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도지와 관련이 있는 김시습

부여 무량사에서 입적, <징심록 추기> 기록

부여군 외산면에 무량사(無量寺)가 있다. 그곳에 매월당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시습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를 비롯한 여러 책들을 지었다. 훗날 <김시습전>을 지은 율곡 이이는 김시습을 일컬어 “한 번 기억하면 일생 동안 잊지 않았기 때문에 글을 읽거나 책을 가지고 다니는 일이 없었으며, 남의 물음을 받는 일에는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 김시습이 영특하고 예리한 자질로써 학문에 전념하여 공과 실천을 쌓았다면 그 업적은 한이 없었을 것”이라 하여 불우했던 김시습의 한평생을 애석해했다. 수양대군이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산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은 나이 50에 이르러서야 인생에 대하여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는 나라 구석구석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는데,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무량사였다. 그는 여기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네 모습 지극히 약하며 네 말은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에 버릴지어다”라고 자신을 평가했다. 무량사에는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불만 가득한 표정의 김시습 초상화가 지나는 길손들을 맞고 있다.
김시습은 한국 역사의 창세기라 할 수 있는 <부도지>와 관련이 있다. <부도지>를 지은 박제상의 영해박 씨 후손들과 가까이 지나면서 <부도지>를 포함한 <징심록> 15지를 다 읽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소감을 적은 것이 <징심록 추기>로 남아있다. <부도지>는 서기 419년 이전에 기록, 한국에서 기록연대가 가장 오래된 역사서이다. <부도지>는 <징심록> 15지 가운데 제1지로 징심록의 개념서 비슷한 것이다. 훗날 박제상 아들 백결선생이 <금척지>를 지어 보태고 김시습이 <징심록 추기>를 써서 보탠 모두 17편으로 된 책이다. 여기서 김시습은 훈민정음 28자를 이 <징심록>에서 취본했다고 전하고 있다.
신라와 고려, 조선 초기의 왕들은 영해 박 씨에 대해 은근한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부도지>는 영해 박 씨의 몰락과 함께 수난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기를 들고 김시습, 조상치 선생과 함께 금화(金化) 초막동으로 잠적하여 구은사 구현 중 무려 칠현을 배출해낸 영해박 씨 문중은, 당시 세조의 눈에는 그야말로 눈엣가시보다도 더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는데, 끝내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이 때문에 영해 박씨 대소가는 더욱 깊은 산 속으로 숨어버렸으며, 심지어는 선대의 비(碑)를 땅 속에 묻어 흔적마저 없애가면서 연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후손 박금 씨에 따르면, 이 무렵 <부도지>는 김시습의 손에 의해 금강산의 운와 효손공 댁에서 포신 계손공의 집으로 옮겨지고, 다시 계손공의 아들 훈 씨가 함경도 문천으로 가지고 들어가 운림산 속으로 숨어버렸다고 한다. 그 후 몇 백 년 간 삼신궤(三神匱) 밑바닥에 감춰두고 출납을 엄금하여 박금 씨 대에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박금 씨는 <부도지>를 해방 후 월남할 때 문천의 금호에 있는 금호종 합이학원에 남겨두고 내려왔다. 그 일로 한을 품은 박금 씨가 자신의 손으로 <부도지>를 되살려냈으나, 이 <부도지>는 <징심록> 15 지 중 단 1지에 불과하다. <징심록>의 유실은 비단 박금 씨 개인이나 영해 박씨 문중에만 한을 남긴 것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 전체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손실과 한을 남겼다고 아니할 수 없다.
<징심록>은 거기에 실린 15 지의 이름만 보아도 우선 체제부터가 다른 역사서와는 성격이 다른, 정치와 문화 전반에 걸친 괄목할 만한 사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그 책을 되찾을 방법은 없는가. 혹 박금 씨가 남겨 놓았다는 <음신지>, <역시지>, <천웅지>, <성신지>의 남은 일부만이라도 찾을 수 없을까? <부도지>의 여러 역사적 증언과 역법(曆法), 허실(虛實), 기화수토설(氣火水土設)은 한국 문화의 원형을 여실히 보여주는 주옥같은 기록들이다.
<부도지>에 따르면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 출발한 우리 민족은 궁희, 황궁, 유인, 한인, 한웅, 단군에 이르는 동안 천산, 적석산, 태백산과 청구를 거쳐 만주로 들어왔으며, 그 사이 지구상의 동서남북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 천도 정치의 한국 문화를 전세계에 심어놓았다. 천부의 한국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메소포타미아, 인도, 이집트, 그리스, 프랑스, 영국, 동남아시아, 태평양, 아메리카 대륙에 역법, 거석, 세석기, 빗살무늬 토기, 신화, 전설, 종교, 철학, 천문학, 음악, 수학에 그 잔영을 남겨놓고 있다.
<부도지>는 단군의 사자(使者)인 순(舜)의 아버지 유호씨(有戶氏)가 서방으로 건너가 그 곳에서 전고자(典古者)를 만나 천부의 본리를 순회하여 전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수메르에 근원을 둔 기독교 사상의 뿌리가 되었으며, 스키타이족에 의해 이루어진 불교와 그리스의 고대 문화도 한국의 천부 문화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유호 씨는 피라미드나 지구라트와 같은 높은 탑이나 계단이 마고성에서 소를 만들던 옛 풍속에서 유래했다고 부도지 역자 김은수 선생은 밝혔다.
김시습은 만년을 무량사에서 보내고 입적했다. 59세에 무량사에서 쓸쓸히 병들어 죽었다. 죽을 때 화장하지 말 것을 당부했으므로 그의 시신은 절 옆에 안치됐었다. 3년 후 장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었는데, 김시습의 낯빛이 살아 있을 때와 다름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된 것이라고 믿어 그의 유해를 불교식으로 다비했는데, 이때 사리 1과가 나와 부도를 세웠다.
그 뒤 이곳의 선비들은 김시습의 풍모와 절개를 사모하여 지금의 홍산면 교원리에 사당을 지은 뒤 이름을 청풍각(淸風閣)이라 했다. 그의 자화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지금도 홍산에는 청일사(淸逸祠)라는 사당이 남아 있다.

글 | 김민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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