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남편 품에 안기고 싶다구요

“아니 지금 야구하세요. 무슨 그립을 그렇게 잡아요. 자 다시, 보세요. 손안에 작은 새 한마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죠, 그렇죠를 연발하던 오장환 프로의 뒷주머니에서 풍뎅이 소리가 들린다.
“받아보세요.”
백정희는 오 프로가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어젯밤 남편과의 일이 생각났다. 요즘 들어 남편에게 안기기보다는 남편을 안아주는 느낌이다. 언제부터인가 몸이 나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예전 가녀리고 연약해 보이던 백정희가 아니다. 점점 늘어나는 몸무게며 별의 별 다이어트를 해도 도무지 몸무게는 내려갈 줄 모른다. 점점 사는데 자신이 없어지고 제 몸 하나 제대로 관리 못하는 자신한테 화가 났다. 가끔 혼자된 친구와 만나 포도주 몇 잔 기울이는 것이 그녀가 스트레스를 푸는 유일한 거다. 우울한 나머지 때론 뭐든 부셔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언제 왔는지 오 프로의 미간에 갈매기 두 마리가 금방이라도 날아갈 기세다.
“새를 손안에 살며시 쥐고 있으라니까, 죽일참이예요. 살살 다뤄야지요. 그래 가지고서야 다시, 아니 이렇게 해야.”
‘아, 이래서 나이든 아줌마들은 받지 말아야 한다니까’ 오 프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갑자기 쨍그랑하는 소리가 골프연습장을 울렸다.
백정희 손에 들려있어야 할 채는 내던져 있고 얼굴은 온통 붉그락푸르락이다.
목소리는 다소 부드러웠지만 몸집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력한 파워가 느껴지는 말투다. 그녀는 손을 내저으며
“아, 그만. 내가 공을 잘 쳤으면 뭐 하러 여기에 나왔겠어요. 당신, 뭐하는 사람이야.”
오 프로는 골프연습장에서 일 한지 10년 차다. 그래도 자신이 생각하기엔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었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는데 이번엔 뭔가 잘못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그렇지. 만만히 보여서는 안 될 일이다. 지금 그 옆에 서 있는 백정희 말고도 날씬하고 예쁜 신입회원도 있다. 모두들 모른 척 관심 없는 척 하지만 그들의 귀는 이쪽을 향해 있다.
“물론 공을 못 치시니까 우리 골프장에 나와 배우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 서 있는 사람이 아무리 우습게 보이시더라도 따라하셔야 교육이 되는 것 아닙니까?”
당연한 응수다.
“골프는 프로인지 몰라도 말하는 태도가 영 아니군요. 그만둡시다.”
아뿔싸, 이렇게 상황 종료가 되면 곤란한 사람은 다름 아닌 백정희다. 지난번 동네연습장에서도 프로와 다투는 바람에 거리가 먼 여기까지 다니는데 여기서 또 다퉜다간 남편한테는 쌈쟁이로 낙인찍힐 것이고 골프를 영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남편은 얼마 전부터 부부골프모임이라면서 함께 나가야 한다고 수도 없이 말을 해왔다. 그간 남편은 그녀에게 휘트니스클럽 회원권이며 골프채와 골프서적 골프웨어 등 그녀를 위해 많이도 사들였다. 백정희인들 그걸 왜 모를까, 물론 고마운 일이다. 남편의 선물 공세가 있을 때마다 여자가 생겼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원래 여자는 후각이 많이 발달해 있다. 타고난 후각을 자신하는 백정희는 남편이 바람을 피기 전부터 그 증후를 안다고 자신한다. 비 오기 전 불어오는 바람에 물기가 느껴지는 것처럼 세상을 살다보면 자연스레 아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차라리 몰랐으면 할 때가 많다. 이렇게 예민한 데도 불구하고 왜 그리 몸이 자꾸 커지는지.
그녀는 한 손에 안겨지는 새처럼 가벼운 몸을 갖고 싶다. 남자 품을 그린다. 폐경기 증후군일까?
그럴수록 열 배 스무 배 남편에게 신경을 썼다. 단지 내색만 안 했을 뿐이다. 내색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사람들은 모를 거라 생각했다.
문제는 이번 주말 부부골프에 나오는 상대방 여자가 남편의 대학 후배라는데 아무래도 마음이 걸린다. 애처럼 싫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편 혼자 내보낼 수도 없지 않은가.


백정희는 자존심을 접고 오 프로에게 부탁을 했다.
오 프로는 역시 프로다웠다. 한바탕 말싸움이 있고 난부터 백정희에게 다정다감하게 굴었다. 절대 화도 내지 않았다. 그녀를 화나게 하는 건 다른데 있었다. 다른 레슨 자들은 오 프로가 뒤로 다가가 감싸듯 해주는데 몸이 큰 그녀만은 그게 안 되는지 덩치 좋다는 오 프로도 뻣뻣이 선 채로 보고 동작을 따라하라고 할 뿐이다. 그녀도 여자다. 다른 여자들처럼 몸이 가벼웠으면 특히 가는 허리를 보면 돈으로 살 수 있으면 사고 싶었다. 새처럼 가볍게 살고픈 것이다. 타인으로부터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게끔 나약한 여자이고 싶었다.
이제 그녀의 관심은 골프가 아니라 그녀도 다른 여자들처럼 등 뒤에서 부드럽게 감싸 듯한 레슨을 받을 수 있는가였다.
사실 그녀는 제법 스윙감이 좋다. 파워도 있다. 머리 올리러 가서 110타를 깨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 드라이버샷도 좋고 게다가 큰 몸집만큼이나 장타다. 220야드도 너끈히 넘겼다. 아직은 비기너이지만 파워만큼은 웬만한 남자들 못잖다.
백정희 남편은 그런 아내가 좋았다. 흔히들 날씬한 여자들을 좋아한다지만 사실은 건강한 여자가 제일이다. 모든 것이 건강해야 가능하고 가화만사성의 근본이 건강이 아닌가.
백정희는 자존심을 접어가며 오 프로에게 특별지도를 받으면서 여자로서 살아있기를 바랬다.
이번만큼은 그녀도 남들처럼 연약한 여자이고 싶었다. 그래서 골프장 가기 1주일 전부터 거의 최소한의 소식을 해왔다. 그녀는 하늘거리는 골프웨어를 입고 싶었고 새파란 필드에서 소녀처럼 남편에게 보호도 받고 싶었다.
그린은 전날 내린 비로 제법 물기가 있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반짝이는 물방울이 보석같이 빛났다. 그녀는 그린에 쓰러져 있는 어린 사슴을 연상했다. 11번 홀에서 샷을 하려는데 갑자기 몽롱해졌다. 이쯤이면 안심하고 쓰러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며칠 굶었더니 어지럼증도 일었다. 흔히 샷을 하다가 긴장한 나머지 심장마비도 일으킨다고 하지 않던가. 자기가 쓰러지면 먼저 남편이 달려와 안아 일으켜 줄 것이고 그리고… 그녀는 여자로서의 마지막 자존심이라 생각했다. 그때였다. 아무리 여름날씨라지만 예고 없이 소나기가 퍼붓기 시작했다. 백정희는 갈등했다. 그녀는 계획을 수정해야 마나 고심하고 있었다. 비까지 쏟아 붓는데 남편에게 너무 고생을 시키는 건 아닐까 해서였다. 그러나 기회는 더 이상 없다. 비 때문에 골프도 망치지 않았는가. 생각에 생각이 밟히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때였다. 한발 앞서 걷던 남편이 내리막에서 미끄러져 넘어졌다. 아침에 입힌 하얀 골프웨어가 더렵혀져 있었다. 일어서려던 남편은 허리가 삐끗했다며 도로 주저앉는다. 게다가 천둥번개 때문에 클럽하우스에 요청을 해도 사람들이 오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일단 비를 피해야 하는데 더 이상 여자일 수만 없었다. 백정희는 남편을 등에 업고 소금장수처럼 무거운 걸음으로 간다. 어디서 날아들었는지 하얀 새 한마리가 페어웨이 위에 사선을 긋고 지나간다.

이시언(시인, 작가)
시집 <그리움에는 유효기간이 없다>. <그리움 죽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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