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生) 그리고 내리사랑에 대한 푸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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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묵

미혼자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독신주의, 비혼(非婚)주의를 선언하는 젊은이들이 많은 사회가 되었다. 출생률은 계속해서 하락 곡선을 그리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2022년 출산율은 0.81명으로 한국은 초저출산 국가가 된지 이미 오래되었다. 출산율이 낮은 이유는 자녀출산을 기피하는 맞벌이 부부가 많은 까닭이다. 다시 말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맞벌이를 할 수밖에 없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외벌이로는 평생 집 한 채 사지 못하는 현실이 출산율 하락을 부추기고 있다. 그리고 양육과 교육비용이 부담스러워서, 자신의 자유를 위해서, 아이 돌봄 시설이 부족해서, 집이 없어서 등의 이유를 들기도 했다.

다자녀와 외자녀
자녀가 많았던 시절에는 단칸방에서 여러 형제들이 한 이불을 덮고 같이 잠을 잤었다. 그때는 한 끼조차 마음껏 먹기 어려운 시대였기에 형은 동생들에게 밥을 양보하는 일이 잦았고 동생들도 그 마음을 잊지 않으며 가족애를 키웠었다. 적은 양의 음식이라도 함께 나누어 먹는 양보와 배려의 심성이 그때부터 무의식 속에 싹을 틔운 것이다. 학교와 군대, 취업과 직장으로 이어지는 사회 활동들도 그런 심성들이 밑바탕이 되었기에 한국은 건강하고 튼튼한 사회를 이루며 선진국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혼자 자란 아이들(외자녀)은 부모의 과잉보호로 자기중심적인 독선적인 성격으로 자라기 쉽다. 형제자매가 없어 양보와 나눔을 배울 기회조차 박탈당했다. 바른 인성의 결핍은 결국 사회성 부족으로 표출되고 결국 사회 부적응자로 전락하게 된다.
과잉보호를 하는 부모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질식할 정도로 많은 사랑을 퍼붓는다. 지나칠 정도로 배려하며 세심하게 보호하는 것이 자식사랑이라고 착각한다. 교육적 무지나 교육에 대한 자신감 부족을 원인으로 꼽기도 하지만 외도, 이혼 등의 빗나간 결혼 생활의 죄책감에 대한 보상심리도 작용했다.
이루지 못한 부모의 삶을 자식에게 투영하여 아이를 학습의 도구로 전락시켜 대리만족의 전유물로 삼으려 했다. 자식은 소유물이 아니다. 집착의 대상도 아니다.
어린 시절에는 어린이답게 성장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교육이라고 여겨진다.


양육에 대한 푸념
자녀를 양육함에 있어 그릇된 과잉보호와 지나친 학업성취 압력으로 어린아이 같은 성인이 많아졌다.
한국도 한때 ‘마마보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었다. 마마보이는 어머니에게 강한 애착과 집착을 가지는 남자를 의미하며,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을 어머니가 대신 해주는 경우에 마마보이로 성장할 확률이 높아진다. 또한 아버지가 권위적이거나 무관심하거나, 부재인 경우에도 마마보이가 될 수 있다. 자식은 사춘기가 되면 더 이상 어머니의 말을 따르지 않게 된다. 이때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것이 아버지라는 롤모델이다. 아버지는 자식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도전 정신, 규율, 책임감 등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이혼 가정의 증가로인한 아버지의 부재는 마마보이의 양산을 부추겼다.
이혼율 증가 이유로 사회성이 결여되어 배우자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심성이 부족한 것에서 원인을 찾기도 하는데 마마보이의 양산이 이혼을 부추기고 있는 셈이 되었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마마보이 이전에 한국 교육계에서는 ‘치맛바람’이라는 단어가 크게 유행을 했었던 적이 있다. ‘여인이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설친다’는 뜻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들의 극성 맞은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이 말은 1960년대 이후 197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자녀들이 입시경쟁에 뒤쳐지지 않도록 뒷받침 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나중에는 교권을 무시하고, 과외열풍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어느 촌로의 인생역정(人生歷程)
황혼을 맞이한 어느 촌로(86세)의 삶을 이야기 해본다.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라면 흔하디흔한 삶이라고 폄하할 수 있지만 그녀의 희로애락을 통해 ‘조금만 가져도 행복을 느끼면 행복한 인생이요. 많은 것을 가졌어도 마음자리를 못하면 불행한 삶’을 전해주고 싶어 그녀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그녀는 전라북도 김제의 산골마을에서 2남 5녀의 큰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소작(小作)농이었고 어머니는 길쌈을 하며 생계만 겨우 이어갈 정도로 가난한 집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는 아버지는 막걸리로 식사를 대신하였고 동생을 출산하신 어머니는 먹은 것이 없어 젖이 나오지 않았고, 젖 달라고 우는 동생은 울다 지쳐 잠이 드는 일이 많았었다.
물론 남들이 다니는 학교는 엄두도 내지 못하였다. 동생을 돌보고 남의 집 심부름을 하는 일이 그녀에게는 전부였다. 10살 때 마을 어른의 도움으로 보통 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초등 4학년 때 6.25 사변을 맞이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는 행방불명이 되었고, 어머니 혼자 생계를 감당하기 무척 어려웠다. 결국 그녀는 대전 어느 집 식모살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추운 겨울철에도 찬물로 빨래를 하여 손발이 동상(凍傷)에 걸릴 정도로 고되었지만 밥만큼은 배부르게 먹을 수 있어 행복했다고 말한다. 조금씩 월급도 받게 되자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에게 미안함이 들었고 석 달분의 월급을 모아 고향을 찾았다.
여동생 두 명은 먼 친척 소개로 고무신 공장에 취직하여 이미 고향을 떠난 상태였고 어머니는 그간의 노고 때문인지 많이 늙어 있었다. 자신이 동생들 학비는 반드시 책임지겠다는 다짐을 한 그녀는 식모살이를 하면서 버는 돈은 학비로 보태기 위해 적금까지 들었다.
어느 날 부산을 내려간 동생에게서 반가운 편지가 왔다. 낮에는 공장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야간 학교를 다닌다며 부산으로 내려오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6개월 뒤 부산으로 내려간 그녀는 학비를 위해 모은 적금과 알뜰하게 생활했던 동생들의 돈을 모아 조금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여동생들은 야간 고등학교를 들어갔고, 그녀도 야간 중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시골에 남아 있던 남동생들도 모두 장학생으로 공부를 한다는 소식을 듣자 그동안의 고생이 씻은 듯이 사라지며 무척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한했다.
대학까지 졸업한 첫째 동생은 은행원이 되었고 둘째 동생은 대기업 정규 사원이 되었다.
시골에 있던 남동생은 서울로 유학을 보냈고 여섯째는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청에 입사하였다. 막내 여동생은 어머님 곁에 남았다.
잘 된 동생들의 행복이 마치 자기 것 인양 그녀도 무척 행복했다. 그리고 4명의 동생들을 먼저 결혼시킨 후 그녀는 다섯 번째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었다. 여섯 째 일곱 째 동생들도 모두 좋은 인연을 찾았고 7형제 모두 안정되고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였다.

자식이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러나 시골에 계신 어머님은 홀로 남겨졌다. 어머니는 한사코 “나는 딸도 며느리도 함께 사는 것이 싫다”며 거부하셨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 새끼들 잘 되는 게 나의 행복이다”라고 하시며 새벽에 뒷산에서 길러온 정안수를 장독대 위에 올려놓고 기도를 하셨다.
어머니가 89세의 고비로 운명하셨으니 90세가 다 된 현재의 그녀는 어머니가 무척 그립다며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마쳤다.
독일 속담에 ‘한 부모는 열 자식을 거느려도 열 자식은 한 부모를 못 모신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 속담에도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결국 자식을 모두 바르게 키우신 그녀의 어머니도 늙어서 자식에게 대접을 받지 못하고 삶을 마감하셨다. 부모들이 자식에게 ‘나는 아픈 데 없다’라는 거짓말을 제일 많이 한다고 한다. 혹시 부모들의 거짓말을 알면서 묵인하는 것이 아닐까?

樹欲靜而風不 子欲養而親不待(수욕정이풍부지 자욕양이친부대)


“나무는 조용히 있고자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공양하고자 하나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는 옛 가르침을 다시 되새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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