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조선(箕子朝鮮)은 환작(幻作)됐다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했다[武王封箕子於朝鮮]라는 《상서(尙書)》, 〈홍범장>에 기록된 이 여덟 글자는 고조선의 역사를 송두리째 흔들고 동이족의 근간을 뒤집어 놓았다. 조선시대 500여년동안 지속된 환작된 ‘기자조선’설은 천하를 지배하는 수단이 됐고 통치자의 방패 수단으로 전락됐다.

그러나 그 원문에는, ‘기자가 일찍이 나는 은이 망한 후에 주 무왕의 임명을 받는 신복이 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했다.(<한서> 권28. 지리지 제8하)’는 대목 중에서 ‘주 무왕이 기자를 조선왕으로 봉했다’고 문장을 조작한 데서부터 역사는 소용돌이를 치게 된다. 위작의 근원이 밝혀지자 《시경》의 구절을 인용한 〈잠부론(蠶夫論)>을 근거로 다시 ‘한씨조선’설을 부각시켜 한반도를 기자의 후예 나라로 둔갑시켰다.

이로 인해 모화사상에 의한 사대로 인해 고조선의 역사는 말살됐다.

기자조선의 환작이 가져온 폐해는 식민사학과 동북공정의 빌미를 제공하는 근원이 되고 말았다.

우리민족의 올바른 방향을 위하여 자아성찰을 통해 그릇된 역사관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역사의 청산’이 미루어지는 한 동북공정을 분쇄하고 식민사학을 철폐하는 길은 요원하다. 사견이나 사도를 깨고 정도를 나타내야만 정의와 기개가 되살아나지 않겠는가? 이래야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이루어 질 것으로 사료된다.

1 들어가는 글

『논어』의 ‘기자(箕子)’에 관한 기록으로,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역사 왜곡이 시작됐다.”

“미자는 가고 기자는 노예가 되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은(殷)나라에 세 명의 어진 이가 있었다”라는 『논어』의 기록을 필두로 하여, 이후 『좌전(左傳)』과 『여씨춘추(呂氏春秋)』에 의해서 기록이 이어졌고, 은나라가 멸망한 지 900여년이 지난 후 복생(伏生)이 《상서대전(尙書大全)》”이라는 걸작을 저작했다.

『상서대전』에는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를 조선(朝鮮)에 봉했다”라는 기록이 ‘기자’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세우고 왕이 되는 배경을 설명하는 증거가 됐다. 이 몇 자의 환작(作) 기록의 결과가 뿌리 깊은 ‘모화사대사상(慕華事大思想)’을 낳는 시발점이 됐다.

‘모화사대사상’은 유일사상이 됐고, 이를 주입추종하게 함으로써 동이(東夷)는 비하되고 격리되어서, 동아시아대륙을 경영했던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사는 주역에서 조역으로 추락하게 됐다.

추종 세력군들에 의해 황제(黃帝)는 조선의 계보(譜)를 형성하는데 절대 가치가 됐다. 황제의 16세 후손 자리에 앉은 기자는 한반도로 원행(遠行), 원조(元祖)가 되고 조선 사대부들의 끊임없는 추앙과 찬양을 받았다. 그리고 조선을 지배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기자 관련 기록들의 허구성과 이로 빚어진 조선 500년 동안 기득권을 움켜진 자, 그들의 일면을 하나하나 새겨 본다.

역사는 헤집고 그 상처는 뒤집어야 한다. 역사의 청산이 미루어지는 한 동북공정(東北工程)의 분쇄는 요원할 것이다. 사견이나 사도를 깨어 버리고 정도를 나타내야 <破邪顯正〉 비로소 정의의 기개(氣槪)가 살아나지 않겠는가.

2 엮어가는 글

1. 기자(箕子)에 관한 기록

(1) 기자(BC 1122)가 조선에 와서 왕이 되었다.

(2) 기자의 신분

▲〈論語 微子 十〉

– <사기집해> : 箕子의 箕는 국명, 구는 작위, 이름은 서여(胥餘),

– 『통지』 箕氏는 子姓, 이름은 수유(須, 기자 주), 기자지(箕子志) 수유.

(3) 기국(箕國)의 위치 추정

– BC 637(춘추 희공 33년) 최초 기록 “晋人이 箕에서 패하였다.”

-두예는 태원양현읍 추정.

-『독사방여기요』 : 청 때 태곡현은 한조 태원군 양읍현.

隋朝 때 태곡현 지명변경(태곡현은 현 산서성 북부).

(4) 문헌

“武王 封箕子于朝鮮”

▲<대청광여도」 : 산서요주와 기산(箕山)과 상당(上黨)〉

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왕(朝鮮王)으로 봉했다”

《상서(尙書)》, 〈홍범장(洪範)> 주(註)에 기록된 이 여덟 자가 단군조선을 송두리째 흔들고, 동이족의 근간을 뒤집었다. 조선 500여 년, 이문구가 가진 위력은 천하를 지배하는 수단이 되었고 지배자의 방패 수단이 됐다.

그러면 그 원문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箕子 嘗言 商其淪喪 我罔爲信僕 史記 亦載箕子 陳洪範之後 武王 封箕子于朝鮮 而不臣也 盖箕子 不可臣 武王 亦遂其志 而不臣也’라 했다. 즉, 기자(箕子)가 일찍이 나는 은(殷)이 망한 후에 주무왕(周武王)의 임명을 받는 신복(臣僕)이 되지 아니하였다고 말하였다(漢書 券之28, 地理志 第8下).

분명히 기자(箕子)가 왕이 아니었음을 말하고 있는 데도 전후 문장은 삭제되고, “武王 封箕子于朝鮮”만을 취해 합리화시켰다.

“은(殷)의 완민(頑民)을 뽑아서 주(周)의 서울 낙읍(洛邑)에 이주시켰다(毖殷頑民 遷于洛邑)”

이 말은 서전고명편(書傳畢命篇)에 보인다. 여기에 나오는 완민(頑民)은 나라를 되찾고자 투쟁하는 다물인들이다. 이들의 치열한 독립투쟁을 폭압, 낙읍(洛邑)에 강제 이주 시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기자(箕子)가 조선을 선택한 동기가 된다.

한서(漢書)에도 “기자(箕子)가 스스로 조선(朝鮮)에 망명(亡命)한 것이요, 주 무왕(周 武王)이 임명을 받아 한민족을 지배한 적이 없다[箕子去之朝鮮 師古曰 史記云 武王伐紂 封箕子於朝鮮 與此不同]”라 했다. 사실적(史實的) 기록을 배제,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 왕으로 봉하고 동래(東來)해 한민족(韓民族)을 지배했다고 위조했다.

* 논어, 상서, 죽서기년 등 기자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거나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없다.

*죽서기년: 十六年 箕子來朝”(竹書紀年 卷下 周武王)/16년(서기전 1107년경)에 기자가 (주 무왕을) 와서 찾아뵈었다.

(5) 조선의 문헌과 기록

① 기자동래설에 대한 문헌으로 이후 기자를 조선의 군주로 숭상.

② 문헌 : 《기자지(箕子志)》尹斗壽·《기자실기(箕子實記)》李珥·《기전도(箕田圖)》韓百謙·《기전유제설(箕田遺制說)》·《기전도후설(箕田圖後說)》柳根·《기자외기(箕子外記)》徐命應·《기전고(箕田攷)》李家煥·《기자유지(箕子遺志)》韓榮浩 등

(6) 기타 대륙의 자료

《논어》·《상서》·《죽서기년》 등 기자에 대한 기록이 있으나,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거나 조선에 봉해졌다는 내용은 없다.

<죽서기년》 : 十六年 16년(BC1107)에 기자가 (주 무왕을)와서 찾아 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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