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노는 졸본부여 사람 연타발의 딸로 태어나 아버지가 품은 국가 경영의 큰 뜻을 이룰 만큼 강한 의지와 실천력을 겸비한 영웅적 여성이었다.
그녀는 북부여 왕 해부루의 서손 우태와 혼인하여, 비류와 온조의 두 아들을 두었으나 남편과 일찍 사별하였다. 소서노는 추모대왕이 남쪽의 졸본으로 도망해 온 뒤 그와 뜻이 맞아 혼인하여 새로운 나라의 건국을 위하여 매진할 때 물심양면으로 큰 힘이 되었다.
막상 나라를 세우려니 우선 나라를 세울 터전을 마련하고 나라를 운영할 인재를 모으는 일, 병기를 갖추고 군사를 훈련하는 일과 땅을 일구어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는 일, 그리고 궁궐을 짓고 도읍을 가꾸어 국가의 모습을 갖추는 일에까지 숱한 어려움이 닥쳤다. 소서노 왕후는 20년 동안 고비 고비마다 아버지의 재력을 바탕으로 경제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추모대왕이 전쟁 등 국외 문제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에서 국내 문제에는 왕후로서 상당한 역할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가장 강력한 나라로 등장하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추모대왕은 왕후의 큰 내조를 고마워하여 그녀를 사랑하고 특별히 후대하며, 비류·온조 형제를 자기 아들처럼 여겼다. 그러나 대왕 19년에 첫 부인 예씨와 아들 유리가 부여로부터 도망해 오므로 고구려 추모대왕은 유리를 태자로 삼았다. 이어 추모대왕이 불행하게도 몇 달 만에 돌아가시므로 왕자 수업도 제대로 받지 못했던 유리가 즉위하였다.
이 때 비류가 동생 온조에게 말했다.
”처음 대왕께서 부여에서 난을 피해 도망하여 여기에 이르자 우리 어머니는 재산을 기울여 나라의 기업을 조성하기에 힘썼는데, 추모대왕께서 돌아가시자 나라는 유리에게 돌아갔으니, 우리는 여기 헛되이 있으며 혹이 되느니보다 어머니를 모시고 남쪽으로 가 좋은 땅을 찾아 따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
이리하여 비류 형제는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오이 · 마리 등 10명의 신하와 남쪽으로 떠나니 많은 백성들이 따라 나섰다.
일행은 패수와 대수의 두 강을 건너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폈는데, 비류는 바닷가에 가서 살려고 하므로 10명의 신하들이 요청하였다.
“이 하남(河南)의 땅은 북으로 한수를 끼고 동으로 높은 산악에 의거하고, 남쪽을 보니 비옥하고 윤택하며 서쪽은 물(海)로 막했으니, 천연의 요새로 쉽게 얻기 어려운 명당입니다. 여기에 도읍을 세우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이 말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이에 온조는 소서노를 모시고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들로 보필하게 하며 나라 이름을 10제라 하였다. 이때는 서기전 18년으로 고구려에서 떠나온 바로 그 다음해였다. 미추홀로 간 비류는 그곳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히 살기 어려우므로 위례성으로 와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도 편히 살고 있었다. 비류가 부끄러워하고 뉘우치다 끝내 죽으니 그 백성들은 모두 온조의 위례성으로 모여들었다. 그 뒤로 백성들이 즐겁게 따르므로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쳤으며, 그 족보가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성씨를 삼았다.
온조의 건국 과정은 『삼국사기』에 의한 것이지만,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백제의 시조 대왕은 온조가 아니라 어머니 소서노라고 하여 이렇게 기록하였다.
”소서노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이롭지 못할 것을 염려하다가 패·대(浿帶)의 땅이 기름지고 물자가 풍부하다는 말을 듣고, 남쪽으로 가서 진(辰)·번(番)사이에 있는 물(海) 가까운 땅에 이르렀다. 그곳에서 10년 만에 밭을 사서 장원을 두고 재산을 모아 수만금에 이르니 원근에서 소문을 듣고 찾아와 따르는 자가 많았다. 남으로 대수에 이르고 동으로 큰 물(海)에 닿는 500리
되는 땅이 모두 그녀의 소유였다. 그리고 추모대왕에게 사람을 보내 글을 올려 섬기기를 원한다고 하자, 추모대왕은 매우 기뻐 칭찬하며 소서노를 책봉하여 어하라(於瑕羅)라는 칭호를 내리셨다.
재위 13년에 이르러 소서노가 세상을 떠나고 태자 비류가 즉위했으나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인용문에 따르면 소서노가 나라를 세워 추모대왕으로부터 어하라의 칭호를 받았으나 13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비류가 즉위했으나 따르는 사람이 없다고 했는데, 그 후 신하들의 권유를 따라 온조가 물(海)을 건너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나라 이름을 백제라 했다.
위 인용문의 내용을 모른 상태에서 백제의 시조를 소서노라고 처음 주장한 사람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다. 그는 『삼국사기』에 온조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한 12년 뒤에 소서노가 죽자 같은 하남위례성으로 옮겼다는 모순된 기록을 지적하였다. 이는 하북 위례성이 첫 도읍이고 거기서 소서노가 여왕이었던 사실을 숨기려다 이런 결과가 되었다고 보았다.
필자도 단재의 견해가 타당하다고 보는데 그 이유를 들자면 이렇다. 우선 비류가 미추홀로 따로 가기를 원했다는 사실에 무언가 숨겨진 사연이 있다고 보인다. 만약 소서노가 아들을 대왕으로 세울 계획이었다면 장자인 비류를 생각했을 것이고 그 일을 비류에게 말해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서노가 스스로 대왕이 되려는 것을 알고 실망한 비류가 어머니에게 반발하여 따로 가서 나라를 세우려고 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추정은 비류가 미추홀에서 실패한 뒤 위례성에 와 보고 부끄러워 뉘우치다 죽었다는 데서 확실성이 더 높아진다. 소서노가 나라를 잘 꾸려나가고 있으므로 자기가 어머니에게 반대한 것이 후회되어 견딜 수 없어 결국 죽음을 택한 것이라 보겠다. 만약 단순히 바닷가에 살고 싶어 갔던 것인데 형편이 좋지 않았다면 다시 어머니에게 돌아오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는데도, 젊은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면 소서노와의 관계가 아주 나빴던 것으로 보겠다.
두 번째 이유는 김부식이나 조선의 철저한 유교적 신념에서 볼 때, 여성이 건국의 시조라는 사실이 지극히 못마땅하여 시조를 온조로 바꿔버린 것으로 보이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폄훼하고 왜곡하였다고 보인다. 뒤에 동성 대왕전에서 표본적인 사례를 볼 것이다. 소서노 여왕의 경우는 남존여비 사상에 입각한 여성관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면 충분히 수긍될 것이다.
삼국사기에서 신라의 선덕·진덕 2명의 여성 대왕에 대하여 주석은 이렇게 쓰여 있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용납하기 어려우므로 그대로 전부 인용하였다.
논하건대, 내가 듣기에 옛날에 여왜 씨가 있었으나 천자는 아니고 복희씨를 보좌하여 9주를 다스렸을 따름이다. 여치(한나라 태후 여씨)·무조(당나라 태후 무씨, 뒤에 황제를 칭함)는 유약한 임금 남편을 맞아 정치를 대신했으나 공공연하게 왕이라 칭하지는 않고 다만 고황후 여씨니 측천무후니 하고 기록했다.
이를 천리로 말하면 양은 강하고 음은 유하고,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니, 어찌 노파가 안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겠는가? 신라가 여자를 왕위에 세운 것은 실로 난세의 일로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서경』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을 알린다” 했고, 『역경』에 말하기를 “암퇘지가 껑충거리며 날뛴다” 했으니 이는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런 소신을 가졌기에 백제의 시조를 소서노에서 온조로 바꾸었을 개연성은 매우 크다고 본다. 다음에 『삼국사기』에 온조대왕이 즉위하자마자 동명왕(추모대왕이 아니라 아버지 우태의 할아버지인 북부여의 대왕으로 여겨짐)의 사당을 세웠다고 하였다. 그런데 대왕 13년에 어머니 소서노가 돌아가셨을 때는 얼마 후 도성과 궁궐을 세우고 2년 뒤 새로 궁전을 지었음에도, 소서노의 사당을 짓지 않고 있다가 4년 뒤에야 비로소 사당을 세우고 국모 소서노를 제사했다고 기록했다. 이런 점에서도 보면 온조가 어머니와의 충돌로 극도로 나쁜 감정을 가졌다고 보지 않으면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면 대왕인 어머니를 폐하고 온조가 대왕이 됐기에 백성들에게 소서노 대왕의 흔적을 지워 자신의 입지를 세우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온조는 2대 대왕이 된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서노를 배제하고 아예 처음부터 온조가 백제를 세웠다고 기록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추정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삼국사기』 안에 숨어 있다.
소서노가 죽었다는 기사 바로 앞에 ‘수도의 한 노파가 남자로 변하였고…’ 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여자대왕이 남자대왕으로 바뀔 것이라는 강력한 암시가 틀림없다. 실제로 노파가 남자로 변할 수 없음은 말할 나위도 없으니, 온조가 대왕이 돼야 하는 징조로 백성들을 회유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다. 또 소서노의 사후 온조대왕이 신하들에게 말한 것을 보더라도 당시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근래에 요망한 징조가 여러 번 나타나고 국모가 세상을 떠나는 등 정세가 자못 편안하지 못하니 장차 수도를 옮겨야 하겠다.”
소서노가 61살에 죽었는데 온조대왕의 어머니인 태후로서 자연사든 병사든 늙어서 죽은 것이라면 별 문제가 아닐 텐데도, 온조대왕이 정세가 편안하지 못한 요인의 하나로 꼽아, 천도할 뜻을 비쳤다. 그의 속셈은 소서노 여왕의 영웅적 행적을 가능한 한 지우고 자기를 내세우기 위한 분위기로의 전환을 노린 것으로 본다면 너무 지나친 판단일까?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필자는 소서노 여왕을 백제의 시조로 보아 이 전기에 유일한 여성 영웅으로 포함했으며, 그 대신 2대 온조대왕은 쇠퇴 길의 마한을 흡수했고, 국가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여러 성을 축조하는 등 공적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선 제외했다.
이제 소서노의 남하 경로를 추적하여 백제의 건국지가 어디였는지를 알아보자. 그녀 일행이 출발한 졸본은 비류수 근처로 지금의 북경 근방이었음은 앞의 추모대왕전에서 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이 남쪽으로 내려온 곳 역시 지금의 하북성 지역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건너온 패수와 대수의 강이 하북성에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되면 필자가 보는 지리적 견해가 옳다는 것 또한 증명될 것이다.
이 두 강은 한나라의 낙랑군을 흐르는 강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낙랑군은 물(海)을 끼고 있어 두 강의 하류가 낙랑군을 통과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결론부터 말하면 지금의 천진(天津)을 중심으로 발해만에 있었는데 두 강의 중·상류는 낙랑군 바깥의 동이 지역을 흐르므로 소서노 일행이 패수와 대수의 중류지역을 별다른 장애 없이 지나 남으로 내려간 것이다.
패수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하자. 연나라 (위)만이 ‘동쪽’으로 경계인 패수를 건너 번조선에 망명했다고 했다.
만약 패수가 압록강이나 청천강·대동강 등 한반도의 강이었다면 그 강들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니, ‘남쪽’으로 건넜다고 해야 평양에 이를 수 있다.
또 (위)만이 조선에 와서 도읍했다는 왕험성(평양)의 위치에 대해 『사기』의 주석서를 보면 신찬이라는 학자가 패수의 ‘동쪽’이라 했으므로 역시 (위)만이 동쪽의 고조선으로 왔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한 무제가 서기전 109년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칠 때 수군대장 양복이 ‘제나라를 따라 발해에 떠서(從齊浮渤海)’ 열구라는 곳에 상륙작전을 폈다.
『한서 지리지』에 동북쪽의 유주(幽州)와 북쪽의 병주(幷州)에 속한 15개 군들을 보면, 낙랑군을 제외한 14군은 모두 동부·서부 또는 중부도위의 2~3개 도위를 두었으나 유독 낙랑군에는 동부와 남부도위의 둘을 두었다. 15개 군 중 낙랑에만 남부도위가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군의 관할 지역이 특수하게 ‘「’ 형태여서 동부와 남부에 보조할 도위를 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수경』에는 “패수가 낙랑 누방현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임패현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고 하였다. 즉 한반도의 모든 강과 다르게, 황하처럼 서에서 동으로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본 여러 사료의 패수와 낙랑군에 대한 내용이 옳다면 백제가 건국된 곳은 낙랑에 가까운 서 (남)쪽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과연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대왕이, ”나라의 동쪽에 낙랑군이 있어 늘 강토를 침범하여 편안한 날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는 발해만에 있던 서쪽 내륙에 백제가 도읍한 사실을 명백히 증거하는 것이다. 우리 학계에서는 일본 식민사학자들이 약 100년 전에 조작해 놓은 반도사관을 아직까지 추종하여, 고구려는 북한 압록강변에서 건국됐고 백제는 남쪽의 서울의 한강변에서 건국되었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여기서 이러한 식민사관을 이 땅에 심은 원흉인 이병도의 잘못된 논리를 폭로코자 한다.
이병도는 온조 일행이 현재 북한 압록강의 졸본으로부터 남하했다고 하여, ‘오늘의 황해도와 평안도의 길을 취한 것은 패수와 대수를 건넜다는 이야기로 알 수 있지만…’ 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억지요 거짓이다. 그 이유는 매우 간단하다. 이병도는 식민사관에 따라 낙랑군이 지금의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었다고 한 장본인인데, 온조가 그 지역을 지나왔다는 것이다. 북한의 평양이 맞는다면 온조의 많은 일행이 낙랑군을 통과할 수는 없다. 그런데도 이병도가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패수와 대수를 건넜다는 사실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온조 일행은 낙랑을 피해 함경도와 강원도 쪽으로 와야 안전하다. 그런데 이쪽에는 강이 없기 때문에 패수든 대수든 건널 수가 없다. 낙랑군을 지나왔다고 했으니 이병도의 위치는 거짓일 수밖에 없다.
또 백 보 양보하여 만약에 일행이 운 좋게 낙랑 길로 내려와 한강 유역에 도읍하였다면 낙랑은 백제의 북쪽일 뿐, 동쪽이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졸본과 패수, 대수는 물론 위에 나온 북한산·미추홀·하남 위례성 등도 모두 한반도에 있던 지명이 아니다.
‘하남’ 이라는 말도 아무 강이나 그 남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 중국의 황하(黃河)를 ‘하’라 하여, 황하의 남쪽을 말한다는 것도 당연한 증거가 될 것이다.
지금까지 본 백제의 위치는 필자가 『삼국사기』의 기록을 분석하여 얻은 결론이지만 중국의 기록을 보아도 이런 사실을 확실히 증언하고 있다. 『송서』에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필자가 이 옛 요동을 태행산맥 동쪽이라 보고 추모대왕이 요동의 북쪽에 고구려를 세웠다고 했는데, 여기에 백제가 요동의 동쪽이라고 했으므로 그곳이 고구려의 남쪽으로 소서노 대왕이 도읍한 위치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송서』 등에서 훗날 백제가 서쪽의 ”요서를 공략해 가졌다고 요서 백제의 진평 2군 점령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만약 백제가 한강 유역에서 건국했다면 한강 부근이 요동이어야 하고 또 그 서쪽의 서해안 지역이 요서라야 하니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어디 있는가?

百濟
有單略有遼東,百濟略有遼西.百濟所治,謂之普平郡 晋平縣(宋書)
고구려는 요동을,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고, 백제의 그곳은 진평군, 진평현이라 했다. (송서)
百濟亦據有遼西 ,晉平二郡地矣,自置百濟郡(梁書)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 진평2군을 차지해 백제군을 설치했다 (양서)
晉世 句麗旣校勘 略有遼東, 百景亦據有遼西 · 晉平二郡地矣, 自置百濟郡(南史)
진나라 때에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자 백제도 요서의 진평2군을 차지해 백제군을 설치했다(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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