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ure of 관리자
관리자

진서 발전계도(眞書發展系圖)

진서(眞書)는 참된 글자이다. 예부터 한자를 진서라 불러 왔다. 인류창조의 역사와 함께 말씀과 무늬 글자는 한자로 발전되어 왔다. 마음의 생각이 입으로 통해 나오는 소리, 즉 말씀이 언(言)이며, 무늬 채색 얼룩 말씀을 그린 조각이 문(文)이다. 이를 언문(言文)이라 한다.

BC 7197년 한인(桓因) 시대로부터 시작, BC 3897년 문자(文字) 발전과정과 운서(韻書) 변천내용을 보면 어제신전(御製神篆)으로 한웅천황(桓雄天皇)의 명에 의하여 인류 최초로 문자가 발명되었다. 신교 문화를 깨우친 후 이를 다시 풀어 『음부경(陰符經)』을 펴냈다. 이 책은 원래 3편(三篇)의 녹서(鹿書)로 썼다. 그러나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다만 후세 사람들이 주석을 단 『신선음부설(神仙陰符說)』이 남아 있다.

BC 3500년 경 태고문자(太古文字)인 신전(神篆) 용서(龍書)가 배달국(倍達國) 시대에 팔괘(八卦)를 더욱 발전시켜 선과 그림문자 병행시대가 된다.

‘진서발전계도’는 고조선의 문자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오랜 시간의 결과물이다.

훈고학(訓故學)

‘진서발전계도’에서 보듯, 한 시대의 문자가 갖는 의미는 실로 크다 하겠다. 훈고학은 고전의 해석상 무엇보다 기본적인 학문이라고 할수 있다. 석고(釋誥)라고도 한다. 훈(訓)’은 자구나 언어가 가리키는 의의를 설명한다, ‘고(誥)’는 고어(古語)를 현재의 언어 문자로 바꾸어 풀이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진(秦)나라 이사(李斯, BC 284~BC 208)가 소전(小篆)를 만들어 문자통일(文字統一)를 꾀했다. 그러나 전문(文)은 단군왕검 때에 이미 써왔음이 밝혀졌다. 이사는 이를 인용하여 문자를 단순화시키는 과정에서 본래 형태(形態), 즉 자원(字源)을 잃어 오류(誤診)를 범할 가능성이 높다. 설문(說文)의 기본도 이에 준한 것으로 한자연구에 유의해야 할 부분으로 본다. 또한 이사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기획하고 주도했다. 이로인해 고조선 문명도 큰 피해를 입은 것으로 파악된다.

한(漢)나라가 복생(伏生)을 통해 상서대전(尙書大全)를 만들어 문자복원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동이(東夷)의 역사까지 날조(造)한 사례가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음도 조심스럽게 다룰 일이다.

명(明) 말~청(淸) 초에 일어난 실증적(實證的) 고전 연구의 학풍 또는 방법으로 일기 시작한 것이 고증학(考證學)이다. 글자와 구절의 음과 뜻(訓)을 밝히되 고서(古書)를 두루 참고하여 확실한 실증적 귀납적 방법을 택하여, 종래의 경서 연구 방법을 혁신하였다.

몇 가지 실례를 살펴보자.

‘경(扁)’은 빗장 경이나, ‘밝을 경’으로 풀이해야 한다. BC 2267년 부루태자는 명산을 골라 소도를 세우고, 세계 최초의 교육기관인 경당(局堂)을 세웠다. 단군세기의 기록이다. 국자들에게 육예(六藝)를 연마시켰다. 빗장을 걸고 교육을 시킨 것이 아닌 밝고, 기쁜 배움의 터전이었다.

국자랑들은 검은 옷을 입었기에 조의선인이라 불렀다.

‘유(儒)’는 선비를 뜻한다. 운서(韻書)에서는 ‘석덕(碩德)’이라고 훈고하였다. 그러나 글자가 만들어진 고대에는 ‘유(儒)’는 장례사를 일컫는 말이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는 ‘儒, 柔也, 術士之稱’이라 해석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술사가 바로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이었다. 춘추시대에 들면서 ‘유(儒)’는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발전하게 된다.

BC 1833년 유위자(有爲子) 선사는 천년 후, 광유(狂儒)가 널리 차서 그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난(亂)’은 어지러울 난이다. ‘주무왕(周武王)’이 말하기를, “나에게는 난세(亂世)의 충신(忠臣)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목숨 바쳐 충성을 다한 신하(臣下)가 열 명이나 있다”고 자랑했다. 다스릴 난으로 써야 한다.

‘대중(大倧)과 대학(太學)’의 ‘종(倧)’은 상고신인(上古神人)이다. BC1891년 유위자(有爲子) 선사가 대종(大倧), 즉 상고(上古)의 큰 신인(神人) 한인‧한웅·한검의 가르침(敎)을 의역하여 한(漢)나라 동중서(董仲舒)가 상고신인의 큰 학문의 의미를 새겨 태학이라 이름한 것으로 본다.

‘사방신수(四方神獸)’는 한나라 이전 암각화에서 구미호, 백토, 삼족오, 두꺼비로 나온다. 단군조선은 그렇게 써 왔다. 한(漢) 이후 풍수이론에서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로 바꾸었다. 한나라는 단군조선의 흔적을 지웠다. 풍수가들의 역사의식이 아쉬운 부분이다.

‘음’은 ‘음란하다 간사하다’라는 말로 써왔다. 위서열전(魏書列傳)에 “고구려의 풍속은 음란하고 노래와 춤을…”이라 풀이하고 있으나, ‘음(淫)’은 ‘윤택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고구려의 풍속은 윤택하고(풍족하여) 노래와 춤을…”이라는 표현이 맞다[高句麗/其俗淫, 好歌舞, 夜則男女 聚而戲, 無貴賤之節, 然潔淨自喜, 其王好治宮室],

단군시대는 원시적(原始的) 문화가 없었다

*檀君之世 鴻慶未知 歷千有餘年至 箕子東封天荒始破不及於 漢水以南 歷

九百餘年至 三韓地紀盡闢為三國之幅員 歷千有餘年聖朝建極人文始闡”

“단군 시대는 원시적이어서 문화가 개척되지 못했고 천백여 년을 지나서 기자가 동쪽 지방에 봉함을 받게 되면서 암흑이 걷혀졌으나, 그것도 한강 이남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9백여 년을 지나 삼한(三韓) 시대에 이르러 이 지역의 경계선이 모두 정해져 삼국의 영토가 정해졌고, 또 천여 년을 지나 우리 왕조가 창건되면서 문화가 바로 열렸다.” 이익(李瀷, 1681∼1763)65)이 성호사설(星湖傻說) 천지문(天地門)에 기록한 글이다. 여말선초(麗末鮮初) 조선 개국의 당위성을 위해 箕子를 끌어들인 추종자들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했다.

“한강 이남까지에는 미치지 못하였다”는 성호의 주장에 대해 다산(茶山)은 그의 시문집 14권 ‘강역고(疆域考)의 권단(卷耑)에 제함’에 “열수(洌水) 이북에서 압록강 이남은 한무제(漢武帝) 이후로 항상 한나라 땅이었는데, 열수(水)는 지금 서울에 있는 강이다. 이 열수 이북은 본래 한나라 땅에 속하였고 이남은 삼한(三韓)으로서, 이 강물은 곧 삼한과 한나라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므로 삼한 사람들은 이 열수를 가리켜 ‘한강(漢江)’이라고 한다”66)고 썼다.

성호를 사숙한 다산의 논리를 살펴보자.

“성호 이익의 유고를 처음으로 보았다. 이때 일세의 후학들이 성호 선생의 학문을 조술(祖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다산도 이를 준칙으로 삼았다. 자식이나 조카들에게 항상 말하기를 ‘나의 큰 꿈의 대부분은 성호 선생을 사숙하는 가운데 깨쳐진 것이 많았다”고 『사암선생연보』에 썼다. 이는 당시 시대적 흐름이 진보적이던 성호 학문에 세상의 관심이 쏠리고, 사상계의 방향 또한 남인계의 진보적 주장으로 옮겨져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강역고의 첫머리는 “김부식(金富軾)은 남송 고종(南宋高宗) 때 사람이다.”라고 썼다. 고려 의종(高麗毅宗) 때의 김부식을 고의적, 의도적으로 송나라 사람으로 표현, 조선과 차별화를 꾀했다.

BC 2267년 최초의 교육기관인 경당(堂)의 육예六藝) 수련도장과 신전(神篆), BC 2180년 최초의 역사서 배달유기(倍達留記) 편수 등 찬란한 문명, 광활한 영토를 지녔던 고조선이 원시적이며, 문화가 낙후했다는 일부 시대부들의 시각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정도전(鄭道傳)의 기자조선의 조선, 퇴계의 명본조론(明本朝論), 율곡의 기자실기(箕子實記), 우암의 대명천지 숭명일월(大明天地 崇明日月), 면암의 기봉강산 홍무일월(封封江山 洪武日月) 등 끊임없는 사대(事大)에의 애찬론이 경탄을 자아낸다.

고조선 문명에 대한 흔적 지우기와 억압된 삶의 자유로움을 위해 백성들은 항쟁(抗爭)으로 분기(奮起)를 표출했다. 1811년 평안도 농민전쟁, 1862년 진주농민전쟁, 1894년 동학혁명의 3대 농민 전쟁이다.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