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보고의 활동 지명으로 본 삼국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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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

장보고는 유연제노(幽燕齊魯)와 오월(吳越) 사이의 사로신라 인물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이하 ‘삼국사’로 표기』신라본기에 의하면 장보고는 언제 출생했는지는 알 수 없고 당나라 武寧(무 령)군 소장이 됐다가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淸海鎭)대사가 되고 894년 무주 사람 염장에게 피살됐다는 것이다. 김부식이 기록하기 전에는 고리(高麗-고려)땅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기록도 없었다고 했는데 『삼국사』에 있으니 「당서」『두예문집』등에서 인용한 것으로 보아서 그는 유(幽)연(燕)제(齊)노(魯)와 오(吳)월(越)사이의 맥제(百濟)를 멸망시킨 황해 서쪽 사로신라인의 후예로 보아야 할 것이다.

1) 『당서(唐書)』 동이전(東夷傳) 신라(新羅)변한(弁韓)묘예(苗裔)也—금성(金城)環八里—장보고 기록

‘開成5年(840)에 홍로사에 적을 둔 질자와 공부하던 학생으로서 연한이 다한 사람 105명을 모두 돌려보냈는데 장보고, 정년도 그 속에 있었다. 그들은 모두 싸움을 잘하며 특히 창을 잘 쓴다. 정년은 또 물(바다)속으로 오십 리를 가도 숨이 막히지 않으며 용맹스럽고 굳건한 것은 사람들이 보고도 따르지 못했다.

정년은 보고를 형이라 부르는데 보고는 나이가 위이고 정년은 재주가 있어 늘 서로 뒤지지 않으려 하였다. 이들이 신라에서 와서 (唐(당))武寧(무 령)軍小將이 됐다가 보고가 신라로 돌아와 왕을 알현하면서 “중부에 있는 나라가 우리 신라 사람으로 노비를 삼고 있습니다. 바라옵건대 청해(靑海)에 진(鎭)을 설치하여 적들이 서쪽으로 잡아가지 못하게 하겠습니다.”고 했다. 청해(靑海)는 해로(海路)의 요지(要地)이다. 이에 왕은 보고에게 1만의 군사를 주어서 지키게 하니 大和(827-835)이후로는 해(海-물)위에서 신라인을 잡아 파는 자가 없어졌다.

보고가 이미 나라 안에서 귀하게 되었으나 정년은 漣水(연 수)에서 나그네로 궁색스럽게 살고 있었다. 하루는 戌主 馮元規에게 “내가 동쪽으로 가서 장보고에게 걸식을 할까 하오”하였더니 원규가 “당신이 보고를 저버린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찌하여 그의 손에 죽으려 하는가?”했다. 다시 정년은 “기한으로 죽는 것 보다 통쾌하게 싸우고 죽는 것이 낫다 더구나 고향에 돌아가서 죽으면 얼마나 좋겠소”하고 정년은 길을 떠나 장보고를 만났다.

보고는 그를 맞아 주연을 베풀고 극진히 환대하였다. 술자리를 채 끝내기도 전에 대신이 왕을 죽여서 나라가 어지러워 왕이 없다는 소식이 들려 왔다. 이에 보고는 군사 5천을 나누어주며 그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자네가 아니면 이 화난을 평정 할 수 없을 것일세”하고 말하였다. 이리하여 정년은 수도에 이르러 반란을 일으킨 자를 베고 왕을 세웠다. 이에 보고를 불러 정승을 시키고 정년으로 청해를 지키도록 했다.ㅍ회창연간(會昌年間- 841-846) 이후로 다시는 조공이 들어오지 않았다.’

위의 기록은 『당서』에서 장보고, 정년에 관한 기록을 번역한 것이다.

* ‘기한으로 죽는 것보다’라고 했는데 당나라가 그만큼 궁색했다고 할 수가 있는가?

『당서』의 신라 위치는 『당서』동이전(東夷傳)에서 1차 확인할 수 있고 전체 동이전에서 밝혀 볼 수 있다.

① 묘(苗)에 의해서 살펴보면 『禮記』55에 의하면 묘는 “九黎(구 리)之後苗民(묘 민)”라 하였고 九黎(구 리)는 東平郡 壽張縣에 묻혀 있는 치우 天子(천 자)시대의 국호이다.(『史記(사 기)』) 그러므로 九黎(구 리) 후예 즉 苗(묘)의 기록에 의해서 弁韓(변 한)과 新羅(신 라)로 이어 졌다면 동평에 가까운 곳에 장보고가 활용한 신라가 있었다는 말이다. 『史記(사 기)』1에서 三苗在江淮(강 회)荊州라고 하였는데 漣水(연 수)는 江淮(강 회)지역에 있고 馬韓(마 한)王(왕)이던 準이 위만에게 쫓겨 海(해)로 갔는데 海(해)역시 江淮(강 회)지역에 있다. 이로써 九黎(구 리)–苗(묘)– 弁韓(변 한)– 新羅(신 라)의 연속성과 東平(동 평)–江淮(강 회)–海(해)–漣水(연 수)가 일치하니 『唐書(당 서)』東夷(동 이) 新羅(신 라)위치는 황해 서쪽인 것이다.

② ㉠『당서』동이에서 북쪽의 高句麗(고 구 리) 위치가 甬道(용 도)(北平(북 평 )) 銀山(은 산) 後黃城 古代人城 新城(신 성)등이 있는 곳이고 그 남쪽에 百濟(맥 제) 위치가 平原(평 원 ) 項城(항 성) 東明(동 명) 德安(덕 안) 薄城(박 성) 諸城(제 정) 周留城(주 류 성) 白馬江(백 마 강) 熊津(웅 진)之東大山 등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또한 百濟(맥 제) 동쪽에 新羅(신 라)가 있다고 하는데 高句麗(고 구 리) 지명의 남쪽이며 百濟(맥 제) 지명 동쪽에 新羅(신 라)지명 兗州(연 주) 淄州 漣水(연 수) 泗가 있고 盧와 비슷한 廬가 있다. 唐書(당 서)에 의한 百濟(맥 제)와 같이 있는 新羅는 황해 서쪽에 있고 東明(동 명) 項城(항 성) 德安(덕 안) 撫州(무 주)의 동쪽에 있다 할 것이며 장보고 역시 西쪽 사로신라인으로 볼 수밖에 없다 할 것이다.

㉡『삼국지』『후한서』東夷(동 이)의 韓(한)지역은 海(해)가 있는 江淮(강 회)지역이 될 수밖에 없고 이를 계승한 新羅도 江淮(강 회)지역에 있을 수밖에 없다.

『삼국지』『후한서』에서 高句麗(고 구 리)는 장성 남쪽에 있고 北平(북 평) 太原(태 원)이 있는 곳에 있다고 했으며 그 남쪽에 濊(예)의 땅 일부가 滄海郡(창 해 군)이 되었고 하였고 그 남쪽에 箕準(기 준)이 海(해)로 갔다고 하였다. 제일 남쪽에 倭(위:왜)는 南越(儋耳)(남 월 담 이), 朱崖(주 애), 會稽東冶縣(회 계 동 야 현), 夷洲(이 주) 澶洲(단 주) 등에 있다고 하였는데 韓(한)의 지명 海(해)가 있는 곳에 泗, 徐州(서 주), 漣水(연 수)도 있고 武寧(무 령)도 있는데 모두 東明(동 명) 項城(항 성) 德安(덕 안) 동쪽에 있으니 장보고는 남북한 지역에서 진출한 신라인으로 볼 수 없으며 진출 ‘신라방’이 있었다고 할 수는 더욱 없는 것이다.

③ ㉠ 장보고가 唐(당)에 가서 武寧(무 령)의 軍소장이 되었다고 했는데 武寧(무 령)은 德安(덕 안) 서쪽에 있다( 현 중화국 강서성)

덕안은 百濟(맥 제)가 망한 후 唐(당)의 도독부로 되었던 百濟(맥 제)땅이며 신라군이 1000여명의 唐(당)軍을 참살한 곳이기도 하다. 덕안의 동쪽에는 百濟(맥 제) 의자왕 군사와 신라 군사가 싸운 서성 桐城(동 성) 岑山(잠 산) 獨山(독 산)이 있는 곳으로 동쪽에 김유신 선조 소호금천씨가 살던 靑陽(청 양)과 김수로왕과 관계가 있는 許村(허 촌) 廟首(묘 수) 黃山(황 산) 九子山(구지봉) 潰池(궤 지)같은 지명이 있다. 德安(덕 안) 서쪽이 武寧(무 령)이니 羅 唐(당)의 경계로 볼 수 있어 장보고 신라는 황해 서쪽에 있고 그곳 泗 盧 또는 寧 海(해)에 있던 사로신라인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청해진은 漣水(연 수)의 동쪽에 있다 하였는데 청해진은 지명이기 이전에 지역을 총괄하는 명칭으로 볼 수도 있는데 산동省 대표 靑과 강소省 대표 海(해)를 합하여 그 해안을 지키는 장소였을 것으로 본다면 장보고 유적지라는 적산원이 있다는 산동성 문등현 남쪽에는 淸海鎭(청 해 진)과 흡사한 정해위(靖海衛)가 있다. 鎭과 衛는 모두 군사 지역이란 뜻이고 靖海와 淸海(청 해)는 비슷하니 이곳이 청해진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정해위(靖海衛)의 서쪽에는 百濟(맥 제)땅이었던 城陽(성 양)과 완도(WANDO:灣島)가 있어 淸海(청 해)今(금)莞島(완도)라는 것도 참고 될 수도 있는 지역이다.

현재의 전라남도 완도에서 1만의 군사가 있을 주둔지나 보급을 할 수 있었던 지역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산동省 정해위(靖海衛)는 근세까지도 군사 지역이었다.

정해위(靖海衛)북쪽에는 장보고가 세운 절 적산원이 있다. 그리고 정해위(靖海衛) 서쪽에는 城陽(성 양) 뿐아니라 九黎(구 리)시대 치우天子(천 자) 능이 東平(동 평)에 있고 김유신 선조 少昊(소 호)金天(금 천)씨의 능이 곡부에 있으며 조선시대 기자 능이 몽성에 있고 百濟(맥 제)가 망할 때 지명 제성, 박성, 대산, 황산, 동명, 백마강, 항성, 평원, 주류성 등이 遼(요)의 東쪽에 있고, 遼(요)의 西쪽에 晋平二郡(진 평 이 군)의 흔적인 晉城(진 성) 高平(고 평)이 있으니 이를 어떻게 설명하면서 남북한에서 진출한 신라인 장보고라고 할 수 있는가 ?

그러므로 정해위(靖海衛)를 淸海鎭(청 해 진)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하튼 『唐書(당 서)』에 있는 신라는 『唐書(당 서)』의 東夷(동 이) 전체 지명과 『삼국지』『후한서』東夷(동 이)지명을 연계하여 볼 때 동명(산동성), 항성(하남성), 덕안 (강서성), 동쪽에 있는 신라 즉 江,淮(泗盧(사 로); 寧海(영 해))지역에 사로신라가 있고 장보고는 그 신라인으로 보아야지 남북한에서 진출한 東신라인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宋(송)나라에서 만든 『우적도』와 『송본역대지리지장도』가 있고 현지도가 일치하는 한 그렇게 밝혀 질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2).『樊川文集』의 장보고傳도 東明(동 명) 項城(항 성) 德安(덕 안) 汀洲(정 주) 동쪽 기록이지 남북한 기록으로 볼 수는 없다.

* 번천문집이란

장보고 전이 기록된 『당서』 이전의 유일한 개인문집이다.

내용에 있어서는 『당서』의 東夷(동 이)신라전과 비슷하지만 인용한 『당서』와도 지명에 있어서는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

『삼국사』장보고전과 『당서』신라 기록에서는 ‘武寧(무 령)군소장’이라고 하였는데 『번천문집』에서는 ‘徐州(서 주)위군중소장’이라 하여 그 땅의 국가를 말하지 않았고 漣水(연 수)도 泗之漣水(연 수)라 하여 위치를 분명히 하였다.『삼국사』신라본기에서는 ‘入唐(당)徐州(서 주)爲軍中小將’이라고 하여 당나라 땅의 徐州(서 주)로 들어간 것으로 보이게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사』는 중(화)국 문헌을 인용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원본에는 그런 내용이 없으니 어느 기록이 가장 사실에 가깝게 기록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번천문집』에서는 徐州(서 주)이고 『삼국사』에는 入唐(당)徐州(서 주)로 되어 있으니 진실은 어떤 것인가)

우선 徐州(서 주)의 위치를 살펴보자.

徐州(서 주)는 江蘇省(강 소 성)에 있는데 九黎(구 리)시대 치우天子(천 자)능이 있는 동평(산동성)의 남쪽에 있고, 조선시대 기자가 살던 서화(하남성)의 동쪽에 있고, 기자 능의 몽성(안휘성) 북쪽에 있으며, 百濟(맥 제)의 東明(동 명) 白馬江(백 마 강) 黃山(황 산) 大山(태 산) 諸城(제 정)이 북쪽에 있고, 周留城(주 류 성)이 서쪽에, 地理城이 서남쪽에 있으며, 徐州(서 주)의 서쪽에는 朝鮮(조 선)(고조선)과 周(주)의 경계로 볼 수 있는 西華(서 화)가 있다. 또한 신라와 唐(당)의 경계인 項城(항 성)(당항성)이 있다.

서주가 있는 곳에는 위만에게 쫓겨나서 箕準(기 준)이 피난한 海(해)가 있고 斯盧(사 로)국의 泗와 盧와 비슷한 廬가 있으며 특히 徐州(서 주)의 남쪽에는 지금은 懷遠으로 되어 있는 곳이 고지도에는 慶州로 나타나 있는데 신라 금성이 변경한 이름이다. 분명한 것은 徐州(서 주)는 九黎(구 리), 朝鮮(조 선)(고조선), 箕準(기 준)의 韓(한), 신라의 땅으로 이어져 연계되고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徐州(서 주)를 중심으로

* 북쪽에는

百濟(맥 제) 지명으로 東明(동 명) 黃山(황 산) 白馬江(백 마 강) 大山(태 산) 薄城(박 성) 諸城(제 정) 城陽(성 양) 平原(평 원 ) 淸河(청 하) 石門(석 문) 廣陽(광 양)이 있고

신라의 지명으로 石門(석 문), 石城(석 성), 磁(자), 淄(치) 靑(청) 萊(래) 獨山城(독 산 성) 등이 있고

高句麗(고 구 리) 지명으로 北平(북 평)(阜平(부 평)), 新城(신 성), 銀山(은 산), 甬道(용 도)(北平(북 평 )), 密雲(밀 운), 太原(태 원)등이 있으며

제3(위만)조선 시대의 지명으로 滄(창), 新海(신 해)가 있고

九黎(구 리)(구리) 시대의 지명으로 東平(동 평), 鉅野가 있다.

* 서쪽에는

百濟(맥 제) 지명의 周留城, 項城(항 성), 崇山(숭 산),河水(하 수), 晋平二郡(진 평 이 군)의 晉城(진 성) 高平(고 평)이 있고 신라 지명으로 項城(항 성), 地理城, 汝陰 등이 있으며 高句麗(고 구 리) 지명으로 光州(광 주)가 있고 조선(고조선) 지명으로 西華(서 화)가 있다.

* 남쪽에는 百濟(맥 제) 지명으로 西(舒)城 桐城(동 성) 岑山(잠 산) 獨山(독 산) 德安(덕 안) 涉羅(섭 라)(歙(섭)) 吳越(오 월) 등이 있고 신라 지명으로 桐城(동 성) 岑山(잠 산) 淄州 獨山(독 산) 德安 撫州(무 주) 汀洲(정 주) 獨山(독 산) 宣州 등이 있으며 高句麗(고 구 리) 지명으로 涉羅(섭 라), 吳越(오 월)이 있고 조선 지명으로 西華(서 화), 蒙城(몽 성)이 있다.

* 동쪽에는 箕準(기 준)이 위만에게 쫓겨 들어온 지명이고 百濟(맥 제) 잔류병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을 징발한 海(해)가 있고 신라 지명으로 泗 漣水(연 수)등 지명이 있다.

위에서 보듯 분명히 徐州(서 주)는 百濟(맥 제)땅과 신라땅 가운데 있으니 唐(당)나라 땅으로 볼 수는 없는 곳이다.

『당서』와는 달리 武寧(무 령)이란 지명도 없고 “徐州(서 주)爲軍中小將”이라고 하였으니 어느쪽 기록이 진실인가 ?

장보고와 정연의 기록에서 서주의 기록이 있다면 동쪽의 漣水(연 수) 즉 泗之漣水(연 수)에 정년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서주를 장보고, 정년의 고향으로 볼 수는 없을까 ?

3) 삼국사 열전에서는 高麗(고 리)땅에 없어서 唐書(당 서)를 인용하였다.

김부식이 『삼국사』를 기록하기 이전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이 남북한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근세에 배운 대로 장보고가 전라남도 완도에 청해진을 두고 해상을 누볐으며 황해 서쪽으로 진출하여 산동省 강소省 등까지 누벼 남북한인이 진출한 모델로 알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가 편찬된 高麗(고 리)시대에는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

①『삼국사』는 김부식 최산보 이온문 허홍재 서안정 박동계 이황중 최우보 김영온 정습명 김충효 등 11명이 편찬을 했는데 신라본기에 장보고의 기록이 분명하게 수록되고 있음에도 김유신 전에는 을지문덕과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이 高麗(고 리)땅에는 없어서 宋(송)나라 기록을 수록한다고 하였다.

을지문덕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모를 수도 있다고 하자, 장보고와 김부식의 시대 차이는 이순신과 현재 우리 시대와의 차이 보다 가까운 년대인데 만약 지금 우리가 남북한에는 이순신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이 없어서 지금 일본열도의 기록을 의지하여 기록할 수밖에 없다면 있을 수 없다 할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장보고가 남북한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기록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김유신 전에서 「雖乙支文德之智略張保皐之義勇 微中國(중 국)之書卽미泯滅而無聞」이라 하였는데 이는 ‘을지문덕의 지략과 장보고의 의용이 있어도 중국의 서적이 아니었던들 민멸하여 전문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것이니 옛기록은 唐書(당 서)와 杜預文集이 아니었을까 ?

그러나 『당서』나 『번천문집』에는 『삼국사』신라본기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신라본기는 또 다른 史書(사 서)를 인용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삼국사』에는 唐(당)나라 사람 영호징이 쓴 『新羅國記(신 라 국 기)』를 인용하였음을 흔적으로 남겼으니 이곳에서 인용되었을 것으로 추리 할 수 있다.

김부식 등이 『삼국사』에 아주 상반된 기록을 하였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 그것도 성격이나 생활에서가 아니고 장보고 그 자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보고에 대한 소문도 없었다고 하면서도 신라본기에 삽입구로 ‘淸海(청 해)今(금)之莞島’라는 기록이 있는데 『삼국사절요』에는 이런 문구가 없으니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15세기 교간본에는 유일하게 今(금)이 이곳에만 있다는 것은 이상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완도로 발음하는 지명이 전라남도에도 있고 산동성 청도와 정해위 사이에도 있으니 어느 것을 표현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 황해 서쪽 완도는 장보고에 대한 모던 기록과 일치하지만 남북한에는 그렇지 못하다 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김부식 시대까지도 남북한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이 없었다는 것인데 이는 장보고가 기록된 당서 東夷傳(동 이 전) 彊域(강 역)을 찾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②『삼국사』 장보고 전은 『唐書(당 서)』新羅傳에서 인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부식 시대까지도 高麗(고 리)땅에는 소문이나 기록이 없었던 장보고가 어떻게 열전에 포함될 수 있었을까 ?

『삼국사』장보고전은 『당서』신라전 장보고 기록과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차이는 자타가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중(화)국 기록이란 『당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연호가 大和 와 太和 로 다르다 왜일까 ?)

다음 書契(漢字)原文(원 문)은 樊川文集(1)과 唐書(당 서)(2) 및 三國史記(삼 국 사 기)(3)의 내용을 비교한 것이므로 연구에 참고가 될 것이다.

㉠ 樊川文集 ㉡ 唐書(당 서) ㉢ 삼국사 * 없어서 다름

㉠ 新羅人張保皐鄭年者自其國來徐州爲軍中小將保皐年三十年少十歲兄呼保皐俱

㉡ 五年鴻瀘寺籍質子及學生歲滿者一百五人皆還之有張保皐鄭年者

㉢ 張保皐鄭年皆新羅人但不知鄕邑父祖

㉠ 善鬪戰騎百揮槍其本國與徐州無有能敵者

㉡ 善鬪戰工用槍 * * * * * * * * * * * *

㉢ 善鬪戰 * * * * * * * * * * * * * * *

㉠ 年復能沒海履其地五十里不열角其勇健保皐差不及* 年* *

㉡ 年復能沒海履其地五十里不열角其勇健保皐* 不及也 年以兄

㉢ 年復能沒海低行 *五十里不열角其勇壯保皐* 不及也 年以兄

㉠ * * * 保皐以齒年以藝常주어不相下 * * * * * * * * * *

㉡ 呼保皐保皐以齒年以藝常****不相下自其國皆來爲武寧軍小將

㉢ 呼保皐保皐以齒年以藝常주어不相下二如唐* * 爲武寧軍小將

㉠ * * * * * * * 後保皐歸新羅謁其 王曰遍中國以新羅人爲奴婢

㉡ * * * * * * * 後保皐歸新羅謁其 王曰遍中國以新羅人爲奴婢

㉢ 騎而用槍無能敵者後保皐還國後謁興德王曰遍中國以吾 *人 *奴婢

㉠ 願得鎭淸海 新羅海路之要使賊不敢凉人西去

㉡ 得鎭淸海 * * * * * * 使賊 * 凉人西去淸海 * 海路之要也

㉢ 願得鎭淸海 * * * * * * * * * 凉人西去淸海新羅海路之要也今謂之莞島

㉠ 其王與 * 萬人如其請自 大和後海上無죽新羅人者保皐旣貴

㉡ * 王與 * 萬人如其請自 太和後海上無죽新羅人者保皐旣貴

㉢ 大王與保皐萬人鎭之比 * * * 後海上無죽鄕 人者保皐旣貴

㉠ 於其國 年錯寞去職饑寒在泗之漣水縣

㉡ 於其國 年* * * * 饑寒客 * 漣水

㉢ * * * 年* * * 職饑寒在泗之漣水縣

㉠ 一日言於漣水戌將馮元規曰年欲東貴乞食於張保皐

㉡ 一日謂 * * *戌將馮元規曰我欲東貴乞食於張保皐

㉢ 一日言於* * 戌將馮元規曰我欲東貴乞食於張保皐

㉠ 元規曰爾與保皐所挾何如奈何去取死其手

㉡ 元規曰若與保皐所負何如奈阿* 取死其手

㉢ 元規曰若與保皐所負何如奈何去取死其手

㉠ 年曰饑寒死不如兵死快況死故鄕邪

㉡ 年曰饑寒死不如兵死快況死故鄕邪

㉢ 年曰饑寒死不如兵死快況死故鄕邪

㉠ 年遂去至謁保皐保皐飮之極歡飮末卒其國使至大臣殺其國王國

㉡ 年遂去至謁* * 保皐飮之極歡飮末卒聞 * * 大臣殺其國王國

㉢ * 遂去* 謁 * 保皐飮之極歡飮末卒聞 * * * *王殺 * * 國

㉠ 亂無主 保皐遂分兵五千人與年持年 泣曰非子不能平과難年至其

㉡ 亂無主 保皐* 分兵五千人與年持年 泣曰非子不能平과難年至其

㉢ 亂無主 保皐 *分兵五千人與年持年手泣曰非子不能平과難年 *入

㉠ 國誅反者立王 以報王遂微保皐爲相以年代保皐

㉡ 國誅反者立王 以報王遂召保皐爲相以年代守淸海會昌後朝貢不復至

㉢ 國誅反者入王 ** 王* 召保皐爲相以年代守淸海此與新羅傳記파以杜牧傳故兩存之

4)『삼국사』신라본기에 있는 장보고 관계 기록은 唐(당)영호징『신라국기』에서 인용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김부식 시대까지 高麗(고 리)彊域(강 역)에는 장보고에 대한 소문이나 기록이 없었는데 어떻게 신라본기에 기록될 수 있었겠는가 ? 장보고傳에 대한 것은 唐(당) 宋(송)의 기록을 인용한다 하였는데 『唐書(당 서)』나 『樊川文集』에도 있다. 그러나 신라본기와는 같은 내용이 없으니 인용한 원전에 대하여 추측해 볼 수밖에 없다.

거칠부의 명칭이 『진흥왕碑(비)』에 수록되어 있어 남북한 인물로 볼 수 있고 그가 기록했다는 史書(사 서)는 거칠부 『국사』라 하는데 거칠부가 살았던 그 이전 즉 지증 법흥 진흥 진지왕의 4대 기록은 자세히 기록할 수 있으며 그 시대 이전은 문헌이 있다면 기록할 수 있으나 거칠부 이후의 인물 장보고에 대해서는 기록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국사에는 없었을 것이다.

『唐書(당 서)』나 『번천문집』에도 『삼국사』신라본기 장보고 내용과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다.

『삼국사』에는 황해 서쪽 기록으로 볼 수 있는 唐(당)영호징『신라국기』라는 원전명을 기록하고 있는데 우선 사람은 영호징이고 그의 국가는 唐(당)나라이고 그가 저술한 책명은 「신라국기」이다.

唐(당)나라 사람이라면 唐(당)에 가까운 西華(서 화) 項城(항 성) 德安(덕 안) 동쪽에 있는 사로신라를 기록했을 것이 아닌가 그가 서화 항성 동쪽 사로신라를 제쳐 두고 황해 동쪽 東신라를 기록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영호징이 살던 唐(당)은 東明(동 명) 西華(서 화) 項城(항 성) 德安(덕 안) 汀洲(정 주)의 서쪽이었고 德安(덕 안) 서쪽의 武寧(무 령)도 德安(덕 안)과 함께 唐(당)의 彊域(강 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다른 문헌에 장보고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영호징이 장보고에 대하여 기록 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장보고 기록이 있었다면 이로 미루어 볼 때 영호징은 唐(당)말기나 後唐(당)의 인물로 보여진다. 그러므로 그는 江淮(강 회)지역에 있던 사로신라 歷史(역 사)기록을 토대로 편찬한 『신라국기』를 찬 하였고 송나라에 갔던 김부식이 수집하여 왔으며 김부식은 동쪽 신라 기록인 거칠부 『국사』와 함께 『삼국사』신라본기에 수록하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1111-1117년사이 김부식이 宋(송)나라에 갔다 왔는데 그때 『唐書(당 서)』 영호징『新羅國記(신 라 국 기)』등을 수집하여 왔을 것으로 보인다.)

5) 전라남도 완도는 청해진이 될 수 없고 산동성의 灣島(WANDO)나 그 동쪽 정해위(靖海衛)가 靑(산동성)과 海(해)(강소성)의 해안을 지키는 淸海鎭(청 해 진)으로 볼 수밖에 없다.

① 황해 서쪽에도 灣島(WANDO)와 靖海衛(정 해 위)가 있고 황해 동쪽에는 莞島만 있다.

㉠ 『삼국사』본기 중에 유일하게 기록된 今(금)之莞島의 비밀

『삼국사』 본기 중에서 今(금)이라 하여 현재를 기록한 곳은 흥덕왕때 장보고의 기록이 있는 이곳뿐이다. 본기는 아니지만 같은 『삼국사』에서 김유신 전에서 을지문덕과 장보고에 대하여 소문도 기록도 高麗(고 리)彊域(강 역)에는 없었다고 하였는데 청해진이 今(금)완도라고 하여 현재의 전라남도 완도로 후인들이 인식하게 기록할 수가 있었겠는가 ?

㉡『삼국사』 지리지(地理志)에도 완도의 기록은 없다.

무안군에 진도현은 있었다고 하였고 양무군에 해남현 탐진현이 있다고 하였으나 완도라는 기록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다.

『삼국사』를 편찬하며 한쪽에는 ‘없다’고 쓰고 또 한쪽에는 ‘이곳이다’ 라고 쓸 수 있겠는가 ? 주석은 후대의 삽입으로 보여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유일하게 작게 주석으로 넣은 곳은 이곳밖에 없다.

1451년에 정인지 등이 『高麗(고 리)史』를 지을 때 장흥부 탐진현이 있고 완도가 포함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삼국사』는 1145년 김부식이 편찬한 것이 아니고 1512년 경주에서 복간된 것으로 그때 삽입된 것은 아닐까 ?

歷史(역 사)를 연구함에 있어 현지도를 참고 할 수밖에 없는데 완도로 발음할 수 있는 섬이 여러 곳에 있으니 살펴보자.

황해 서쪽이며 東明(동 명) 項城(항 성) 德安(덕 안)의 동쪽에 있는 산동성 百濟(맥 제)지명 城陽(성 양)의 남쪽 또한 현 靑島의 동쪽에 WANDO(완도)로 발음하는 灣島가 있는데 이곳은 서쪽으로 百濟(맥 제) 지명, 사로신라 지명, 高句麗(고 구 리) 지명, 조선 지명, 九黎(구 리)지명 등이 있으니 史書(사 서)와 일치성을 보이는 완도이다.

황해 동쪽에는 전라남도에 완도가 있고 북쪽에는 『삼국사』,『25사』동이전 관계 지명이 광주 이외에는 존재하고 있지 않는다. 황해 서쪽에는 현존하는 고대 지명이 남북한에는 없다면 장보고의 완도는 어느 완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

장보고에 대한 기록이 있는 곳은 『唐書(당 서)』東夷傳(동 이 전) 신라와 『樊川文集』이 있고 『삼국사』에 있으나 ‘淸海(청 해)今(금)之莞島’ ‘淸海(청 해)今(금)謂之莞島’라고 기록된 것은 오직 『삼국사 』밖에 없다. 이로 인하여 전라남도 완도를 장보고의 청해진으로 보는 결정적인 자료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宋(송)나라 때 만든 『우적도』와 거의 일치하는 현지도 그리고 支那(지 나)史 東夷傳(동 이 전) 및 『당서』동이전이 있는 이상 사로신라 인물인 장보고는 『우적도』내로 밝혀 질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

김부식 등이 高麗(고 리)땅에는 소문도 기록도 없었다고 하면서 전남 완도가 청해진이라 하여 ‘淸海(청 해)今(금)之莞島’를 삽입하겠는가 ?

우리는 두 곳에 완도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장보고 기록을 재검토해야 할 것이다.

오직 이곳밖에 없는 今(금) 즉 현재의 지명은 언제 삽입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전체를 보는 안목으로 청해진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산동성에도 WANDO 즉 완도 발음의 灣島가 있다.

전라남도에도 완도가 있는가 하면 같은 발음의 완도가 산동성에도 있다. 그러나 발음은 완도이지만 기록은 산동성은 WANDO 즉 만도로 쓰고 전남은 완도로 쓰고 있다. 현재 문자는 다르지만 발음은 같다.

宋(송)나라에서 만든 『우적도』에서 遼(요)로 나타난 지명이 대만정부에서는 遼(요)로 표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左權으로 표기하여 문자는 다르지만 지역은 같으니 『우적도』의 요로 볼 수 있다.

또 『우적도』에는 珍播(진 파)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지도에서는 荔波로 기록되어 [한서]에서 「罷(파)儋耳(담 이)眞番郡(진 파 군) 儋耳(담 이)本南越地(본 남 월 지)」라는 기록으로써 우적도에 南越(남 월)과 珍播(진 파)가 동일 지역이니 이곳이 漢나라 때는 眞番(진 파)으로 했던 것으로 보여 문자는 달라도 지역이 같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완도도 마찬가지로 세월의 흐름으로 인하여 문자를 달리 기록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발음이 같은 완도가 산동省에 있는데 그 주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동성 완도의 주위를 보면 다음과 같은 지명이 있다.

동쪽에는 淸海鎭(청 해 진)과 비슷한 발음이고 옛 군사주둔지로 보이는 정해위(靖海衛)가 있다.

동북쪽에는 장보고가 세웠다는 문등현 적산원이 있다.

북쪽에는 발해가 평정하려 했던 등주가 있다.

서쪽에는 百濟(맥 제) 지명으로 城陽(성 양) 諸城(제 정) 淄(치) 靑(청) 兩城(양 성) 博山 大山(태 산) 黃山(황 산) 平原(평 원 ) 淸河(청 하) 石門(석 문) 東明 白馬河 晉城(진 성) 高平(고 평) 周留城(주 류 성)이 있고 신라 지명으로 石門(석 문) 石城(석 성) 磁(자) 가 있다.

九黎(구 리)시대의 치우天子(천 자)塚이 있는 東平(동 평)과 치우천자 부인능의 鉅野가 있다. 또 김유신 선조 少昊(소 호)金天(금 천)씨 능이 곡부에 있다. 또 『부여융묘비』가 있는 개봉에 있다.

서남쪽으로 제2조선 韓(한)의 箕準(기 준)이 위만에게 쫓겨난 지명 海(해)가 있고 조선의 기자가 살던 西華(서 화)와 묘가 있는 蒙城(몽 성)이 있으며 신라의 지명 項城(항 성) 泗 漣水(연 수)가 있다. 위와 같이 산동성 완도는 우리민족 歷史(역 사) 기록에 있는 지명과 유적이 있으나 전남 완도의 북쪽에는 史書(사 서)와 일치하는 지명이나 유적이 없으니 어떤 완도가 장보고 기록의 완도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겠는가?

②『삼국사』지리에는 진도는 있어도 완도는 없고 대신 助音島는 있다.

淸海(청 해)는 海路의 要衝地라고 하였다. 요충지라면 그 이름이 오랫동안 전수될 수 있는데 『삼국사』 지리에는 陽武郡에 耽津縣이 있고 무안군에 진도현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완도는 없다. 청해진이 해로의 요충지이고 현재의 완도라면 본기에 수록하고 지리지에 기록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본기에 今(금)之莞島라고 했음에도 지리지에는 助音島라 하였으니 본기와 다른 이유는 무엇이며 왜 하나의 명칭으로 되어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으며 이는 분명이 후대에 하나는 삽입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삼국사절요』에도 청해진이 완도라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③ 『삼국유사』에도 청해진은 있으나 완도 기록은 없다.

『삼국유사』에서는 장보고의 이름이 궁파로 기록되고 청해진이 있으나 청해진이 완도라는 기록은 없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쓸 당시의 『삼국사』에 ‘淸海(청 해)今(금)之莞島’라는 기록이 있었다면 그것을 인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도라는 기록을 하지 않은 것은 『삼국사』추기로 된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기록 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④ 『삼국사』 이후 완도가 기록된 문헌은 『高麗(고 리)史』이다.

『삼국사』 이후 발행된 정인지의 『高麗(고 리)史』에 완도가 있다.

『정해위(靖海衛)』탐진에는 완도가 없으나 『高麗(고 리)史』권57에 장흥군 탐진현에 완도가 있다.

『高麗(고 리)史』는 1451년에 편찬되었는데 『삼국사』는 1394년 金居斗에 의해서 복간되었으나 현존하지 않고 지금 완도가 첨부되어 현존하는 것은 1512년 경주에서 복간된 정덕본이다. 김부식이 수록하지 않았어도 복간하면서 삽입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⑤ 현존 『당서』도 1739년 교간된것이고 현존 『三國史記(삼 국 사 기)』는 1512년 복간된 것이다.

『삼국사』본기에서 ‘今(금)之莞島’라 하여 현재(今(금))를 표시한 지명이 많이 있다면 의심을 받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본기 중 유일하게 현재를 나타내는 「淸海(청 해)今(금)之莞島」라는 것이 이곳에만 있으니 의심을 둘 수밖에 없다.

신라본기를 보면 삽입구로 볼 수도 있으나 열전을 보면 교간될 때 기록된 것으로도 볼 수도 있다.

⑥ 삼별초 기록에서 진도는 있어도 완도 명칭은 등장하지 않는다.

청해진은 海路의 요충지라 하였는데 남해안에서 요충지였다면 삼별초 기록때 완도라는 명칭은 없고 진도 명칭만이 등장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청해진이 신라때 폐쇄되었다 하여도 해로의 요충지라면 진은 없어져도 활동이 정지되지는 않는 것이 아닐까 ?

전라남도 완도에서는 삼별초 장군 송징이 완도에 온 것으로 하여 사당에 전하여지고 있으나 高麗(고 리)시대 조정에서는 반역으로 취급된 삼별초장군의 사당을 만들고 전하게 하겠는가 ?

첫째 『高麗(고 리)史』지리지에 완도 기록이 있고, 삼별초 관계 기록에 진도는 있으나 완도는 없다.

『高麗(고 리)史』 제26권 27권 원종때의 기록에서 완도라는 지명이 등장하지 않는다.

1270년(경오11년) 8월 병술일 삼별초 진도에 도착하다.

1271년 1월 계사일 진도

3월 계사일 진도는 해상수로의 목구멍과 같은 요 충 지점이다.

4월 임자일 진도

1272년 5월 삼별초가 耽津縣을 불사르다.

완도는 전라남도에서 진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그럼에도 그 유명했던 청해진이라면 등장했음도 한 완도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淸海(청 해)今(금)之莞島’의 현장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

둘째 진도에 도착한 삼별초군은 당시 高麗(고 리)조정에서는 역적의 신분이었다. 그런데 삼별초군의 하나인 송징 사당을 만들 수 있겠는가 ?

1449년 완도는 거주 금지령이 있었고 1592년의 임진일본란 때도 완도지역이 전화에 휩싸였는데 있다고 사당이 있다 하여도 사당이 무사했겠는가 ?

현재의 사당은 근세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삼별초 사건이 우국충정으로 연구가 변화된 것도 근세의 일이 아니겠는가 ? 역적으로 분류되면 그에 대한 추모는 사실상 어려운 것이 왕도정치 시대였는데 삼별초군의 송징이 민간신앙으로 전하여 졌다는 것이 가능한지 다시 한번 검토를 해보아야 할 것이다.

⑦ 전라도 완도가 청해진이라면 1만명 군사 주둔 사령부가 있었던 흔적이 있는가?

장보고는 지금으로 보면 해군을 거느린 장군이었다. 828년 군사 1만명으로 청해진을 설치했다고 하였다.

임진일본란 때 의병이 2만2600여명이고 조선군이 4배 정도 있다고 하면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할 때 밝혔다고 한다 .

신라 때 1만의 군사라면 대단한 군사가 아니겠는가. 과대 기록으로 보는 사람도 있으나 838년 정년에게 5천명의 군사를 주어 김양을 돕게 했으니 1만의 군사가 사실이 아니겠는가 ?

무엇보다도 1만의 군사 주둔지가 되려면 그 만한 자연 조건이 맞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육군은 땅만 있으면 되지만 해군은 전함이 정박할 항구가 있어야 하며 해류와 태풍에도 무사할 수 있는 항구가 있어야 한다. 또 그 많은 병사들의 보급품이 원활해야 되는데 그것이 완도에서 가능한가 ? 자급자족의 형태를 갖추려면 그에 걸맞은 농원이 있어야 하고 보급을 받는다 하여도 그것을 간직할 시설이 있어야 한다.

군사가 1만 명이라면 군사뿐만 아니라 민가까지 합하여 있을 것이 아닌가. 12년간의 군사주둔지이고 사령부였다면 완도에 그만한 유적지가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 단기간만 사용하던 기지로 보기는 어렵다.

지금 완도에는 1만의 군사 주둔지도 사령부의 흔적도 보급창의 흔적도 합당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 없지 않은가 ?

⑧ 청해진(淸海鎭)은 장보고 군사 주둔지 이전에 신라에서 四瀆祭를 지내던 곳 중의 하나였다.

우리가 淸海鎭(청 해 진)하면 장보고의 군사 주둔지로 만 살펴온게 사실이다. 또 문성왕 13년 2월 淸海鎭(청 해 진)을 파하고 그곳 백성들을 碧骨郡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어 아주 淸海鎭(청 해 진)이 황무지로 인식되어 지리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 할 수 있게 하고 있다. 그러나 장보고의 淸海鎭(청 해 진)이 군사적인 곳이었다면 신라에 있어서는 청해진은 四瀆祭를 지내던 곳 중의 하나였으니 예사 곳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군사적인 것은 상쇄되어도 제사를 지내는 것조차 폐지하겠는가 또 제사지내는 것을 폐지하였으면 그것을 기록하지 않았겠는가 ?

‘四瀆祭를 지내는 곳이 동쪽으로는 吐只河 남쪽으로는 黃山(황 산)河 서쪽으로는 웅천하 북쪽으로는 한산하 그리고 俗離岳 推心 上助音居西 烏西岳 北兄山城 淸海鎭(청 해 진)에서 지냈다.’고 하여 淸海鎭(청 해 진)이 제사를 지내는 곳이다.

신라조정에서 지내는 제사의 풍습이 남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청해진이 사독제를 지내던 곳이므로 신라의 본래 관경(영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百濟(맥 제)땅으로 추정되어 온 지금의 완도에 제사를 지내는 신라의 신성한 곳이 였을까 ? 만약 완도가 淸海鎭(청 해 진)이라면 군사적인 유적지 뿐만 아니라 祭를 지낸 유적지나 관습도 발견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

지금 金堤에는 삼국시대 만들었다는 “벽골제”가 있다고 하는데 이것이 벽골제라면 이는 330년 신라 흘해이사금때 만들었으니 그 남쪽에 있는 완도가 百濟(맥 제)땅으로 있지 아니하고 일찍부터 신라의 제사 지낸는 곳으로 보아도 무리는 아니리라. 그러나 曹州 남쪽 근처에 金堤集이 있다. 동쪽에 동평과 거야가 있고 서쪽에 동명이 있는데 모두 요의 동쪽에 있다.

어찌되었던 청해진은 신라땅으로서 제사를 지내는 곳이니 장보고가 설치하기 시작한 지명은 아니니 이의 위치를 분명히 하여야 한다.

6). 청해진은 지명이 아니라 지역 명칭으로 볼 수 있다.

청해진을 우리는 단순히 지명으로만 알고 있는데 지명 일수도 있지만 지역으로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제4조선시대 이순신의 직책에 붙여진 이름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또는 경상좌수영 등에서 전라 경상 등은 지명이 아니라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다. 전라는 전주와 나주를 합한 전라도의 준말이고 경상은 경주와 상주를 합한 경상도의 준말이므로 지역을 나타내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淸海鎭(청 해 진)의 淸海(청 해)도 지역 명칭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해안을 지키는 鎭이니 淸海(청 해)라는 발음이 나올 수 있는 곳은 우적도에 의하면 산동省 대표적 명칭이 靑이고 강소省 대표 지명이 海(해)이니 산동省과 강소省 해안을 지키는 鎭의 명칭을 靑海로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靑海는 淸海(청 해)로 변경하여 쓸 수도 있다. 지명으로만 보지 말고 지역으로 보면서 연구를 행하여 청해진의 위치를 밝혀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임혜상이 쓴 『중국민족사』에서도 秦(진)이전에 東夷(동 이)는 산동省 강소省 안휘省 等省에 살았다고 하였는데 그 후예가 멸종하지 않았으니 이 지역 명칭으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7).文登縣 남쪽 정해위(靖海衛)를 장보고의 淸海鎭(청 해 진)으로 볼 수도 있다.

청해진을 “淸海(청 해)今(금)之莞島”에 의해서 전라남도 완도로 가정하여 왔는데 청해진의 기록과 일치성을 보이는 곳은 전남 완도가 아니라 산동성 완도에 가깝다 할 것이다. 그러나 완도보다는 동북쪽에 있는 정해위가 청해진에 가깝지 않은가 하는 점이다.

정해위(靖海衛)를 청해진(淸海鎭)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첫째 衛나 鎭은 군사적인 명칭이다.

둘째 정해위(靖海衛)의 정해(靖海)가 淸海鎭(청 해 진)의 淸海(청 해)와 비슷하다.

셋째 정해위(靖海衛) 북쪽에는 적산원 흔적이 있고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전답이 있다고 한다.

넷째 정해위(靖海衛) 서쪽에 百濟(맥 제) 지명이 있다.

다섯째 정해위(靖海衛) 서쪽에 김유신 전쟁 지명이 있다.

여섯째 정해위(靖海衛) 서쪽에 조선 九黎(구 리)관계 지명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정해위(靖海衛)가 전남의 완도보다도 산동성의 완도가 좀 더 장보고의 청해진 조건에 합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남북한의 완도가 청해진으로 규정한다 해도 『삼국사』에서 김부식 이전에는 장보고나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나 소문이 高麗(고 리)땅에는 없었다고 한 기록이 있으며 송나라 때 제작된 『우적도』와 『송본지리지장도』가 있고 『삼국지』 『후한서』동이전과 『구당서』『신당서』동이전이 있고 중국지도가 있는 한 장보고 위치는 『우적도』의 범위 즉 현 중국 동해안쪽을 벗어 날 수가 없다는 점이다 우겨서 되는 일이 아님을 인식해야 진정한 장보고 연구가 이루어 질 것이다. 즉 徐州(서 주)(안휘성)–武寧(무 령)(강서성)–청해진(정해위:산동성),연수(강소성)–진해(절강성:무주인에게 피살) 같이 장보고와 정연의 위치가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8) 장보고 신라는 高句麗(고 구 리) 百濟(맥 제)에서 광복한 신라이고 황해 동쪽 신라는 高句麗(고 구 리)에서 독립한 신라이다.

(광복신라가 황해 서쪽에 있어도 好太王高句麗(고 구 리) 일부의 후예일 뿐이다. * 편의상 황해 서쪽 신라를 西신라로,황해 동쪽 신라를 東신라로 부르기로 하였다. )

지금까지 宋(송)나라 때의 『禹迹圖(우 적 도)』와 『宋本地理指掌圖(송 본 지 리 지 장 도)』와 현 동북 아시아지도를 보면서 중국『25史』東夷傳(동 이 전) 및 『三國史記(삼 국 사 기)』를 검토한바 장보고가 황해 동쪽 동신라에서 황해 서쪽으로 진출하여 ‘新羅坊(신 라 방)’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황해 서쪽에는 서화 항성의 바로 동쪽에 치우天子(천 자) 단군(天帝(천 제)) 기자 箕準(기 준) 소호금천씨 등을 계승한 사로신라가 江淮(강 회) 즉 泗 盧 또는 寧 海지역에 있었다는 해석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결국 장보고 시절 황해 서쪽에 사로신라가 있고 또 황해 동쪽에는 동 신라가 있었으며 장보고는 사로신라 인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황해 서쪽 江淮(강 회) 즉 泗盧(사 로)지역에 있는 新羅와 황해 동쪽에 있는 신라가 전혀 다른 민족인가 아니면 같은 민족인가 하는 큰 숙제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唐書(당 서)』東夷傳(동 이 전) 신라는『北史(북 사)』신라의 계승 국가인데 『北史(북 사)』에서 신라는 高句麗(고 구 리) 百濟(맥 제)에서 광복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기록이 있으니 「高麗(고 리)百濟(맥 제)之屬」「其王本百濟(맥 제)人」「初附庸于百濟(맥 제)」등이라 하였고 『광개토태왕碑(비)』에도 新羅(신 라) 百濟(맥 제)가 高句麗(고 구 리)에 속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황해 서쪽 신라인들을 高句麗(고 구 리)人으로 기록한 곳이 있으니 바로 최치원에 대하여 우리는 신라인이라고 하지만 『唐書(당 서)』의藝文志에는 高麗(고 리)人(高句麗(고 구 리)人)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高麗(고 리)가 망하고 제4조선이 건국한 이후에도 高麗(고 리)인 즉 COREE로 불리는 것과 같이 광복한 황해 西쪽 신라를 高句麗(고 구 리)의 연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라 할것이다.

한편 『진흥왕碑(비)』가 있는 남북한의 신라는 高句麗(고 구 리)로부터 독립하였음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 『삼국사』에 의하면 진흥왕의 조부가 干(간)에서 王(왕)으로 직책을 변경하였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경상도 경주의 황남대총에서 好太王 연호인 永樂이 새겨진 잔이 나왔고, 干(간)에서 王(왕)으로 변경한지 58년후에 건립된 창녕 『진흥왕碑(비)』에는 호태왕 이전부터 高句麗(고 구 리)땅인 碑利城(비 리 성)이, 干(간)에서 王(왕)으로 변경한 왕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58년전에 高句麗(고 구 리)에서 독립했다는 것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리(高句麗) 지역의 지도자 칭호를 『삼국사』에 간(干), 『당서』에는 한(汗), 『호태왕 비(碑)』에는 한(韓)이라고 하여 간(干)은 고구리(高句麗)지역의 통치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결국 동(東)신라는 전(前)에 신라가 아닌 고구려간(高句麗干)지역으로써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연방국의 일부(州 ?)로 있다가 독립을 했다는 뜻으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황해 서쪽에 있는 장보고의 사로신라나 황해 동쪽에 있는 (東)신라가 모두 고구리 민족(高句麗民)의 일부이니 그 후예는 당연히 하나의 민족인 것이다. 이는 구리(九黎) 고조선(古朝鮮) 시대에도 西華(서 화) 項城(항 성)에서 경상도 경주까지 하나의 민족이었음을 입증하여 주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고 흑도(黑陶)와 함께 하나의 민족임을 입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글 | 오재성(삼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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