 서수필(鼠鬚筆)을 들고, 해서체로 일필휘지(一筆揮之)하여 썼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왕희지는 “내 글이 과거 어떤 문장가의 글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흐뭇해했다는 기록을 보면 그 자부심 또한 잠견지가 있음으로 해서 그 필체를 더욱 돋보이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추사 김정희(1786~1856)는 “당 태종은 왕희지가 잠견지에 서수필(鼠鬚筆)로 쓴 난정진적(蘭亭眞跡)을 얻어내어 그것을 모각(摸刻)하여 황자(皇子)와 근신(近臣)에게 내려 주었는데, 겨우 수본에 그치고 그 석(石)은 부서졌으며, 진본은 순장(殉葬)되어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고 그가 쓴 《완당전집(제4권)>에서 밝혔다.

이에 앞서 285년 왕인 박사가 일본에 건너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한 것을 보면, 우리의 종이 역사는 삼국시대에 크게 발전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유기, 백제의 서기(書記), 신라의 국사(國史)기록들은 우리가 발명한 우리의 종이인 잠견지에 쓰여 졌기 때문일 것이다.

610년 고구려의 담징(曇徵)79)이 제지술과 조묵법(造墨法)을 일본에 전한 기록과 751년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이 석가탑 탑신에서 발견되므로써 당시의 목판과 제지술이 얼마나 훌륭했었는가를 확인해 주고 있다. 종이(紙) 뿐만 아니라 벼루(硯), 붓(筆), 먹(墨) 등 문방류(文房類)는 신라 때부터 최고의 품질로 이름이 나 송, 당이 부러워했고 다투어 썼다는 기록도 있다.

윗 글에서 보듯 양한(兩漢)시대에 이미 고려지로 장정했다는 기록으로 보면, 잠견지의 발명 기초를 다진 연대는 그 훨씬 이전 단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3세 단군 가륵(BC 2182) 때 가림토’ 문자를 만들고 〈배달유기(倍達留記)〉를 편수했다. 그 기록이 갑골, 골에 새겨지고목간으로 옮겨졌으며, 후일 잠견지에 옮겨 썼다는 뜻이다.

천자와 제후는 공상(公, 桑田)과 잠실(室)을 가지고 있어서, 궁실의 부인들은 반드시 공상(公)에 뽕나무를 심어 잠실(蠶室)에서 누에를 쳐서 옷감을 짜는 일을 의무적으로 하였다. <시경(詩經)〉국풍에도 “단비 내리고 난 뒤에 말구종에게 명해서 새벽별 보고 일찍 멍에 메워 상전(桑田)에서 머무니(靈雨旣零 命彼官人 星言風駕 說于桑田)”라 하여 비단과 종이의 역사가 동이족에 의해 발명되었음을 확인하고 있다.

1409년 태종은 주(周) 성왕(成王) 때의 공상(公桑) 제도를 본 떠 궁원에 뽕나무를 심도록 했으나, 제지술은 보급되지 않았다.

세계 4대 문명권에서는 종이 이전에 언어나 그림의 기록 전달 매체로써 다양한 재료들을 이용했다. 원시시대에는 흙·돌·동물의 뼈에서부터 점토판, 동물의 가죽, 나무판 등이었고 황하문명권에서는 죽간(竹簡)과 목간(木簡)이 이용됐다.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에서 개발됐던 양피지(parchment), 이집트 문명권의 파피루스(papyrus), 그리고 마야, 아즈텍 문명권 등 유럽 각 지역에서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개발했다. 특히 양피지나 파피루스 같은 것은 전 세계에 전파되기 전까지 약 3천 년 이상 종이의 역할을 대신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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