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질빈빈(文質彬彬)의 삶 그것이 한국인의 정서였다

문무겸전 사상의 뿌리는 어디서부터였나?
내용과 바탕이 모두 조화된 상태를 공자는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 표현하여 그 뜻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한 세계관과 정서는 한편으로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정신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의 역사에서 문무겸전의 기원은 어디서부터 언급이 가능할까?
<태백진훈>에는 신지가 언급됐는데, 신지는 사슴 발자국을 보고서 곧 그 글자를 만들었다”고 했고, 더불어 “후대에 은혜를 남겼고 많은 복을 끼쳤고 그의 문화적 공덕을 기념하여 사황(史皇)으로 불러 상숭상했다고 밝힌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부분은 바로 ‘사황(史皇)이라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사황은 중국의 옛 학자들로부터 창힐(蒼頡, 倉頡)이라는 상고시기 설화적 인물을 두고 숭상하여 부르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태백진훈)의 내용으로 인해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우리의 상고시대에 신비한 인물로 전해지는 신지가 어째서 사황이라고 표현되었는가? 혹시 이암이 지나친 애국심을 느껴 신지를 또 다른 사황이라고 억지로 부추긴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행촌 이암이 아무 근거도 없이 한국 역사상 상고시기 신비의 학자였던 신지를 근거도 없이 창힐과 똑같은 칭호인 사황이라고 꾸민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고 여겨진다. 결국 이 문제는 또 다른 자료가 확인되기 전까지는 유보할 수밖에 없으나, 신지가 사슴 발자국을 통해 글자를 만든 점과 창힐이 새 발자국을 통해 글자를 만들었다는 설화를 견주어 볼 때 똑같이 글자를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기에 혹여 이명동인은 아닐지 조심스러운 추정을 해 볼 수도 있다. 더욱이 오늘날 한반도에 신지의 유묵으로 전하는 탁본과 중국 내 순화각첩 등에 전하는 탁본의 글자가 거의 똑같은 점은 창힐과 신지가 같은 인물일 가능성을 크게 높이고 있어 큰 흥미를 일으킨다. 어떻든 창힐의 글씨로 알려져 전해지는 창성조적서비는 탁본으로 중국 내에서 유통된 지 오래되었다. <순화각첩>의 권5에 고전자 28자로(二十八字)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음은 매우 주목되는 점이다. 그리고 이 탁본 비문을 두고 현대 중국학자인 왕정붕은 ‘成己甲乙居首, 共友所止 列世式 氣 光名左互。又家受赤水尊 戈 矛 斧 芾’로 각기 그 문자를 옮겨 풀었다. 곧 석문(釋門)을 한 것이었다. 그 석문을 고스란히 인정한다면 그 풀이는 “나를 무성하게 하기를 갑이 을이요 하듯이 머리를 둘 것이고, 벗과 함께하고 그칠 바이며, 세상의 법칙이면서 기운이 되어 나란하며, 두루두루 쥐어서 이름을 빛내고, 또 집안에 혈족을 존귀하게 받들며 과창과 모창과 도끼를 우거지게 하라.” 정도가 될 듯 싶다. 좀 더 쉽게 풀이를 시도하자면 ‘나를 충실하게 하기를 잡은 갑대로 을은 을대로 질서가 있게 갖추듯이 머리를 둘 것이고, 벗과 함께 하면서, 그칠 때에는 함께 그치듯이 신의를 지키며, 세상에 모범이 될 듯이 하고, 두루두루 통섭하여 이름을 더럽히지 말고 빛내며 집안 친인척을 보살피며 여러 무기와 도구를 두루 충실히 하여 불시의 반고에 대비하라”는 뜻으로 풀이가 된다. 결국 일종의 당부이면서 이 세상을 잘 살아가도록 이끄는 처세훈을 가르치는 내용처럼 이해된다.
우리는 한역 문장의 풀이를 통해 창힐의 시기에 과창과 모창, 그리고 도끼라는 도구가 소중한 생활 도구로 사용됐음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창힐의 조적서비(鳥跡書碑) 마지막 행에 그 같은 도구가 나열되어 우거지도록 하라는 말까지 드러나고 있을까?
단언하긴 어렵지만 창힐이 만약 설화적 한계를 벗어나 완벽한 역사적 고증에 의해 실존 인물로 확인되면 그로부터 약 4700여 년 전의 인물이 된다. 그러한 전제로 본다면 창힐의 생존시기에는 인문적 지성보다 강인한 무력적 기반이 여전히 삶의 실제적 기반으로 작동되던 시기라고 이해된다. 따라서 이른바 조적서비 마지막 행에 과창(x), 모창(주), 도끼() 등의 날붙이 도구(무기)가 거론된 의미를 넉넉히 추정할 만하다. 곧 삶의 자위적 수단이요. 실용 도구인 날붙이를 집안 가득히 갖추고 있어 만반의 준비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는 지침적 언명으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다. 더불어 창힐 등의 서기전 4700여 년 전의 사회에 그 같은 날붙이 도구의 생산이나 가공 기술의 보편화가 이루어졌을 것이고, 구체적으로 소재에 따른 기술적 층차(層差)도 존재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를 테면 만일 창힐 당시에 석재가 아닌 청동기 따위의 금속류 소재가 존재했다면 청동제의 날붙이 제작 기술을 갖춘 개인이나 세력은 그렇지 못한 개인이나 세력보다 정치 군사적 위계가 상대적으로 강했고 그에 따른 권력화를 쉽게 이루었을 터이다. 창힐의 조적서(鳥跡書)를 통해 서기전 4700여 년 전에 기술력에 의한 권력 구도의 형성 양상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창힐과 똑같이 문자를 만들어 환웅과 단군왕검이 다스리던 동방의 상고사회에서 여러 사람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 역시 사황으로 숭상되었던 신지를 되뇔 필요가 있다. 신지가 남긴 탁본글자와 창힐 탁본의 글자가 거의 같은 점을 통해, 창힐의 조적서에 담긴 문무겸전적 정서는 바로 동방 상고사회인들이 지닌 세계관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영해(한국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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