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과 사막(沙漠)이 약 3만리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

성종실록 134권, 성종 12년 10월 17일 무오 1번째기사 1481년

【태백산사고본】 20책 134권 11장 B면
【국편영인본】 10책 265면
【분류】 군사-군정(軍政)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군사-관방(關防) / 정론-정론(政論)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외교-왜(倭) / 호구-이동(移動)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교통-육운(陸運) / 재정-역(役)

남원군(南原君) 양성지(梁誠之)가 상언(上言)하기를,
“신이 생각건대, 자고로 천하 국가의 사세(事勢)는 이미 이루어졌는데도 혹 알지 못하기도 하고 비록 이미 알아도 또 〈어떻게〉 하지 못하니, 이것이 모두 잘못된 일중의 큰 것입니다. 일을 먼저 도모한다면 어찌 잘 다스리고 오랫동안 안전하기가 어렵겠습니까? 지금 듣건대 중국이 장차 개주(開州)에 위(衛)를 설치하려 한다 하는데, 신이 거듭 생각해 보니 크게 염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봉황산(鳳凰山)에 의거하여 성(城)을 이루었는데, 산세가 우뚝하고 가운데에 대천(大川)이 있으며, 3면이 대단히 험하고 1면만이 겨우 인마(人馬)가 통하는 이른바 자연히 이루어진 지역이므로, 한 사람이 관(關)을 지키면 1만 명이라고 당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당 태종(太宗)이 주둔하여 고려(高麗)를 정벌하였고, 또 요(遼)나라의 유민(遺民)이 여기에 근거하여 부흥(復興)을 도모하였으니, 예나 지금이나 누가 우리 나라와 관계 있음을 모르겠습니까? 지금 북쪽으로는 산로(山路)로 심양(瀋陽)·철령(鐵嶺)·개원(開元)을 가리켜 야인(野人)과 연접(連接)하였고, 남쪽으로는 해도(海道)로 해개(海蓋)·금복(金復)을 가리켜서 등주(登州)·내주(萊州)와 접하였고, 서쪽으로는 요동(遼東)·광녕(廣寧)·금주(錦州)·서주(瑞州)를 가리켜 연주(燕州)·계주(薊州)로 통하니, 저들에게는 유주(維州)의 이로움이 있고, 우리에게는 한중(漢中)의 세가 있는 실로 동도(東道) 요충(要衝)의 땅입니다. 여름에는 만경(萬頃)의 험로(險路)이면서 오히려 충분히 의거할 수 있고 겨울에는 평평하기가 숫돌 같으면서도 곧기가 화살과 같으니, 비록 형제 부모의 나라라도 이 땅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것은 부당합니다. 평시에는 평안도 백성들 중 부역(賦役)을 피하는 자들의 태반이 이곳으로 가는데, 저들은 가벼운 부역으로 이들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변경 땅의 백성이 모두 그 곳으로 들어간다 하여도 그것은 일시의 해로움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명나라에서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은 영원한 근심꺼리입니다. 신이 고금(古今) 천하의 형세(形勢)로 말씀드리면, 구주(九州) 안은 오직 중국 황제가 다스리는 바이며, 사해(四海)의 밖으로
●서역(西域)은 총령(葱嶺)776) 과 ●사막(沙漠)이 ●약 3만 리나 되며,
●북쪽은 사막(沙漠) 불모(不毛)의 땅이어서 황막(荒漠)하기 끝이 없고, 동이(東夷)는 일본으로써 바다로 둘러쌓인 나라이며, 남만(南蠻)은 점성(占城)과 진랍(眞臘) 땅으로서 계동(溪洞)과 열병(熱病)이 심하여 중국과는 옛부터 통교가 없는 곳이며, 서쪽은 파촉(巴蜀)·검각(劍閣)으로의 길로서 진(秦)나라 때에 처음으로 개척하였고, 남쪽은 담이(儋耳)·경애(瓊崖)의 땅으로 한(漢)나라가 비로소 군(郡)을 두었습니다. 동북관(東北關) 밖은 영주(營州)·요동(遼東)·요서(遼西)의 땅이고, 서북관(西北關)의 오른쪽은 양주(涼州)·하서(河西)의 5군(郡)이 그것이며 이후에는 중국과 교통하였습니다. 생각건대 우리 나라는 요수(遼水)의 동쪽 장백산(長白山)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萬里)나 됩니다. 단군(檀君)이 요(堯)와 함께 즉위한 때부터 기자 조선(箕子朝鮮)·신라(新羅)가 모두 1천 년을 누렸고 전조(前朝)의 왕씨(王氏) 또한 5백 년을 누렸습니다. 서민(庶民)은 남녀가 농사에 부지런하고 사대부(士大夫)는 문무(文武)가 내외의 일에 이바지하여 집집마다 봉군(封君)의 즐거움이 있고 대대로 사대(事大)의 체제가 있으며, 따로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소중화(小中華)하고 부르면서 3천 9백 년이나 되었습니다. 황진(黃溍)777) 은 벼슬살이할 만한 나라라고 하였고, 황엄(黃儼) 또한 천당(天堂)이라 하였으며, 원 세조(世祖)는 우리로 하여금 구속(舊俗)을 그대로 따르게 하였고, 명(明)나라의 고황제(高皇帝)778) 는 우리 스스로의 성교(聲敎)779) 를 허가하였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성교(聲敎)를 가지게 한 것은 언어가 중국과 통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습속도 역시 다르기 때문입니다. 원(元)나라 말기에 홍군(紅軍) 20만 명이 우리 나라에 쳐들어 왔을 때 우리가 대병으로써 쳐부수고 군대의 명성을 크게 떨친 사실이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이며, 또 명나라가 금릉(金陵)에 도읍(都邑)을 정하고 우리 나라가 북원(北元)과 국경을 접한 형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입니다. 또 중국이 동쪽에 있어서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는 군사를 남용하였으나 지키지 못하였고, 요(遼)나라·금(金)나라·원(元)나라는 국경을 접했으면서도 핍박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신은 평양(平壤)을 점거하였던 중국 세력들의 흥폐(興廢)는 말할 것이 없다고 여깁니다. 고구려가 풍씨(馮氏)780) 의 남은 세력을 근거로 강성해져서 수 양제(煬帝)의 1백만 군이 살수(薩水)에서 대패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여섯 차례나 원정하였지만, 요좌(遼左)에서는 공이 없었으며, 한(漢)나라는 비록 평양을 얻었으나 곧 고구려에 점거당하였고, 당나라는 평정하였으나 역시 신라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약간의 굴곡이 있었습니다만, 삼한(三韓)의 법규를 지킨 것은 옛날과 같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한(漢)나라·수(隋)나라·당(唐)나라 모두 관중(關中)에 도읍하여 우리와는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요(遼)나라는 인국(隣國)이며 적국(敵國)이었으므로, 소손녕(蕭遜寧)의 30만 병이 하나도 돌아가지 못하였으며, 금(金)나라는 본래 우리 나라의 평주(平州) 사람이 세웠으므로 우리 나라를 부모의 나라라 하였고, 윤관(尹灌)이 9성(九城)을 쌓은 선춘령(先春嶺)으로 경계를 삼아 금나라가 망할 때까지 군사력을 더하지 않았습니다. 요와 금의 두 나라는 모두 서쪽에 하국(夏國)이 있었고 남쪽에는 대송(大宋)이 있어서 서로 원수 사이였는데, 어느 틈에 말머리를 동쪽으로 향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후 야율씨(耶律氏)가 서쪽으로 만리를 달렸으나 완안씨(完顔氏)의 남하로 패망하였고, 원나라는 혼인국(婚姻國)이라고 칭하였으나 수십년 동안 침략하였고, 중국과 남북의 오랑캐가 혼합되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서 국경이 없었지만 그 말년에는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 음산(陰山) 북쪽으로 들어갔습니다. 신이 다시 생각건대, 국가는 한 시대에 고식(姑息)되지 말고 만세의 계책을 세워야 하며 무사한 것을 요행으로 삼지 말고 만전의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천하에 금 그릇에 비길 만한 것은 잘 보전하여 깨트리지 말며, 산하(山河)가 금에 비길 만한 것은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역대의 제왕(帝王)들이 장안(長安)·낙양(洛陽)에 도읍을 정하거나 건강(建康)·임안(臨安)에 도읍하고 혹은 북쪽으로 업(業) 땅에 도읍하거나 동쪽으로 변량(汴梁)에 도읍하였습니다. 그러나 원나라가 북쪽으로 들어간 후부터는 연도(燕都)가 남북의 요관(要關)이 되어, 북으로는 거용관(居庸關)에 의거하여 호원(胡元)의 목을 움켜잡고 앞으로는 중원(中原)에 임하고, 남으로는 사해(四海)를 제압하니, 명나라 태종(太宗) 문황제(文皇帝)가 도읍을 정한 후 실로 만세의 제왕이 옮기지 않는 땅이 되었습니다.
●연도(燕都)로부터 서남쪽으로 운남 포정사(雲南布政司)까지
●1백 60일정(日程)이고,
●동남쪽으로는 남경(南京)까지
●60일정이며,
●동북쪽으로 한도(漢都)까지는 겨우
●30일정이고, 더구나
●개주(開州)에서 압록강(鴨綠江)까지는 겨우
●1일정이니, 집 앞 뜰만큼이나 가까우며 걸상의 한쪽 끝이라 하여도 옳습니다. 지금 개주에 성을 쌓으면 개주로써 그치지 않고 반드시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될 것이며, 당(唐)참(站)에 성을 쌓게 되면 당(唐)참(站)에 그치지 않고 성을 쌓지 않는 곳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양곡(糧穀)의 운반을 요청하게 되면 양곡 운반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소와 운반구(運搬具)를 요청할 것이며, 그것에 그치지 않고 청하지 않는 것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것이며 농(隴) 땅을 얻으면 촉(蜀) 땅을 바라게 되는 필연의 이치입니다. 더구나 우리 나라에서 바치는 동해의 생선이 주방(廚房)의 쓰임에 충당할 만한데, 어찌 특별히 남만(南蠻)의 구장(枸醬)781) 과 죽장(竹杖)을 쓸 것이며, 우리 나라의 궁시(弓矢)와 포백(布帛) 역시 군수(軍需)로 쓰는데, 어찌 남중(南中)782) 의 금은(金銀)과 단칠(丹漆)만을 쓰겠습니까? 지금 당장에는 무사하다 하여도 5백 년 후에는 무력(武力)를 남용하는 자와 공 세우기를 좋아하는 자가 없으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이번 일은 우리 나라에서 중국에 왕래하는 새 길을 열 것을 청한 것을 계기로 병부(兵部)에서 상주(上奏)한 것이지 정동(鄭同) 때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정동을 통해 교섭을 시작하였다면 정동을 통하여 그것을 끝내어야 하며, 그는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뒷날의 이해 관계는 역관(譯官)들에게 달렸습니다. 바라건대 ‘한씨(韓氏) 족친 중에 지위와 명망이 있는 자와 통사(通事) 중에 정동(鄭同)과 교제가 있는 자에게 명하여 토산물을 많이 가지고 바로 북경(北京)에 가서, 정동을 인해서 한씨에게 말하고 한씨가 어소(御所)에 말하여 개주위(開州衛) 설치의 정지를 청하게 하소서. 우리 고황제(高皇帝)는 만리(萬里)를 밝게 보시어 요동의 동쪽 1백 80리의 연산 파절(連山把截)로 경계를 삼으셨으니, 동팔참(東八站)의 땅이 넓고 비옥하여 목축과 수렵에 편리함을 어찌 몰랐겠습니까? 그러나 수백리의 땅을 공지(空地)인 채로 버려둔 것은 두 나라의 영토가 서로 혼동(混同)될 수 없다는 것인데, 만일 간사한 무리들이 흔단(釁端)을 일으켜 달자(達子)나 왜인(倭人)을 가장하여 도적질한다면 실로 예측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이제 조공(朝貢)하는 사절(使節)이 옛길로 가다가 침범이 있게 되면 철저히 방비하고, 그대로 주청하면 거의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에 윤허를 얻지 못하면 그 해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씨가 청을 할 수 없다면 그 뒤는 어찌 하겠습니까? 지금의 사세(事勢)는 바야흐로 병이 크게 도진 것과 같습니다. 7년이나 된 병에 만약 3년 묵은 쑥을 구하지 못하면 이것이 당(堂)에 있으면서 화(禍)를 알지 못하고 섶을 쌓아 놓고 위해(危害)를 알지 못함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의주(義州)는 압록강(鴨綠江)의 험함을 배경으로 한 나라의 문호(門戶)입니다만, 듣건대 그 성(城)이 대단히 허술해서 광대들은 몸을 눕히고도 올라갈 수 있고 찬비(餐婢)가 상을 이고도 내려올 만하다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두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창주(昌洲)·벽단(碧團)·대삭주(大朔州)·소삭주(小朔州) 등의 여러 성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만약 지금 곧 수축(修築)을 한다면 반드시 부역을 피해 유이(流移)하는 자가 많아질 것이고, 또 수축하지 않으면 방비가 허술해질 것이니, 이것이 바 로 국론(國論)을 결정하기 어려운 점입니다. 그러나 수축을 하지 않으면 의주가 없어지는 것과 다름없으며, 의주가 없어지면 하나의 도(道)가 없어지는 것이니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신은 절실히 생각하건대, 지금 8도의 인민으로서 놀고 먹고 조부(租賦)783) 를 내지 않는 자는 승려(僧侶)만한 것이 없습니다. 승려들을 동원하여 수축함으로써 보국(報國)하게 하는 것이 옳으며, 특별한 근로(勤勞)도 없으면서 까닭없이 복호(復戶)784) 된 자와 사복시(司僕寺) 제원(諸員) 등으로 수축하게 하여 보국하게 함도 좋을 것입니다. 또 번(番)을 서고 있는 정병(正兵)과 동원되고 있는 수군(水軍)에게 식량을 지급하여 압록강변 일대 행성(行城)을 쌓게 하고 또 따로 파절(把截)을 설치해야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도내(道內)의 공부(貢賦)도 인삼(人蔘)과 서피(鼠皮) 이외는 일체 면제 하고, 중국에 가는 사신[入朝使臣]도 정조(正朝)와 탄신(誕辰) 이외에는 정상대로 보내되, 쌍성(雙城)의 변(變)과 동녕(東寧) 사건은 마땅히 우려할 일이며, 따라서 감사(監司)·수령(守令)에게 직책이 없는 자가 따라가지 못하게 하고 가족을 데리고 가는 일도 또한 불가합니다. 삼도(三島)와 대내(大內) 등 왜인(倭人)도 마땅히 불러서 회유하여야 할 것이며, 모련위(毛隣衛)와 건주위(建州衛)의 야인(野人)도 역시 회유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앞으로의 일은 신이 감히 입으로 말하지 못하며 글로도 쓰지 못하겠습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신의 말이 들어맞지 않게 된다면 국가의 복입니다.’ 하였습니다. 신도 역시 반드시 후세의 근심꺼리가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사세(事勢)를 논하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은 조정의 의논이 이미 정해졌고 사신의 출발이 임박하였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구한 견마지성(犬馬之誠)785) 을 다할 것을 밤낮으로 생각하다가 침묵을 지킬 수가 없어서 죽음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의정부와 영돈녕(領敦寧) 이상, 육조 당상(六曹堂上)·대간(臺諫)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다. 정창손(鄭昌孫)·심회(沈澮)·홍응(洪應)·이극배(李克培)·윤호(尹壕)·강희맹(姜希孟)·이승소(李承召)·이극증(李克增)·유지(柳輊)·이덕량(李德良)·김영유(金永濡)·변종인(卞宗仁)·이경동(李瓊仝)·김자정(金自貞)·성숙(成俶) 등이 의논하기를,

“개주(開州)에 진(鎭)을 설치하면 우리 나라에 불리하다는 사실은 전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이번에 온 명나라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에 진을 설치하는 이유로 첫째 건주위 야인(建州衛野人)의 엿봄을 막고, 둘째 조선 사신 왕래 때의 머물 곳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라 상세히 밝혔습니다. 언사는 순하고 이치에 맞으니 무슨 말로 〈개주진(開州鎭) 설치의〉 정지를 청하겠습니까? 또 농사의 풍흉(豐凶)과 적정(賊情)의 긴박하고 긴박하지 않음을 보아 설치한다고도 하니, 설치 여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더구나 부녀와 환관[婦寺]을 통하여 주청(奏請)함으로써 설치를 면하려 하는 것도 정대(正大)한 방법이 아닙니다. 압록강 연변에 성을 쌓는 일은 국가에서 이미 의논하여 결정하였습니다. 다만 흉년으로 정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승려와 사복시 재원을 동원하는 일은 모두 시행할 만한 일이 못됩니다.”

하였고, 허종(許琮)은 의논하기를,

“개주(開州)에 진을 설치하는 일이 우리 나라에게 후일의 우려가 있다는 말은 진실로 양성지의 말과 같습니다. 다만 주청사(奏請使)를 보내지 말자고 한 것은 말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한씨(韓氏)와 정동(鄭同)을 통해서 주청하자는 것도 사리에 옳지 못합니다. 의주(義州)의 행성(行城)을 축조하는 일은 전에 이미 의논하여 결정되었습니다. 압록강변의ㄲ 읍성(邑城)을 사태의 긴박함과 그렇지 않음에 따라 점차로 수축하는 일은 신도 전에 그 곳을 순찰하고 아뢰어서 윤허(允許)를 얻었습니다만, 본도(本道)의 인력이 넉넉치 못하여 아직 착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승려를 동원하여 쌓는 일은, 승려들은 본래 생업이 없어서 스스로 식량을 가지고 올 수 없고, 요(料)를 지급하려면 그 수가 많아서 불가능합니다. 또 사복시 제원(司僕寺諸員)은 그 수가 1천 명도 못되고 모두 서울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어서 이곳으로 동원하여 부릴 형편이 못됩니다.”

하였고, 이파(李坡)는 의논하기를,

“개주(開州)에 진(鎭)을 설치하면 우리 나라 사신의 왕래에 유익한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을 설치하여 그 자리가 굳어지고 요긴한 곳에 성을 쌓고 시일이 오래 되어 외부의 침략받을 염려가 적어지면 우리 나라에는 무궁한 폐해가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평안도는 요역(徭役)의 과중함이 다른 도에 비하여 10배나 되고 개주(開州)는 거리가 멀지 않아서 압록강 연변 여러 고을과는 강이 얼면 곳곳에 통로가 생겨 왕래를 금할 수 없는 땅이 되는데 부역의 괴로움을 피하고 그 헐함을 쫓는 것이 사람의 상정이라 백성들이 그곳으로 옮겨 가는 것은 부득이하기 때문입니다. 또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을 상세히 살펴보면 전적으로 우리 나라를 위하여 설치하는 것도 아닙니다. 전에 사은사(謝恩使)도 중국이 반드시 우리 나라의 이익을 위하여 개주진(開州鎭)을 설치하는 것이라 하였지만, 신은 작은 이익은 있으나 우려(憂慮)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신이 이미 출발하여 추적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진(鎭)의 철폐를 요청하자는 의견은 장래를 생각하여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정동(鄭同)과 한씨(韓氏)를 통하여 황제에게 말하게 하자는 것은 매우 정대(正大)한 의논이 아닙니다. 어찌 나라의 체면으로 사사로이 부녀와 환관을 통하여 소망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결단코 옳지 못한 일입니다. 평안도 의주와 압록강변 성(城)의 상태가 나쁜 곳을 수축하는 일은 이미 의논하여 여러 번 전지(傳旨)가 내렸습니다만, 인력의 부족으로 일시에 착수할 수 없을 뿐입니다. 어찌 다시 의논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승려는 비록 역(役)이 없습니다만, 본래 한 곳에 정착해 있지 않아서 동원하여 부역시키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사복시 제원은 그 수가 본래 많았으나 근래에는 감소되어 남아 있는 자가 대단히 적습니다. 어찌 다른 곳에 부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도 불가한 일입니다.”

하였고, 이육(李陸)·한언(韓堰)·최영린(崔永潾)은 의논하기를,

“중국이 개주성(開州城)을 축성하는 것이 과연 우리 나라를 위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처음에 우리 나라에서 새길을 청하였고 우리 나라가 조공(朝貢)하러 왕래하는 것을 위하여 설치한다 하였습니다. 이미 우리를 위한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정지하기를 청하는 것은 말이 순서가 아닙니다. 또 환관과 부인을 통해서 성사하려는 것도 정대한 방법이 아니라 말할 것도 없으며, 더구나 개주 축성은 확정된 일이 아닙니다. 부역을 피하는 백성이 무거운 곳을 피하여 가벼운 곳으로 가기 위하여 여진 땅으로 잠입할 것이라는 말은 과연 그렇습니다. 압록강변의 축성은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승려는 본래 토착해 있지 않으며 사복시 제원은 그 수가 많지 않아서 그들로서 축성하자는 계책은 잘못된 것입니다. 전날의 의논대로 풍년을 기다려서 점차로 쌓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봉(李封)·강자평(姜子平)·구치곤(丘致崐)·임수경(林秀卿)·김학기(金學起)·김석원(金錫元)·곽은(郭垠)·윤석보(尹碩輔)·정광세(鄭光世)가 의논하기를,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참으로 철폐할 수 없어서 사신의 왕래가 해마다 그치지 않았습니다. 동팔참(東八站) 수일정(數日程)에 야인(野人)이 침범하는 일이 염려되어 새길을 요청하였으나 중국측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고서 개주(開州) 등지에 진(鎭)을 설치하는 일만 의논하니 사신의 왕래에는 조금 이익이 있을 것 같습니다만, 우리 나라에 크게 우려되는 바가 있습니다. 개주는 의주에서 1백여 리 밖에 떨어져 있지 않고 평안도의 피폐가 다른 도에 비할 바가 아닌데, 명나라측이 부역을 감면하고 여러가지 방법으로 백성들을 초치할 경우 괴로움을 피하고 편안함을 따름은 사람의 공통된 심정이니, 압록강의 물이 얼 때 백성들이 옮겨 가는 것을 어떻게 금하겠습니까? 국가에서 이에 대한 계책을 우선 세우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을 설치하는 일을 막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정동(鄭同)에게 뇌물을 주고 한씨로 하여금 천자에게 말하게 하자고 합니다만, 이는 대신(大臣)이 할만한 말이 못되고 정대한 의논이 못됩니다. 어찌 환관을 인연해서 성사할 수 있겠습니까? 압록강변의 축성하는 일은 급한 일입니다. 그러나 평안도의 계속된 기근(飢饉)으로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기 어려우니, 풍년을 기다려 점차로 쌓는 것이 옳습니다. 몰래 국경을 넘어가는 자를 금하는 일은 이미 국가의 조치가 있습니다. 마땅히 관리에게 책임지워 일일이 준수하게 하여야 합니다. 승려와 복호(復戶)된 자와 사복시 제원을 동원한다면 그것은 사정에 어두운 일이며 시행할 일이 못됩니다. 정병(正兵)과 수군(水軍)을 동원하여 축성하는 일은 식량을 계속 조달하기 어려워 또한 시행이 불가능 합니다.”

하였다.

[註 776] 총령(葱嶺) : 파미르 고원.
[註 777] 황진(黃溍) : 원(元)나라 학자.
[註 778] 고황제(高皇帝) : 태조(太祖).
[註 779] 성교(聲敎) : 덕화(德化).
[註 780] 풍씨(馮氏) : 풍홍(馮紅).
[註 781] 구장(枸醬) : 안남 지방에서 나는 구(枸)를 재료로 담금 장(醬).
[註 782] 남중(南中) : 남방.
[註 783] 조부(租賦) : 조세(租稅).
[註 784] 복호(復戶) : 조선조 때 충신(忠臣)과 효자(孝子)·절부(節婦)가 태어난 집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주던 일.
[註 785] 견마지성(犬馬之誠) : 신하가 군주(君主)에게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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