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호장’ 백성들이 만든 영웅

무술과 도술에 능한 신인

경남 창녕군 영산면에 가면 신인(神人)이라고 불리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바로 문호장이라는 사람의 이야기다. 이름은 알려지지 않고 직책만 알려진 사람이나 영산 구씨가의 외손이라 고 한다. 아전의 신분으로 호장(戶長)이란 직위에 오랫동안 있었다고 하여 ‘문 호장’이라 불렸다. 390여 년 전 실존한 인물이라 하나 자료는 찾을 길 없고 여러 이야기는 복합된 행장으로 현현한다. 그가 초인적인 신통력을 갖고 마을 못가에 살았으며 호방(戶房)에 오래 있었다고 전한다. 무인이 아니면서도 말을 잘 타며 활과 검술에 능하며, 도술 및 축지법도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인에 그의 소실이 있었는데 호랑이를 타고서 다녀오곤 했다고 한다. 가까이 죽사리(죽전)에도 소실이 있었는데 아들이 없어 생남하기를 원했으나 그의 신통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던지 후사가 없어 늘 걱정했다. 매년 단옷날에는 그를 기리는 제사와 훗날 굿이 가미돼 행해져 오고 있다. 문 호장은 당시 관에 억눌린 평민의 원망을 나타낸 영웅, 신인으로 탄생된 인물이란 생각이 든다.

감찰사의 말발굽이 땅에 붙어버렸다

현에서 호장을 맡고 있던 문 씨라는 그는 만년에 영산읍 인산껄에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여름날 감찰사가 여러 곳을 두루 돌아 돌아다니면서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달래는 순무 중에 영산현의 사정을 살피기 위해서 이곳에 이르렀다. 이 거창한 행차 행렬이 인산껄을 지나가게 됐다. 때마침 모내기철이라 물을 잡아 모내기에 바빴으므로 길가에는 점심밥 광주리와 반찬 그릇들이 놓여 있었다. 그때 지나가던 감찰사의 말이 농부들의 점심밥을 밟아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순간 말굽이 땅에 딱 붙어 버렸다.(일설에는 말이 다리를 건너가다 다리 중간에 이르러 말이 무릎을 꿇었다고 한다) 감찰사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움직이려 했으나 말발굽은 점점 굳게 달라붙어 꼼짝도 않았다.

하는 수 없이 감찰사는 말에서 내려 영접 차 마중 나온 현감에게 이 괴이한 이변의 연유를 캐어물었다.

결국 이 근방에 문호장이란 사람이 살고 있어 말을 타고 지나갈 때는 간혹 이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감찰사는 노하여 문 호장을 잡아들이라고 명령했다.

그때 문 호장은 산기슭 나무그늘 밑에서 짚신을 삼고 있었는데 거창한 행렬이 농군들의 점심밥 광주리를 짓밟고 지나는 것을 보자 분노를 금할 수 없었다.

회초리로 땅바닥을 세 번 치면서, “저 발자국!” 하고 단 한마디 외치는 소리에 그만 지나가던 말의 발굽이 땅에 들어붙어 버렸다.

나졸들은 짚신을 삼고 있던 문 호장을 찾아서 포박, 감찰사의 앞에 대령시켰다.

감찰사의 문죄와 하명에 따라 모질게 다스렸지만 문 호장은 안색도 달리하지 않고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쌀농사는 지어서 나라님 섬기고 부처님 봉양하고, 산 부모 봉양하며, 만백성이 양식하는 것이 온데 그 농군들의 점심밥을 짓밟아서야 될 일입니까?”

문호장의 이치에 맞는 말을 하자 감찰사도 주춤했다.

그러나 체통 때문에 문초를 늦추지 않았으며 곤장을 매우 치라고 하명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곤장을 치면 볼기에 닿기도 전에 곤장이 부러져 버렸다. 부젓가락으로 지져라 했다. 시뻘겋게 단 부젓가락도 어이없게 얼음덩이가 되어 떨어질 뿐이었다.

감찰사는 너무나 놀랐다.

삼나무 지릅대로 겨드랑이 밑의 날개를 쳐라

주위에서 여러 말을 했다.

문 호장은 도술을 부리는데 패문루를 뛰어 넘는 재주를 가졌고, 호랑이를 타고 하룻밤에 수백 리를 간다고도 했다. “창 칼 그 무엇으로도 문 호장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하고 현감이 방면을 주장했으나 감찰사는 멀리 자인(경북 경산군)으로 압송해서 그곳 옥에 가두라 했다. 그런데 더욱 이상한 일이 생겼다. 문 호장을 자인에 압송하고 돌아오는 나졸보다 하루 앞서 영산고을 관아에 문호장이 나타난 것이 아닌가? 놀란 감찰사는 자인으로 압송할 때 보낸 나졸들의 사실을 확인하려 자인에 보냈더니 자인 옥중에는 엄연히 문호장이 갇혀 있더라고 했다. 감찰사는 어느 것이 진짜 문호장인지 또 문호장이 몇 명이나 되는지조차 분간이 되지 않아 두 손을 들어 버렸다. 그 초인적인 기질에 감복한 감찰사는 “그대는 어떠한 사람인가?” 하고 문죄를 포기했다. 그리고는 그의 생명의 신비와 죽음의 비밀을 들었다.

이때 문 호장은 자신의 천명이 다한 것을 깨달았고 감찰사를 만난 지금 자신의 소원을 성취할 기회라고 안 그는 신중한 태도로 말했다.

“소인에게는 소생이 없으니 소인이 죽은 뒤에 해마다 오월 단옷날에 관가에서 소인의 제사를 차려 줄 것을 소원합니다.” 쉬운 일이라 생각하여 감찰사는 문호장의 제의를 응낙했다.

“고을 원에게 말하여 그렇게 하도록 하리라.”

문 호장은 그제야 여한이 없다는 듯 “저를 죽이려면 지릅대 한 개비면 족할 것입니다.” 하고 자신의 양쪽 겨드랑 밑에 있는 자그마한 날개를 보여주었다.

“지릅대로 여기를 살그미 치라” 감찰사는 의심 가득해 믿지 못하고 시험 삼아 사령에게 그러하라 했다. 삼대인 지릅대를 구해온 사령은 가르쳐준 대로 지릅대로 그 자리를 살짝 쳤는데도 문 호장은 자는 듯이 숨을 거두어버리고 말았다.

“허어 위인을 죽였구나!” 뒤늦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 감찰사는 유언에 따라 해마다 단옷날에 공양을 바치는 제사를 지내주라고 명했다. 그 다음 해 부터 감찰사의 명을 받들어 영축산 정상에서 문호장의 영혼을 위한 공양이 베풀어졌고, 그 후 390여년 계속되고 있다.

(이것을 단오굿 또는 문장굿이라고 한다)

재죽거리

‘재죽’이란 말은 ‘자국’의 사투리로 문호장이 탔던 말 자국이라 전하는 자국이 영축산 말재죽거리에 있다. 이곳에 널따란 산골 반석위에 말자국과 칼을 휘둘러 친 자국 등이 명백히 새겨져 있다. 또 넘어진 말의 몸 흔적까지도 똑똑히 남아있어 이곳을 말재죽거리하고 부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재죽거리는 죽사리에 있다. 이것도 문호장의 발자국이라 전하는데 보통사람의 발자국보다는 두 배 반 정도의 크기이다. 바위 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발자국은 전설대로 거인의 발자국 같기도 하고 이 지방에서 발견되는 공룡 발자국 같기도 하다.

글 | 정우제(편집국장)

단오절 ‘영산 호장굿’ 재현

경남 창녕 영산 문호장 사당에서는 매년 단오절을 맞아 ‘영산호장굿’이 재현된다.

영남지역의 유일한 강신굿으로 창녕지역의 전설적 인물이자 평민들의 영웅이었던 문호장(文戶長)을 기리는 ‘영산 호장굿’이 단오절과 3,1문화재 때에도 재현됐다.

영산의 호장굿은 서민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해온 강신제로서 마을의 평안과 수호, 풍농을 위해 마을공동으로 거행하며 희극적 요소를 지닌 우리민족의 전통 굿 놀이라 할 수 있다.

이 굿은 조선말기 일제의 탄압과 서구문화의 도입으로 굿의 전반적인 형태가 점점 쇠퇴․소멸됐지만 그나마 매년 단오절이면 호장굿 이수자 및 호장계원들의 정성으로 30여년부터 굿의 형식만 그 맥을 이어 오다 지난 1999년부터 본격 재현됐다.

영산호장굿은 단오 하루전날 문호장 제사를 지내고 단오절에 영산면 교리 문호장사당에서 영산단오보존회 주관으로 재현돼 왔다

과거엔 국악과 민속무용 공연으로 행사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 단오절 오전부터 팔도당산 선왕마당굿을 시작으로 부정굿, 문호장 제사굿, 문호장 위령굿, 천왕 호장굿, 십왕풀이굿, 해원천도굿, 마당굿, 회향시석굿 등 아홉 마당의 굿판이 펼쳐지고, 굿판이 끝난 후 깃발을 든 무녀들과 주민들은 다함께 어우러져 신명나는 한바탕 뒤풀이 놀이가 벌어졌다.

한편 전설 속의 문 호장은 390여 년 전 영산에 실존한 인물로 전해지고 있으나 기록은 찾을 수 없고 다만 아전의 신분으로 호장(戶長)이란 직위에 오랫동안 있었다고 하여 ‘문 호장’이라 불렸다. 당시 관에 억눌린 평민의 원망을 대변한 영웅․신격화된 인물이라 전해진다.

또한 당시 감찰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면서 단옷날이면 혼령을 위로하는 단오 굿을 치러 준다는 약속에 따라 매년 제사를 지내게 됐으며 원래 제사만 지내던 것이 언제부터인지 정확하지는 않으나 샤머니즘 굿과 연결해 ‘영산호장굿’이 전래돼 왔다.

한 관계자는 “호장굿의 복원으로 지금의 세대에게 정신적 협동신앙을 심어주려고 하며 그 신앙예술을 통해 의식의 필요성을 재인식시키고 우리고유의 전통문화로서 그 뿌리를 마련하는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문호장사당(文戶長祠堂)

문호장 사당‧목상‧영정(文戶長 祠堂·木像·影幀)이 보존돼 있다. 창녕군 영산면 교리 10번지에 위치해 있다. 영산의 성주 수호신으로써 오랜 세월동안 추앙받아오고 있는 문호장의 사당은 본래 영축산성 성황당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1930년에 불에 소실됐다가 1933년에 영축산 밑에 사당을 중건했다. 현재의 건물은 1995년 창녕군의 지원으로 재중건한 것이다. 당시 관에 억눌린 평민의 원성을 나타낸 영웅을 신인화(神人化)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사당은 약 16세기경 문무를 겸비하고 영산에 거주하였던 문 호장에 얽힌 전설이 있는 곳으로 일종의 산령각(山靈閣) 형태를 갖고 있다. 정면 3칸의 맞배집 건물로 내부에는 범을 타고 있는 문호장과 함께 문호장의 정실, 소실, 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매년 단오날에 제향(祭享)한다. 목상(木像)은 사당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데, 높이는 70㎝, 너비는 20㎝이다. 영정은 영산면 교리 18번지에 있다. 성내리 마을의 약간 외곽으로 영명사가 있는데, 그 절의 아래에 전각을 짓고 문호장의 영정을 봉안했다. 영정 앞에는 약 50㎝ 정도인 ‘戶長公文先生 神位’라는 위패가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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