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종(百種), 불교에서는 우란분절 행사

백종은 백곡지종(百穀之種)의 줄임말로 상정된다. 음력 7월 15일이 되면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면서 만물이 성숙하게 된다.

백종은 100가지 종자를 모아서 나눔과 생산에 활용하는 우리나라 고대의 농신제일이었던 것이 삼국시대 이후 불교의 우란분회 영향으로 그 원래의 민속적 의의를 상실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음력 7월 15일 보름은 백종날로 이날을 전후해 밀물의 수위가 만조 시 최고치가 된다. 지구와 달, 태양의 위치가 일직선상에 있으면서 달과 지구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을 때 백중사리는 발생된다. 이 경우 달의 인력에다 태양 인력까지 합쳐지는데다 좁은 바다라서 더욱 조수간만의 차가 높아진다.

“이때는 바닷가를 접한 연안에 바닷물이 많이 들기 때문에 해수침수 피해가 속출하고 비가 많이 오면 피해는 더욱 커지기 때문에 바다에 나가자 못하게 하는 풍속이 있다”고 볼음도에 기거하는 작곡가 전석환 선생은 말했다.

이때쯤 과일과 채소가 많이 나와 100가지 곡식의 씨앗을 갖추어놓은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절에서는 재(齋)를 올리고 공양을 드렸으며, 민간에서는 100가지의 과실을 차려 제사를 지내고 남녀가 모여 음식을 먹고 노래와 춤을 즐겼다. 이날 한창 익은 과일을 따서 사당에 천신차례를 올리고 백중잔치를 한다. 백중을 전후로 장이 섰는데 이를 백중장(百中場)이라 했다. 머슴이 있는 집에서는 이날 하루는 일손을 쉬고 머슴에게는 휴가와 돈을 주어 백중장에 가서 하루를 즐기도록 했다.

백중장이 성시를 이루면 씨름판과 장치기 등의 놀이도 펼쳐진다. 또한 한 해 농사를 잘 지은 집의 머슴을 소나 가마에 태워 마을을 돌면서 사기를 북돋아준다.

백중(百中)은 백종(百種)·중원(中元)·망혼일(亡魂日)이라고도 한다. 백중 때가 되면 농사일이 거의 끝나서 농부들은 호미를 씻어두는데 이를 ‘호미씻이’라고 한다. “이점을 볼 때 과거 우리 민족의 주업인 농산물 생산과 관련된 놀이가 불교에 습합되면서 종교성향으로 흘렀다”고 오재성 선생은 분석했다.

백중을 백종(白踵)이라고도 했다는 것은 조재삼(趙在三)이 철종 6년(1855)에 저술한 <송남잡지(松南雜識)> 세시류(歲時類)에 나온다. 여기에서 중원 백종조(中元 百種條) 밑에 작은 글씨로 ‘승가에서는 이날 모두 발을 씻으므로 백종이라 했다(僧家是日皆洗足故謂白踵)’라고 소개하고 있다.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에서 <송남잡지>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백중을 백종(白踵)이라고도 쓴다고 했다.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는 백중을 ‘백종(百種)이라 하고 망친(亡親)의 영혼을 제사한다’라고 하여 조상을 기리는 날이면서 동시에 농업 생산 활동과 관련 있는 날임을 알게 한다. 민간 어원으로는 호미씻이를 하고 나면 발뒤꿈치가 하얗게 되므로 백종(白踵)이라고 하고, 백 가지 씨앗 종자를 갖추었다 하여 백종(百種)이라 했다. 발꿈치가 하얗게 됐다는 의미에서 형성된 말로 백중(百中)의 다른 말이다. 흰 백(白), 발꿈치 종(踵)자로 백중 무렵이 되면 더 이상 논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 발뒤꿈치를 하얗게 씻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훗날 외래 종교인 불교에서 백종날을 빌려서 우란분절(盂蘭盆節)로 콘텐츠화해서 하나의 불교행사로 바꿔놓고 있다. 이날은 아귀도에 떨어진 망령을 위하여 여는 불사(佛事)로 변했다. 목련 존자가 아귀도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받아 여러 수행승에게 올린 공양에서 비롯한다. 이때 백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대중에게 공양한 데서 연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안거(夏安居)의 끝 날인 음력 칠월 보름을 앞뒤로 한 사흘간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조상이나 부처에게 공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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