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오의 핵심은 인연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은 계절에 따라 좋은 날을 택해 여러 가지 행사를 행해왔다. 이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명절로 정해졌다. 명절은 대부분 농경사회에 맞게 정해졌으며 계절적인 요소와 민속적인 요소가 포함된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축제일이다. 예전 명절은 거의 다달이 있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정월의 설과 대보름, 단오, 팔월의 추석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명절이 그 의미를 잃었다. 하지만 강릉단오제를 비롯해 국내 여러 곳에서도 그 명목을 이어오고 있다.

봄철의 힘과 생장의 시작

우리 고전 ‘춘향전’의 두 주인공인 이몽룡과 춘향이의 만남도 바로 이날, 춘향이가 그네를 뛰는 것으로 시작됐다.

‘난초 같은 고운 머리 두 귀를 눌러 곱게 땋아 봉황 새긴 금머리꽂이 가지런히 꽂고, 허리에는 가는 버들이 힘없이 드리운 듯 얇은 비단 치마를 입고 춘향이가 그네를 뛰었다. 외씨 같은 두 발길로 흰 구름 사이에 노닐어 붉은 치마 자락이 펄펄 하얀 명주 속바지 가랑이가 동남풍에 펄렁펄렁, 박 속같이 하얀 살결이 흰 구름사이에 희뜩희뜩. 광한루에서 이 모습을 본 이도령 정신이 어질하며 넋이 빠지고 온몸이 나른해져 춘향이를 부른다. 달 같은 자태와 꽃 같은 얼굴은 맑은 강에서 노는 학이 달빛에 비친 듯하고, 반쯤 연 붉은 입술 사이로 드러난 하얀 이는 별도 같고 옥도 같다. 춘향이도 넌지시 이도령을 살펴보니 현세의 호걸이요, 속세의 뛰어난 남자라…’

“천생연분으로 우리 둘이 만났으니 영원토록 즐겨보자” 이도령이 제안에 한창 피 끓는 이팔청춘의 남녀가 상열지사를 시작하는 날이다. 이날의 핵심어는 만남이다. 남녀칠세부동석이란 유교이념이 사회를 장악하고 있을 때 이날만은 모든 규범이 풀리는 날이다.

여기서 처녀는 갖은 치장을 하고 뽐내면서 그네를 뛰고 솟곳이 드러나기도 하고 힐끗힐끗 주변을 두루 살피는 행위가 된다. 그리고 힘을 상징하는 총각들은 저고리를 냅다 벗어 던지고 우람한 상체를 드러내고 씨름을 하면서 힘을 자랑하는 것이다. 무르익는 봄기운이 뻗쳐오르는 둣한 느낌과 더불어 처음 사랑을 시작하려는 젊은 남녀의 생생한 모습이 눈에 잡힐 듯하다. 한창 물오르는 봄날을 지나서 피가 들끓는 초여름날 그것도 양기가 가장 성한 5월 5일 만남을 상정하는 것이다. 이때라서 힐끗거리며 지나다니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과연 춘향의 봄 기운과 몽룡의 몽롱한 꿈이 어우러지는 순간이다.

올해는 6월 3일은 음력 5월 5일 단오날이다. 우리 고유의 말로 ‘수릿날’로 수리취를 넣어 둥글게 절편을 만들어 먹고 그네뛰기, 씨름, 탈춤 등을 즐겼다. 또 여인들은 창포(菖蒲) 삶은 물로 머리를 감고, 창포 뿌리를 깎아 붉게 물들여 비녀를 만들어 꽂기도 했다. 비녀에는 수복(壽福)의 두 글자를 새기기도 하고 연지로 붉게 칠하기도 한다. 붉은 색은 양색(陽色)으로 귀신을 쫓는 기능을 가진데서 생긴 풍속이다.

놀이와 풍속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는 뭐니 뭐니 해도 그네와 씨름이다.

그네뛰기는 동아줄이나 밧줄을 큰 나뭇가지에 매고 그네를 뛰는 것이다. 단오날에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고운 옷을 입고 그네를 뛰었다. 외출이 어려웠던 부녀자들이 단오날만큼은 밖에 나와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됐으므로, 여자들이 단오날을 즐겼다고 한다. 그네뛰기는 남쪽보다 북쪽 지방으로 갈수록 성했다. 그네뛰기는 원래 북방의 우리 민족들이 한식 때 몸놀림을 날쌔게 만들려고 하던 운동이다. 그네뛰기는 이미 고려 현종 때 민간에 널리 퍼졌다. 고려 무신정권시대 최충현은 단오날 동궁에 그네를 매고 문무 4품 이상의 높은 벼슬아치들을 모아 사흘 동안이나 그네뛰기 경기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성들을 위한 가장 큰 놀이가 그네였다.

그네는 마을의 큰 나무에 실한 가지에 그네를 매고 나무의 가지는 물론 줄기나 뿌리까지도 흔들릴 정도의 휘청거렸다. 그것도 나무가 크고 그늘이 깊은 곳 사람들이 자주 모이고 아이들이 나무를 타기 때문에 줄기나 가지가 반질반질할 정도였다. 이미 튼튼함이 공증된 나뭇가지에 실한 밧줄을 끌어 올려 그네를 매는 것이다. 주로 마을의 정신적인 핵심부가 되는 곳이다. 그네는 주로 여성들이 사용하는 것이다. 평소에 안 입던 옷을 입고 치맛자락을 펄럭이며 한껏 자태를 뽐내며 수줍듯 한 여인네도 그네에 올라타면 몸 매무새를 드러내며 온몸의 근육을 다 사용해서 그네 판을 굴리며 창공을 올라가고 내려서는 모습이 마치 한 마리 나비 같은 것이다. 어찌 보면 상당히 에로틱한 여인네의 몸태가 드러나는 여성적인 놀이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이에 질세라 마을의 마당 주위 주로 그네와 가까운 곳에 씨름판이 마련되는 것이다. 씨름은 남성적인 코드다. 윗옷을 벗어 던지고 우락부락한 근육질과 육신을 드러내며 힘자랑을 하며 뻐기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네 타는 여인네를 휠끗휠끗 건너다보며 자신의 힘자랑을 해되는 풍경이 눈에 선하다. 그러다가 기량이 뛰어난 자가 힘을 꺾고 우승하는 경우도 많은 변수가 탄생하기도 한다. 또 그네는 어떤가. 평소에 나가고자하는 동구 밖의 세상에 대한 염원인가. 아니면 담벼락 너머의 흠모하는 사내의 모습을 이런 기회를 빌려 너머다 보고 싶다는 마음의 작용이 한껏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 씨름판의 강인한 남성을 훔쳐보거나 휠끔휠끔 건너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평소에는 동네사람 눈치 때문에 엄두도 못 내던 것을 이런 마을의 공식적인 놀이를 통해 서로를 확인하는 것이다. 예부터 단오는 마을의 축제였다 어른들은 모내기로 바쁜 일손을 잠시 접고 새끼를 꼬아 만든 그네 줄을 공동 우물터 옆 덩치 큰 밤나무에 높이 매달았다. 단오날 아침 이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네 터로 모였다. 아낙네들은 창포 삶은 물에 머리를 감은 뒤 천궁 잎을 머리에 꽂았다. 끼니조차 제대로 채우지 못했던 시절, 아이들은 손바닥에 척척 달라붙는 수리치떡을 먹으며 신바람을 냈다 그네대회는 단오명절의 가장 큰 행사다. 창공을 힘차게 차고 나가 누가 아득한 나뭇가지 끝에 발끝이 많이 닿느냐로 순위를 가렸다. 둘이서 쌍그네로 겨루기도 했다. 비록 옥색 치마에 금박물린 댕기는 아니더라도 치맛자락과 저고리 고름을 바람에 나부끼며 그네 타는 처녀를 바라보는 총각들의 마음은 싱숭생숭 들뜨고 가슴은 콩당쿵당 뛰었을 것이다.

단오는 누구보다 처녀총각에게는 가슴 설레는 날 이었다. 조선시대 유교교육으로 인한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의 내외(內外)의 예(禮)가 이날만큼은 완화됐다. 완전히 자유스럽지는 않아도 얼굴을 흘낏 쳐다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아침이면 새 옷으로 갈아입은 여자들이 그네를 뛰기 위해 나들이를 나오며, 남자들은 힘자랑을 겨루는 씨름장으로 나오는 길에 오가면서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속담을 실행에 옮기고자 노력했다. 저녁이면 모닥불을 켜놓고 벌어지는 탈춤이 축제의 흥분으로 몰아넣었다.

이때 즐기는 대표적인 민속놀이는 그네뛰기와 씨름이었다. 이것은 무더위를 땀으로 식히는 이열치열(以熱治熱)의 놀이이기도 하다.

단오날 그네뛰기야 말로 옛날 부녀자들이 일 년 내내 억눌렸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 볼 수 있는 유일한 놀이였다. 그래서 󰡐춘향전󰡑의 광한루에서 이몽룡이 그네 뛰던 성춘향을 만났듯이, 우리의 고대소설이나 민담에도 그네를 뛰다가 사랑을 맺게 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녹음이 짙은 5월의 거목아래서 울긋불긋 곱게 차려입은 소녀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이 아름답다.

씨름은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할 만큼 대단히 오래된 놀이다. 단오날이면 남자들을 씨름을 하면서 무더위를 식혔다.

씨름은 오랜 상고시대부터 전해 내려 왔으며, 중국에서도 씨름을 고려기라고 부른 것으로 보아 한민족의 독특한 운동이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시작되므로 부채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단오날이 되면 왕이 직접 재상이나 시종들에게 공영(工營)에서 헌납 받은 부채를 하사했는데 이를 󰡐단오선(端午扇)󰡑이라 했다.

단오날 대추나무를 시집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정월 대보름의 과일나무 시집보내기와 같다. 대추나무의 두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놓으며 열매가 많이 열리기를 빈다. 이는 모의 성행위로서 풍요를 위한 상징적인 방법이었다.

또한 집단적인 민속행사로는 마을의 수호신에게 제사지내는 단오제(端午祭)와 단오굿이 있다.

지금까지 전승되면서 지역의 축제로 자리 잡은 󰡐강릉단오굿󰡑은 대관령 국사성황을 강릉 시내 여성황당에 모시는 행사다. 또한 문호장(文戶長)이라는 신령한 인물에게 올리는 경상남도 영산의 󰡐문호장굿󰡑이 있다. 서울에선 서울시와 영등포구가 후원하고 영등포문화원에서 주최하는 ‘제19회 영등포단오축제’를 영등포공원에서 개최하고 있다. 그간 코로나 때문에 약소하게 치러진 것이 올해는 대대적으로 치러졌다.

이처럼 단오의 여러 행사는 벽사 및 더위를 막는 신앙적인 관습이 많았고, 더운 여름에 신체를 단련하는 민속놀이로 마을의 공동체의식을 이루는 축제의 한마당이었다.

단오의 유래와 의미

단오는 고유의 우리말은 태양을 상징하는 ‘수리’에서 온 ‘수릿날’이다. ‘단오 수릿날’ 이라고 하는데 ‘수리’는 ‘신’과 ‘높다’는 뜻이 있어서 ‘높은 신이 오시는 날’의 뜻으로 해석된다.

이날은 초나라 시인 굴원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전 5천 년 전인 우리의 배달국 시대(한웅)인 제14대 한웅인 ‘치우(蚩尤)한웅’과 관계가 있는 날이다. 즉 단오절은 치우한웅의 탄신일이다. 그래서 이날 치우부적을 대궐에 붙이는 풍습이 있었다. 이날을 다른 말로 ‘천중절(天中節)’이라고도 한다.

5월 5일 천중절에 ‘치우의 이름과 형상을 부적으로 만들어서 집집마다 붙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위로는 천록(天祿)을 얻고,

아래로는 지복(地福)을 얻는다.

치우(蚩尤)의 신(神)은

구리머리, 쇠 이마,

붉은 입, 붉은 혀로

404가지 병(病) 일시에 소멸한다.

빨리빨리 율령(律令)대로 시행할지어다.

(五月五日 天中之節 上得天祿 下得之福 蚩尤之神 銅頭鐵額 赤口赤舌 四百四病 一時消滅 急急如律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이것을 ‘천중부(天中符)’라 불렀다. 일명 치우부적(蚩尤符籍)으로 ‘동두철액(銅頭鐵額)’ 구리투구와 철갑옷을 입은 치우의 형상을 그대로 묘사한 표현이다.

이 부적은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측후·물시계 등의 일을 맡아보던 정부관청인 관상감(觀象監)에서 제작해 5월 5일 단오(天中節)때 나쁜 귀신을 쫓는다 하여 붉은 부적(符籍)을 만들어 궁중으로 올렸다. 이는 천중부적(天中符籍)이라고도 한다. 부적은 붉은 글씨로 벽야문을 써서 문 위에 붙이는데 대궐안의 문설주에 붙여 액운(厄運)을 막는 방도로 사용했다고 한다.

왜 이날 궁중에서 치우부적을 붙였을까? 그것은 단오절이 치우천왕의 탄신일이기 때문이다. 고구려 이전에도 단오라는 명절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음력 5월 5일은 고주몽의 탄신을 기리는 축제이기도 했지만, 그 이전 배달국 14대 한웅인 구리의 치우천왕 탄신을 기리는 명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오절에 행하는 씨름 등의 여러 행사 내용들이 치우와 연관되어 있는 행사라는 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으며, 치우를 상징하는 ‘적령부’라는 부적의 사용 및 단오일을 태양을 상징하는 ‘수릿날’이라 불렀다는 사실 등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머리 양쪽에 뿔이 있으며 키가 크고 씨름을 좋아한다는 이야기는 치우군(蚩尤軍)의 전형적인 상징인 ‘동두철액’과 육박전 훈련에서 발전한 두촉전(頭觸戰)-치우희(蚩尤戱)를 말하는 은유적인 표현이다.

중국에서는 단오절의 기원과 의미가 왜곡되어 초나라의 충신 굴원을 기리는 날로 알려졌으며 조선시대의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도 이 설을 그대로 수용하여 기록되어 있다.

고대 우리의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과 연결시켜 볼 때 음력 5월 5일은 고구려를 건국한 고주몽의 탄생일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고주몽 이전부터 단오절은 존재했기 때문에 그 기원은 이 보다 앞서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날이 고대 배달국의 치우천왕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은 단오절에 행하는 씨름 등의 여러 행사 내용들이 치우와 연관되어 있는 행사라는 것이다.

당시 다산이 중요했던 시대라 건강하고 좋은 체질의 씨앗을 받기 위해 여자들은 목욕재계를 하고 기다리는 것이다. 건장한 사내들이 힘과 재주를 경쟁하는 것을 ‘씨름’이라 했는데 이는 좋은 씨를 내리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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