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산의 지명 유래와 역사

성황사, 양천향교, 고성지 성터

서울 강서구 가양동 올림픽대로와 접한 한강변에는 해발 74m 높이의 나지막한 산이 있다. 이 산은 조선시대 양천현의 본거지로 궁산(宮山)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는데, 과거 삼국시대에는 근처의 지명을 따라 파산이라고 불렀으며 산 위에 쌓은 성이 있다 하여 성산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렸다. 그밖에도 관산, 진산이라고도 불렀다.

관산 성황사(關山 城隍祠)

이 사당(祠堂)은 성황사 신(神)의 위패를 모신 묘당(廟堂)이다. 성황사의 신(神)은 여신(女神)으로 이곳 마을 사람들은 옛부터 도당(都堂)할머니로 모시고 있다.

일찍이 조선시대 중종 25년(서기 1530년)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與地勝覽)에 이르기를 양천현의 사당인 성황사는 성산에 있다(城隍祠。在城山)라고 했다. 지금부터 500여년 전의 기록이다. 성황사 신(神)께서는 산 아래에 마을에 거주하는 민초(民草)들의 번영과 행복을 이루도록 도와주고 여러 악귀를 몰아내고 재앙과 돌림병을 막아주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산아래 사는 민초들은 이에 보답 하고자 매년 음력 10월 초하루 날 제물(祭物)을 차려 산신제(山神祭) 올리고 굿을 한다.

이에 대해 황진(黃瞋)이 시를 남겨 당시의 풍속을 엿볼 수 있다.

古峰斗絶類天成(고봉두절류천성) 옛 산봉우리 매우 험한 것은 저절로 된 것이고

漢水通潮一帶穔(한수통조일대황) 한강물이 밀물을 맞아서 띠를 띠웠더라

殘堞不存神像古(잔첩부존신상고) 산 위에 남아있던 성의 담장도 다 없어졌는데

村民歲歲寬報祭(촌민세세관보제) 신령님을 숭배하는 마음으로 옛사람을 본 따서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굿을 하더라.

이곳 성황사는 여성황신을 모시는 상황을 보면 그 유래가 어떻게 될까?

서울의 대모산과 마포의 노고산의 지명유래가 되는 노고(마고)할머니와도 연계가 되는 건 아닐지.

마고는 인류 신선문화의 창시자라고 알려지고 있다.

마고여신은 이곳에서 지상 최초의 선(仙)의 문화를 펼치고 열어 갔다. 인류 신선문화의 고향 마고성(麻姑城)이 이렇게 해서 열렸다. 마고성에선 마고 여신 이후에도 궁희 소희 등 여신(女神) 후예들이 지속적으로 무병장수의 조화 신선문명을 이어 갔다.

한국에 전승돼 온 마고 문화와 관련이 되는 지명이 많다. 노고산(老姑山, 강화도·서울 마포구·부천)과 마고산(경남 의창군 북면)으로 불리는 지명들이다.

한국 민간에서 마고할망, 마고할미, 마고 할머니, 혹은 마고선녀 등으로 불리며 창조의 여신 마고 이야기는 면면히 구비전승 돼 왔다. 본래 할망, 할미는 존칭이다. 즉 할망은 한+어미, 즉 대모(大母)란 뜻이다. 그러면서 이곳 궁산 근방에는 허준이 고향 허씨 가문설화의 허황후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궁산 정상의 고성지

전쟁의 요충지와 상처가 남아있는 궁산

이 궁산은 과거 백제시대부터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으로 여겨졌기에 성을 쌓는 등의 일이 많았다. 이곳에는 양천 고성지 성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백제 22대 문주왕이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기 전인 서기 475년에 강 건너 고구려를 견제하여 국경을 지키기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에는 ‘성산 고성(城山古城)은 석축이며 둘레는 7백26척이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라고 기록됐고 동국여지지에는 ‘성산(城山)은 양천현 북쪽 1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옛 성이 있는데 산을 두르고 있으며 둘레는 720자이다. 지금은 무너졌다.(城山。在縣北一里。鎭山。有古城,緣山,周七百二十尺,今廢圮)”라고 표기되어 있다. 성산은 현재 궁산의 또 다른 이름이다.

조선시대 양천현의 주산인 궁산 정상부에 있는 서울 양천 고성 터가 둘레 218m 평지를 둘러서 만든 테뫼식 산성터다. 몇 차례의 지표조사에서 통일신라의 토기조각과 기와조각이 많이 나왔다는 것으로 봐서는 방어를 위한 진지의 성격과 함께, 성 안에 일부 주민들이 사는 가옥이나 행정관서등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 전투에 임하기 전, 도원수 권율장군이 이 고성지에 머물렀다고 전해진다.

행주산성, 오두산성과 함께 한강하구를 지키는 중요한 요새 역할을 수행했으며 임진왜란 당시 전라 창의사(倡義使: 나라에 큰 난리가 일어났을 때에 의병을 일으킨 사람에게 주던 임시 벼슬) 김천일 등 의병장들이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을 도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궁산 산성에 관군과 의병이 진을 치고 한강 건너편 행주산성에 주둔하는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왜적을 물리쳤던 곳이다. 궁산은 이처럼 조선의 도성을 방비하는 전략적인 요충지였다. 멀리 한강 넘어 임진왜란 때 승리한 행주산성의 행주 대첩비가 보인다.

또 2018년도에 민간에 개방된 ‘궁산땅굴역사전시관’이 있다.

이곳은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중반에 조성된 것으로 땅굴을 파기 위해 당시 많은 지역주민들의 강제동원이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는 일본이 전세가 많이 기울어지면서 이런 땅굴을 많이 팠다고 한다. 적군의 포격에 대비하고, 김포 비행장(현 김포국제공항 부지)을 관찰하며, 전시에 지휘본부로 사용하기 위해 굴착을 했다고 전한다.

한국전쟁 때도 군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물론, 방어적인 기능만 궁산이 수행했던 것은 아니다. 서쪽의 개화산, 오른쪽의 탑산, 쥐산 등과 함께 궁산은 한강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이루고 있었다. 때문에 궁산은 양반들이 한강 뱃놀이의 풍류를 즐기는 곳이기도 했으며 산 정상에는 중국 동정호의 누각 이름을 딴 악양루가 있었으나 소실됐고 영조 13년(1737) 그 자리에 소악루가 들어서게 됐다.

이 소악루 또한 소실됐으나 약간 자리를 이동해 1994년에 다시 복원됐다.

또한 인근에 있는 조선 태종 11년(1411)에 창건된 양천향교가 있다. 서울로 편입되는 바람에 유일한 서울의 향교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겸재 정선이 양천 현감으로 근무했던 관아 터

무엇보다도 궁산엔 1740년대 영조가 총애했던 겸재 정선이 이곳 양천 현감으로 오게 된 것이다. 사대부이면서도 그림을 잘 그렸고 유명한 진경산수화법을 창시한 화가로 알려졌다. 궁산 기슭에 당시 양천관아가 있었던 곳이고 현감인 정선은 이곳 궁산에 올라가 동쪽으로 내다보면서 한강의 풍경을 자주 그렸다. 그의 그림 속에 그 유명한 선유봉이 그려져 있다. 2개의 봉우리가 있는 선유봉의 형색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선유봉의 흔적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소악루의 원래 위치는 <여지도서>, <양천군 읍지>와 정선이 그린 소악루, 소악후월(소악루에서 달을 기다리며) 등의 그림으로 짐작해 볼 때 강서구 가양동 산 6-4(일명 세숫대바위) 근처로 추정되나 주변의 변화가 극심하여, 한강변 경관 조성 및 조망을 고려하여 현 위치에 1994년 신축했다.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화강석 8각 주초에 민흘림의 원주를 세우고 5량집 겹처마 구조로 단층 팔작 기와지붕으로 하고 주위에 난간을 둘러 한강 경관을 조망토록 했다.

근처엔 허준 박물관, 서울식물원, 양천 향교 등이 있다.

글| 홍정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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