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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이 본 고조선의 문자

고조선의 역사성은 배제됐다

조선은 어떤 관점에서 문자를 보았을까? 미수(眉叟) 허목(許穆)은 기언(제6권) 고문(古文)편에 더욱 상세하게 서술했다. 그러나 고조선의 역사성은 배제되어 있다.

“창힐(蒼顔)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서 조적서(鳥跡書)를 만들고, 전욱(顓頊)이 과두문자(科斗文字)를 만들었다. 주(周)나라 때 매씨(媒氏)가 분서(墳書)를 만들고, 백씨(伯氏)가 종정문(鍾鼎文)을 토대로 수서(殳書)를 만들었으며, 또 기자(奇字)라는 고문이 있는데 출처를 모르겠고, 사주(史籒)가 고문을 변형하여 대전(大篆) 15편을 만들었으니 주서(籒書)이다. 황제 헌원씨 이후로 기린서(麒麟書), 봉서(鳳書), 귀서(龜書), 용서(龍書), 가화서(嘉禾書), 운서(雲書), 조(鳥書), 성문서(星文書) 등은 다만 상서(祥瑞)를 기록한 것일 뿐이어서 문자로 사용할 수가 없다.

진(秦)나라 때에는 이사(李斯)가 소전(小篆)을 만들고 정막(程邈)이 예서(書)를 만들었는데, 예서가 생겨나자 고문이 사용되지 않게 됐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이 고문을 그리워하여 한당(漢唐) 이후 열네 가지 서체가 만들어졌는데, 지영(芝英)·비백(飛帛)·금착(金錯)·옥저(玉筋) 등과 같은 유가 일곱 가지이고, 조희(曹喜)·유덕숭(劉德昇)·왕희지(王羲之)·위관(衛瓘)·위탄(韋誕)·사유(史游) 등이 또 일곱 가지 서체를 만들었다.

그렇지만 모두 고문이 아니었으니, 진한(秦漢) 이후로 풍기가 천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아, 태호복희씨(太昊伏羲氏)의 고아하고 예스러운 기운이 진나라 때부터 없어져 한나라를 거치면서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상고 시대에 창힐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서 처음으로 문자를 제작하여 조적서를 만들고, 염제 신농씨(炎帝神農氏)가 수서(穗書)를, 황제씨가 운서(雲書)를, 전욱씨가 과두문자를, 무광(務光)이 해서(薤書)를 만들었으며, 또 기자라는 고문이 있었으나 너무 오래된 서체라 알기가 어려웠는데 한나라 때 양웅이 기자를 알아보았다.

봉서, 귀서, 용서의 문자는 모두 고문을 토대로 하여 상서를 기록한 것이고, 주나라 때에는 매씨가 분서를, 백씨가 홀기문(笏記文)인 수서를 만들었는데, 또한 고인의 종정(鍾鼎)에 있는 고문을 기초로 한 것이다. 이 종정문이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는 지는 알 수 없으나 삼대(三代)가 모두 사용했다. 사일(史佚)이 조서를, 사성(司星)인 자위(子韋)가 성서를, 공자(孔子)의 제자가 기린서를 만들었는데 모두 귀서, 용서와 같은 고문을 토대로 만들었고, 사주가 고문을 변형하여 대전 15편을 지었으니 주서라 한다.

진나라 때에는 고문을 없애고 각부문자(刻符文字) 등 팔체(八體)를 만들었으며, 승상 이사(李斯)가 소전체(小篆体)을 만들었다. 시황제(始皇帝)가 형석(衡石)으로 헤아릴 만큼 문서가 많아지자, 상곡(上谷)사람 왕차중(王仲)이 고문을 변형하여 서체를 만들어서 예인(隷人, 하급관리)들에게 보조용으로 쓰게 하였는데 이것을 예서라 한다. 혹자는 정막이 이 예서를 만들었는데 그가 도예(徒) 출신이므로 예서라 한다고 했다.

예서가 생겨나자 고문이 사용되지 않게 됐다. 정막이 소전에 수식을 더해 상방전(上方篆)을 만들어 옥새에 사용했고, 왕차중이 예서를 단순하게 고쳐서 팔분문자(八分文字)를 만들었는데 예서를 팔분정도 버리고 소전에서 팔분 정도를 본떴다고 한다.

진나라 호무경(胡毋敬)이 대전을 근거하여 소전을 변형했고, 한나라 효무제(孝武帝) 때 감천(甘泉)에서 영지가 나오자 진준(陳遵)에게 지영전(芝英篆)을 만들게 했다. 조희가 수로전(垂露篆)을 만들고 또 현침전(懸針篆)을 만들어 5경(經)의 편목(篇目)을 썼다. 당(唐)나라 때 벽락전(碧落篆)이 있었는데 소전과 유사했고, 이양빙(李陽氷)이 옥저전(玉筋篆)을 잘 썼는데 후세에도 계속 사용했다.

노(魯)나라 추호(秋胡)의 처가 누에를 보고서 조충서(彫蟲書)를 만들었다. 한나라 때는 곡두전(鵠頭篆)이 있었으며, 위탄이 전도전(翦刀篆)을 만들었는데 사유가 그것을 극도로 발전시켰다. 유덕숭이 별자리 모양을 관찰하여 영락전(纓絡篆)을 만들고, 채옹(蔡邕)이 어떤 사람이 흰 흙을 비로 쓸어 글을 쓰는 것을 보고서 비백문자(飛帛文字)를 만들었으며, 위탄이 또 옛 동전에 사용한 서체인 금착서(金錯書)를 만들었다. 진(晉)나라 위관은 삼대에 걸쳐 글씨를 전공하여 유엽서(柳葉書)를 만들고, 왕희지는 자신이 쓴 비자(飛字)가 용의 발톱과 닮았다 하여 용조서(龍爪書)를 만들었다.”고 했다.

이어 허목(許穆)은 “새 발자국을 보고 만든 조적 고문(鳥跡古文)이 역대 문자의 시조가 된다”라 하고, 귀룡서(龜龍書), 인서(麟書), 봉서(鳳書), 아름다운 벼를 보고 만든 수서(穗書), 상서로운 구름을 보고 만든 운서(雲書), 사성(司星)이 만든 성서(星書)가 있었다고 썼으나, <왕손(王孫) 낭선군(朗善君)의 금석문서첩(金石文書貼) 서문〉에서는 “옛날에 태호(太昊) 복희씨(伏羲氏)가 처음 문자(文字)를 만들었다”고 썼다.

이로 보면 숙종대 까지 상고(上古)의 여러 고문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의 신전(神篆)에 대한 기록은 두려움이었을까?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허훈(許薰, 1836~1907)이 방산집(山集)에 각각 신전, 구루신전(岣嶁神篆)이라 쓴 단 두

건의 기록뿐이다.

전문(篆文)은 단군왕검 때 이미 사용됐다

허목은 현종 2년(1661)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文)를 썼다. 동해송(東海頌)을 짓고 독특한 전서체로 써서 비를 세웠다. 이 글자체는 선조의 손자인 이우(李俁, 1637~1693)59)가 연경(燕京)에서 호남성(湖南省) 형산(衡山)의 신우비(神禹碑) 탁본 77字을 얻어와 허목에 전했고, 허목은 48자를 골라 이 비를 세웠다. 형산의 이 비는 구루비(岣嶁碑), 우왕비(禹王碑), 우비(禹碑)라 불리며, 우(虞) 사공(司空) 우(禹)의 치수기념공덕비로 알려져 있다. 이 공덕비가 세워진 배경을 살펴보자.

‘단군세기에 BC 2267 년 “단제가 태자 부루(扶婁)를 보내어 도산(塗山)에서 사공(司空) 우(虞)와 더불어 만나게 했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다[甲戌六十七年 帝 遣太子扶婁 與虞 司空 會于塗山 太子 傳五行治水之法]”고 했다. 태백일사 번한세가(상)

에는 위 내용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를 요약한다.

갑술년에 태자 부루가 명을 받들어 도산에 사신으로 가 회합을 주관하는 자리에서 사공에게 치수와 관련, 천자국의 전문(篆文)으로 된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 황구종(皇矩倧) 세 보물을 주었으며, 우는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하고 받아 들었다. “태자 부루로 부터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받았으니 대개 오행치수의 요결이었다.”[遂以王土篆文 天符王印… 於是 虞司空 三六九拜 而進口 勤行 天帝子之命 佐我虞舜 開泰之政 以報三神 允悅之至焉. 自太子扶婁 受金簡玉牒 蓋五行治水之 要訣也]

위 문안에서 천부왕인에 새긴 문자가 전문(篆文)이다. BC 221년 진(秦)나라 이사(李斯)가 문자를 통일, 전문을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사실(史實) 기록은 2046년 전 단군왕검 때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음이 확인됐다. 이사가 전서(篆書)를 써서 문자를 통일했다는 기록은 왜곡됐고, “단군조선의 문자를 차용한 것이다. BC 477년 호북성(湖北省)에 있었던 증(曾)나라 시기의 우비가 현존하는 바, 형산의 비문과 닮아 있다.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금간옥첩이 “창수사자(蒼水使者)가 夏 임금에게 주신 치수의 비결서”라고 기록되어 있다. 『오월춘추』는 동한(東漢)의 조엽(趙曄, 25~56))이 쓴 책이다. 이와 관련된 기록은 묵자, 역대 신선통감, 웅제시주,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동사강목 등에서 확인된다. 춘추필법의 악습으로 써진 오월춘추는 부루 태자를 창수사자로 둔갑시켜 은인인 부루태자의 실체를 감추었다. 또한 창수사자가 우의 꿈에 나타나 비법을 알려 준 것으로 기록하여 우가 자신의 현몽으로 국난을 해결한 것으로 왜곡시켰다. 또한 신우비(神禹碑)라 하여 우를 신격화했다. 복합 명칭인 구루비(岣嶁碑)의 ‘구루’는 ‘부루’ 태자의 명칭 변형으로 단군조선의 흔적 지우기 일환으로 풀이된다.

허목은 『기언』(6권) 고문(古文)편 전문에서 ‘창힐(蒼頡)이 새의 발자국을 보고서 조적서(鳥跡書)를 만들고’라 썼다. 마한세가(馬韓世家 上)의 기록을 살펴보자. “사람의 문물은 일찍이 발달했고 오곡이 풍성했다. 이때 자부선생(紫夫先生)이 신에게 일곱 번 제사지내는 역법(曆法)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지어 임금께 올렸다. 임금이 이를 가상히 여기고 삼청궁(三淸宮)을 지어 살게 하였다. 공공(共工) 헌원(軒轅) 창힐(倉詰) 대요(大搖)의 무리들이 여기에서 배웠다[人文 早已發達 五穀 豊熟 適以是時 紫府先生 造七回祭神之曆 進三皇內文於天陸 天王嘉之 使建三清宮而居之 共工 軒轅 倉頡 大撓之徒 皆來學焉, 於是 作柶戲 以演桓易 盖神誌赫德所記 天符之遺意也].

중국의 시조 헌원을 비롯, 전설상 한자의 창조자로 일컬어지는 창힐은 자부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은 제자였음을 알 수 있다. 자부선생은 태호복희, 발귀리 선인의 학문을 이어 받았고, 上古의 문자학이 이들로 인해 체계화되어 전해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허목은 붕당(朋黨) 정치의 시대적 혼란 속에서 필화(筆禍)를 의식했을까? 단군조선의 역사적 사실은 간과했다. 순자(筍子)는 해폐편(解蔽篇)에서 “글을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만 창힐 만이 홀로 그 글을 전한 사람이다”라 극찬, 고조선 흔적지우기에 힘을 보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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