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없는 자는문학‧예술의 언저리를넘지 못한다?

둘째딸은 맹목적으로 이름도 없는 시인 아빠가 위대한 시인이라고 마냥 믿는 모양이다. 그런 자존감으로써 자신의 자존을 지탱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그냥 입바름인가. 어쨌든 아빠는 제대로 시적 결구를 갖추지도 못하고 또 현실문단의 처세술에 편승도 못하는 결벽성만 갖고 있는, 마냥 글자만 긁적이는 시인나부랑이다.
아빠의 생일이라고 가족이 함께 생일여행을 떠났다. 난데없이 치악산의 구룡사로 지목을 했다 엊그제 백일을 지난 아들을 데리고 폭염 속으로 최장 도정에 나서는 거다. 괜찮을까? 서울에서 원주 치악산 까지는 거의 3시간 가량이 걸리는 시간인데? 일단은 인터넷으로 확인한 결과 ‘시원하다’는 그 평가 하나로 그곳을 선택했다나. 두 딸들이 합의를 했으니 아빠로선 고마운 일이다. 이의를 달지 않고 따라주면 될 것 같았다. 문제는 백일 좀 넘은 손자 녀석이 견뎌낼까 하는 우려가 있었지만 애 엄마가 그런 점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믿고 요즘 시대에 딸애의 의사를 따라주는 것도 미덕이라고 생각했다.

두 대의 승용차로 나누어 타고 달리는 차안은 시원했다. 바깥은 햇빛이 쨍쨍이는 장마 속의 폭염이다. 여행 중에 아이는 더운데 노출됐다가 차가운 실내에 들어갔다가 차 속에서 잠이 들었다가 금방 깨우다가 또 자기 엄마 아빠 품에만 안기다가 다른 손을 타니까 더 스트레스를 받는 바람에 애가 찡찡거린다. 애를 달래는 엄마부터 지치는 모양이니 나머지 여정을 축소해야했다.
어느 깊숙한 산속의 모 카페에 가서 파스타와 커피, 빵을 먹고 난 뒤 큰딸 가족은 먼저 보내고 작은 딸이 운전하는 승용차에 타고 우리는 한 곳을 더 두르고 가기로 했다. 원래는 한지박물관과 박경리문학관 그리고 박건호 노래공원 등 세 곳을 들렀다 오려고 했는데 빡빡한 시간과 날씨 때문에 일정이 빗나갔다.
큰딸 가족은 백일돌이 때문에 먼저 보내고 큰 맘 먹고 원주까지 멀리 왔으니 아쉽기도 하고 다음에 일부러 오기도 뭣해서 한 군데라도 더 둘러서 가기로 했다.

원주는 1군사령부가 있었고 통신단이 있었는데 45여 년 전 두 곳에서 내가 군 생활을 했던 곳이었다. 다크투어리즘으로 풀지는 않겠지만 당시 25살의 늦은 나이로 군 입대의 심란한 아픔이 점철된 곳이다. 누군가 말했다 ‘국방색을 보면 왠지 까닭모를 아픔을 느낀다’고 하던 이의 이미지메이킹도 지금도 나의 뇌리를 때린다. 통신병으로 근무했었던 당시의 위태롭던 추억도 불러일으켰다. 오죽하면 제대한 뒤 이곳을 향해서는 오줌도 싸지 않겠다던 우스갯소리도 있었는데 수십 년이 흐르자 살풋 그때가 아카이빙된 것이 그리워지기도 한다만 그 부대 터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그냥 지나치고 시간상 한 곳을 택하라면 박경리 공원 보다는 박건호 선생 노랫말 공원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윈주시 중앙동 시청 부근 문화의 거리 공원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박건호 노래공원에 들렀다. 70-80년대를 풍미했던 불후의 대중가요 작사가인 박건호(朴建浩) 선생의 노래비가 2십여 개 가량 설치돼 있었다.

대부분 노랫말이 재치 있고 서정적이고 문학성이 깃든 가사들인데 정수라가 부른 ‘아 대한민국’ 노래 탑과 임수정이 부른 ‘연인들의 이야기’ 노래비가 우뚝 서있다. 나머지는 비석에 가사를 새겨 바닥에 쭈욱 눕혀놓았다. 그리고 돌 의자에 앉은 젊은 시절의 그의 부조가 있고 포토 존처럼 옆자리가 비어 양쪽에 앉아서 사진을 찍게 해놓았다.
대중가요 작사가. 박건호 선생을 오래 전에 김삿갓 문학행사 때인가 만났었다. 밤새워 할 이야기가 많았던지 이방 저방으로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풀던 그의 열정적인 모습이 생각났다. 그 이전엔 우리 문학회에 몸담아 활동을 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몸이 좋지 않아 지병으로 2007년(1949년 탄생) 58세 일기로 세상을 떠난 그와의 인연을 생각하니 아쉬움이 남는다. 곧장 팽개치고 원주를 떠날 수 없었고, 세상을 떠났다는 그의 소식을 들은 지 몇 년 같았는데 벌써 16년이 지났다니…
본격문학의 박경리 선생 보다는 우리 피부에 가깝게, 가슴에 직정으로 와 닿는, 귀에 익은 노래의 작사가 박건호 선생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미리 카페에서 두 딸에게 물어봤다. 박경리 선생을 아느냐고? 큰 딸은 어설프게 아는 체를 했고 둘째 딸은 낯선 이름인가보다. 그래서 작품 ‘토지’를 말하자 그때서야 조금 감이 오나보다 했지만 그냥 제스처일뿐었다.
그럼 ‘잊혀진 계절’, ‘모닥불’, 이런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들어본 노래라고 했다. 결국 거대한 민족의 문화적 유형 자신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보다는 우리의 직정을 자극하고 감정을 울리는 대중가요 작사가 박건호 선생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대중가요가 애들에게는 더 익숙하고 정서에 가까울 테니 더 현실적인 접근이 아니겠는가? 작은 딸이 노래비들을 둘러보더니 알 것 같은 노래가 몇 개 있다고 말하며 한마디 한다. ‘아빠 집으로 가는 길에 저분의 노래를 들으며 가시지요.’ 대단한 생각이다. 어떤 노래이고, 의미를 인식하고 싶은 열의에서다. 그러면서 묻는다.
‘위대한 시인, 우리 아빠의 시비도 세워야지요?’ ‘세우면 좋겠지’ ‘어디에 세우고 싶으세요? 고향에?’ ‘글쎄 어디든지’ ‘무슨 시를 비에 새기고 싶나요?’ ‘하하하 아직 그런 생각은 안 해봤어’ 딸애가 이런 질문을 연신 하며 관심을 가져주는 것만으로도 생일선물에 값하는 것이리라.
‘잊혀진 계절’부터 ‘모닥불’ ‘연인들의 이야기’ ‘인어 이야기’ ‘내 곁에 있어줘’ ‘빙글빙글’ ‘빈 의자’ ‘그대 이름은 장미’ ‘아 대한민국’ ‘단발머리’ ‘기다리게 해놓고’ ‘우린 너무 쉽게 헤어졌어요’ ‘토요일은 밤이 좋아’ ‘끝이 없는 길’ 등을 들으며 우리는 서울로 향했다. 1시간 40분을 달리니 서울 집에 닿는다. 불후의 작사가 박건호 선생은 1972년 ‘모닥불’로 데뷔, ‘당신도 울고 있네요’ 등 히트곡을 내는 등 3천 여곡을 작사했다. 그가 작사한 노래를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듣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박건호 선생은 노래 외에도 시집 ‘영원의 디딤돌’ ‘타다가 남은 것들’ ‘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 ‘기다림이야 천년을 간들 어떠랴’ 등을 발표했다. 1980년대 후반 뇌졸중으로 언어 장애와 손발 마비 중풍을 겪고 신장, 심장 수술을 하면서 투병생활을 해 왔다.
한 노래가 뜨기 위해서는 작곡, 작사, 가수가 어울러져야 히트곡이 될 것이다. 그 시대를 반영하는 노래로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달래며 풀면서 이어온 그의 노력은 지대하다.
문학예술은 신의 이야기를 위탁을 받은 사람이 대신 다루는 특별함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생사를 넘나드는 그런 삶의 고개가 없었다며 이런 명곡들을 쓸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무서운 이야기다.
하지만 방대한 박경리(朴景利)의 ‘토지’를 보는 것과 임수정의 연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과의 괴리를 어떻게 메워야 하는 지가 우리에게 던져진 숙제다.
벌써 저녁 7시가 넘었다. 결국 시간이 없어 박경리 공원은 들리지 못했지만 마음속에 묻고 귀향해야 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1969년부터 집필에 들어가 1994년에 전 5부 16권으로 완간한 대하소설이다. 한말의 몰락으로부터 대한실권기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에 이르는 과정을 지주계층이었던 최 씨 일가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폭넓게 그려내고 있다. 지난 시대 우리 민족이 겪은 고난의 삶을 생생하게 형상화해 낸 점에서 ‘토지’는 역사소설의 규준에도 적응하는 것이지만, 근본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탐구로서 더 큰 성과를 얻고 있다. 작자 자신도 언급했듯이 ‘토지’는 여느 역사소설과 그 성격이 다르다. 박경리 소설은 인간 삶의 역사적 배경과 현실에 궁극적 관심을 두는 게 아니라 이 문제들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면에 대해 탐구하기 때문이다. 박경리는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근원적 탐구를 소설화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박경리 선생은 인터뷰를 잘 안했는데 어렵게 성사됐다는 어느 인터뷰에서 먼저 ‘정치와 문학 이야기는 묻지 말라’는 조건을 달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작가는 얼굴이 필요 없습니다. 작품 내놓으면 그걸로 끝이죠. 문학 작품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독자들이 읽어주는 것으로 족합니다. 사람마다 자기 눈으로 평가하면 됩니다. 작가가 이러쿵저러쿵 해명을 하는 것은 작품이 미진하다는 뜻이죠. 나는 문학에 관해서는 인터뷰를 하지 않고 생명과 환경에 관한 인터뷰라면 응합니다. 내 작품을 읽고 마음대로 상상하라는 거죠. 굳이 내가 해명할 필요가 있겠어요’ 문학이야기 보다는 생명·환경 이야기나 하자는 것이었다. 박경리 선생이 벌이는 생명 운동에 대해서는 “생명이 주인이 되는 새로운 사조가 나와야 돼요. 사람도 살고 지구도 살리는 일입니다. 내가 인간을 지구의 악성 바이러스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핵무기가 생존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시장에도 먹고 입고 자고 하는 그런 필수품보다는 없어도 될 게 더 많잖아요. 그게 지구를 병들게 하는 거죠. 자원을 고갈시키고. 작가들이 들으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생명과 생존이 첫째고 정치나 예술은 둘째입니다. 생명과 생존 이상의 진실은 없습니다. 그게 있음으로써 문학도 있는 거죠.”라고 박경리 선생은 언급했다.
그러면서 “통영 어시장에 들렀는데 장사하는 분들이 악수를 청하는 거예요. 신기해서 작가인 나를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책을 읽었다’는 거예요. 백화점이나 휴게소 같은 데 가서도 인사를 받아요. 음식점 구석에 들어가 밥을 먹고 있으면 뭐 한 가지가 더 나와요.” 불행해서 문학을 시작했다던 박경리 선생. ‘토지’에 모든 인생을 부러 놓고 2008년 81세로 세상을 떠났다.

박경리 선생은 1926년 통영에서 태어나 1965년부터 정릉동 골짜기 집에 살다가 1980년 서울을 떠나 원주시 단구동으로 이주했다. 20년간 이곳에 정착해서 1969년부터 시작한 토지를 1994년에 4, 5부를 집필하고 탈고했다. 26년이란 오랜 집필 기간이었다. 박경리 선생이 살던 원주 집은 박경리문학공원이 됐으며, 박경리의 고향이자 묘소가 있는 통영에는 박경리 기념관 과 하동에 최 참판 댁과 박경리문학관이 건립됐다. 다음엔 일부러라도 찾아가 봐야겠다.
이런 방대한 민족적 배경 즉 그 출렁이는 바다 위에 물고기들이 반짝이는 노래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누군가가 미지의 버려진 세계를 흔들어 주었기 때문에 인간들은 들여다 볼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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