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동래설(箕子東來說)의 허구

기자의 무덤은 대륙에 있다

(1) 기자의 무덤(箕子墓): 몽현(懸현 하남성 상구시) 梁國蒙縣有箕子塚.

-《史記》권30, 蒙縣:秦置 今河南商丘市東北, 漢, 晉屬梁國, 永嘉 後廢.

– “중국에만 기자묘가 세 군데 있는데 어떻게 평양에 기자묘가 있는가”

(2) 《사기(史記)> : 주나라의 신하가 되지는 않았다 (而不臣也).

(3) 정해 37년(BC 1114년, 단군조선 제25대 솔나 단군 37년)에 기자가 서화에 옮겨와 살면서 사람 대하기를 사절했다”

(4) 기자가 망명한 땅은 단군조선의 번조선 땅.

(5) BC 323 기후(箕詡)가 군사를 일으켜 번조선의 왕이 됨.

(奇子朝鮮 BC 1285~BC 323-962년)

(6) 정해 37년(BC 1114 단군조선 제25대 솔나 단군 37년)에 기자가 서화에 옮겨와 살면서 사람 대하기를 사절했다

(7) 기자는 동이의 대사상가였다. 그러나 그가 조선(단군조선)에 와서 살았던 땅은 하남 서화이다. 이 지역이 바로 단군조선의 서쪽 경계 이다. 그가 묻힌 몽성은 자연히 단군조선의 땅이었다!>

(8) 1569년(선조 2) 당대의 석학 ‘기대승’이 선조 임금께 올린 상소문 내용.

요약하면 ‘삼국지연의’라는 황당한 소설책은

-허망하고 터무니없는 말로 쓰여진 소설이고,

-무뢰(無賴)한 자가 잡된 말을 모아 고담(古談)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고,

-잡박하여 무익할 뿐 아니라 크게 의리를 해치는 나쁜 책이고,

-괴상하고 탄망(誕妄)하고, 괴벽(怪癖)한 것뿐이므로 임금이나 백성들이 가까이 하면 안 되는 책이라 멀리 할 것을 상소하다.

가짜 기자조선 결론

-기자는 동이의 대사상가였다. 그러나 그가 조선(단군조선)에 와서 살았던 땅 하남성 서화가 단군조선의 서쪽 경계로 인식되어야 하며 그가 묻힌 몽성은 자연히 단군조선의 땅이었던 것이다.

중국인들이 동이의 대륙사를 한반도 유역으로 밀어내기 위해 2천년 동안 사서를 조작해 온 내용을 진실로 믿는 현실은 시정되어야 마땅하다. 지금 중국 하남성 학벽시 기현에서는 기자묘 복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자는 동이의 땅 서화 유역에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는 이 사서 의 기록을 부정할 자는 아무도 없다.

삼국유사는 단군이 기자를 피했다고 하였으며, 안정복은 성사(聖師: 기자)가 황무지에 와서 교화하고 문화를 꽃피웠다고 했으며, 어윤적〈동사년표〉는 백성의 뜻에 따라 왕이 됐다고 했다. 윤두수 《기자지》는 929년간 41명의 왕이 후조선을 통치했다고 했다.

한때 얻은 세(勢)를 유지하기 위한 기록들이지만, 민족의 대의에서 보면 너무나도 비굴하고 몰역사적인 행위인 것이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에서 ‘기자조선의 계승자라는 의미에서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하여 정점(頂點)을 찍었다.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문헌 입증이 어려워지자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이 고개를 들었다.

한씨조선설(韓氏朝鮮說)

BC 827년경 한후(韓候)였던 한혁(韓)이 주나라 선왕(宣王)을 찾아 갔다는 기록이다.

《시전(詩傳)》〈한혁장(韓章)> 주(註)에 ‘孔氏曰韓武之穆也, 한씨(韓氏)는 주무왕(周武王)의 후손이다’라 기록했다. 이어 ‘한(韓)은 국명(國名)이요, 후작(侯爵)이요, 무왕(武王)의 후손’이라 하여 한혁을 주왕조(周王朝) 후손으로 조작, 한씨조선설로 둔갑시킨 것이다.

한후(韓候)라면 한(韓)나라의 제후이다. BC 827년경의 나라라면 단군조선의 삼한(三韓)을 일컬음이다. 한혁이 주나라를 방문한 것은 단군 조선이 하국(下國)의 영역을 살펴 보기 위한 시찰 개념이다. 이를 교묘하게 뒤집어 놓았다.

후한(後漢)의 왕부(王符 85?~162)는 《잠부론(潛夫論)》에 ‘옛날 주선왕(周宣王) 때에… 한서(西)가 한씨(韓氏)로 성(姓)하였다가 위만(衛 滿)에게 망하였다’는 교묘한 문구(文句)를 넣었다. 잠부론은 시경의 관련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이는 BC 324년 기후(箕詡)가 번한(番韓) 69대 왕위를 찬탈한 후, 799 년 전 箕子를 문성대왕(文聖大王)으로 추증(追贈)했다. 130년 후인 BC 194년 기준(箕準)이 위만에게 패망, 번한의 계대는 마감된다. 위만(衛滿朝鮮)의 위협이 계속되자 본성을 감추고 한씨(韓氏)로 모성(冒姓)했다. 위략집본(魏略輯本)에 기자(箕子)의 후손 기준(箕準)이 인(因)하여 한씨(韓氏)로 모성(冒姓)하였다’고 했다. 모성(冒姓)은 가성(假姓)이다.

한씨가 아닌 것이다.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에는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 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 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韓王이 되었다’라 하여 기정사실화했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해(海)는 바다를 건넌 한반도가 아닌 산동성(山東省)의 지명이다.

권근(權近)은 《동국통감(東國通鑑)》 외기(外記) <삼한기(三韓記)〉 에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 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이라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후략)”라 했다.

위 두 사서의 기록은 한씨조선설을 고착화하는 위력을 발휘했다. 동국통감에 한반도설을 강조한 권근의 고찰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한민족 역사에 심대한 파장을 몰고 왔다.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수정, 삭제하고 〈천상분야열차지도(天上分野列次之圖)〉를 한반도로 비정하여 조작한 개국공신의 위대한 창작열이 경이롭기만 하다.

송(宋)나라의 왕린(王應麟, 1223~1296), 청(淸)나라 고증학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 왕계배(汪繼培, 嘉慶時代 1796~1820) 등이 시전한혁장(詩傳韓奕章)의 한씨(韓氏)를 근거로 내세워 한씨조선설을 재 점화했으나, 허구임이 들어난 것이다.

箕子와 관련된 국내 성씨들은 어떤가. 한씨(韓氏)들은 위략(魏略)과 위지(魏志)의 글을 토대로 기자(箕子)를 시조로 족보에 새겨 넣었고,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근 거로 奇氏, 鮮于氏와 徐氏의 시조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들 사서들은 화이론(華夷論)으로 불리는 존화양이(尊華攘夷)를 토대로 만들어진 기록 들이다.

箕子는 황제헌원의 16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헌원은 공손성(公孫姓)으로 후에 모성을 따라 희성(姬姓)으로 바꾸었다. 기자의 본명은 자서여(子胥餘), 商(殷)나라 왕족 성인 子姓이다. 商을 떠나면서 箕姓이 되 고, 조선에 정착 韓, 奇, 鮮于, 徐氏로 바뀌었다.

어떤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나 단언할 때 ‘내 성(姓)을 갈겠다’라고 한다. 조선은 유교의 영향으로 성(姓)을 바꾸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럼에도 姓이 바뀐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老子를 가문으로 끌어들여 대왕(大王)으로 추증했다. 번한세가(番韓世家)에는 노자의 아버지가 한건(韓乾, 孔丘 適 周問禮 於老子李耳 耳父姓韓名乾 其先風人 後西出關由內蒙古 而轉至阿 踰陀 以化其民/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서 묻는 중에, 노자 아버지의 성은 한이고 이름은 건이며, 조상은 풍인이라 하였다. 후에 서토를 탈출하여 ‘아유타’에서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하였다)이다.

《삼국사기》에는 “唐書云 高句麗俗多淫祠 祀靈星及日箕子可汗等神: 고구려에서는 기자(箕子)와 가한(可汗)를 섬기고 있다”라고 표기했다.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를 인용했다. 구당서는 941년(天福 6) 후진(後晉), 신당서는 1060년(嘉祐 5) 宋나라가 만들었다. 이들 나라 또한 아국(我國)의 입장에서 쓴 철저한 상내약외(詳內略外)의 수법이다.

위 내용에 대해 한 북방민족사가는 “따라서 고구려인들이 기자가한과 주몽의 어머니 부여신을 섬긴 것은 고구려가 지어진 시기인 BC 1세기로 올 라 갈 수 있다”라고 했다. 또 “고구려어 낱말 ‘가한(可汗)’은…6세기 전반기에 더욱 서쪽의 투르크 종족에게도 도입되어 쓰이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로보아 한 번 어긋난 사서의 기록이 또 다른 오기(誤記)로 정착, 왜곡된 사서가 여타 민족의 진서(眞書)로 둔갑된다는 사실은 지적하지 못 했다. 편향된 시각이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위에서 말한 《삼국사기》를 재론한다.

“하륜(河崙)·이첨(李詹)·권근(權近) 등이 《삼국사기》에 수정을 가하여 속된 것과 번잡스러운 것을 삭제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기록한 부분이다.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고려 관찬사서인 《삼국사기》를 왜곡, 위작했다.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충실하고자 ‘기자가한’ 낱말을 강조했다. 이러한 부분을 외면한 채 자랑스럽게 ‘箕子神’, ‘箕子可汗’, 나아가 ‘기자직칭’이라 표기하여 사실(史實)적으로 오기한 사실(事實)이 새로운 사대개념일 터이다.

조선조(朝鮮朝)는 사대모화(事大慕華) 기치 아래 기자왕조(箕子王朝)의 존재를 부각하기 위해 태종조에 구월산 삼성각(三聖閣)을 혁파하고, 단군을 하위 개념으로 밀어냈다.

윤두수(尹斗壽)의 《기자지(箕子志)》, 이이(李珥)의 《기자실기(箕子實記)》, 한백겸(韓百謙)의 《기전고(箕田考)》, 《기전설(箕田說)》 등 사대부들의 ‘기자론서’가 다투어 나왔다. 이로 인해 조선 500년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고착화되고, 기자는 대 사상가의 반열에 서게 되었다. 이병도 또한 잠부론을 근거로 한씨조선설을 주장, 강단을 지배했다.

‘일견폐형 백견폐성(一犬吠形 百犬吠聲)’ 잠부론(潛夫論) 현난편(賢難篇)에 나온다. ‘한 마리 개가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 모든 개들이 그 소리에 따라 짖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왕부(王符)는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며 당시의 폐단을 비판하는 글을 저술해 ‘이름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숨어사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잠부(夫)’로 책명을 정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고, 숨지 않고 역사를 호도했다. 욕부(慾夫)나 탁부(濁夫)라면 모를까.

3천여 세월 한민족의 저변에서 계속 꿈틀거리는 기자(箕子)의 망령, 위국휘치(爲國諱恥)의 정수(精髓)인가? 고도의 정치적 술수인가?

위 내용을 재정리해 보자.

① 왕부의 잠부론을 인용, 한씨조선설 주장. 〈이병도〉

②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周나라(BC 1122~770~479~221년)

③ 靑州(산동성), 上堂(산서성) -지명 이동.

④ 시경(詩經) 大雅蕩之什-7장 韓侯(韓奕)

13대 선왕(宣王) 정(靜) 기원전 827~782년/一部 ‘韓’의 기원 주장.

⑤ 준왕(準王)의 무덤, 익산의 무강왕릉(세종실록지리지) : 발굴 결과 백제의 무덤 양식 확인.

⑥ 淸州韓氏大同譜 上世編, 1993, 丁卯譜.

-기자계보(箕子系譜)

1세 황제(黃帝), 2세 소호(少昊)…16세 기자(箕子)/기자조선왕(箕子 朝鮮王 箕子姓 子氏 諱胥餘)… 41세 애왕 준(哀王 諱準)/마한세계(馬韓 世系) 1세 무강왕 준(武康王 諱準)…8세 원왕(元王), 9세 계왕(稽王), 원왕(元王)의 세 아들 중 友平이 北原(태원) 鮮于氏, 友諒이 上黨(청주) 韓 氏, 友誠이 德陽(행주) 奇氏로 본관으로 삼았다. 기자 원년으로부터 마한 말까지 1131년이다.(삼국지 위지)

-후한 왕부(王符)의 잠부론(潛夫論) “주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연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 후 한의 서쪽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바다로 옮겨갔다 […立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 바다로 간 자는 바로 준왕(準王)이므로 그의 성은 기(奇) 씨가 아니라 한(韓)씨이며, 중국인이 아니라 한인(韓人)인 것이라고 주장, 해(海)는 산동성 지명이다.

– 7웅국(七雄國) 중, 한(韓)나라(BC 403~230)

위치 : 하남성-호북성 1천리.

– 기자 후예 또는 기자를 따라왔다고 하는 성씨는 다음과 같다.

* 기자의 후예

청주 한(韓)씨, 행주 기(奇)씨, 태원 선우(鮮于)씨, 서(徐)씨.

* 기자와 같이 온 성씨

해주, 태인 경(景)씨, 토산 궁(弓)씨, 봉화 금(琴)씨, 밀양·함평 노(魯)씨.

글 한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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