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서와 함께 사라진 잠견지

종이의 이전 기록에서 우리의 것을 찾아보자.

갑골문을 썼던 商(은)나라는 동이 겨레이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고 『고사변(古史辯)』1)에서도 “동이족은 은나라 사람들과 동족이며 그 신화 역시 뿌리가 같다[東夷與殷人同族 其神話亦同源].”라고 했다.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문명권은 한웅시대 태호복희 직후 여와 황제 때 이룩한 것이며, 1천년 후 이집트 문명권이 형성됐다. 이들 문명권에서 쓰여진 헬라어의 상형문자는 우리의 문자와 유사하고, 희브리라는 말은 ‘강을 건너 온 자’라는 어원으로 보아 동이 겨레의 진출에 따른 결과이며 천손민족의 얼이 깊숙이 배어있다.

흔히 종이 역사를 다룰 때마다 105년 후한 때 처음으로 채륜에 의해 제지술이 발명됐다고 하나, 서화사(書畵史)에서 보듯 “양한(兩漢)·삼국(三國)·이왕(二王)·육조(六朝)·수(隋)·당(唐)의 임금과 신하들의 묵적(墨跡)은 고려지로 맨 앞장을 장정한다”고 하였으니, 제지기술 또한 왜곡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는 동이족을 의식, 의도적으로 감추었음이 드러난다.

고구려의 섬세하고 다양한 제지기술은 원료·용도·생산지에 따라 크기·지질·색깔·이름 등을 달리해 다양하게 만들어졌을 것이며, 이규보가 시구절로 그 사실을 알린 것처럼 숱한 전쟁사에서도 고려 때까지 그 맥을 면면히 이어왔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는 244년과 245년 두 차례에 걸쳐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당하면서 대부분의 서책들이 불에 타버렸다. 600년 되던 해 영양왕(11년)은 태학박사(太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

집(新集)》 5권을 만들었음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편에 보인다.

여기서 옛 역사책은 단제께서 신지 고글에게 명하여 편찬한 <배달유기(倍達留記)>를 말하고, 고구려 <유기(留記)> 1백 권이 있었음이 확인되고 있다.

대야발(大野勃)은 단기고사(檀古史) 서문에서 고구려 멸망 당시 소정방과 설인귀가 국서고(國書庫)를 부수고, <단기고사>와 <고구려사〉,<백제사〉를 전부 불태워 버려 13년 동안 자료를 수집, 다시 편집했다고 밝히고 있어 고구려의 <유기> 또한 고구려 멸망과 함께 소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서(國書)의 중요성으로 미루어 이때의 〈유기>는 잠견지로 장정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751년 당나라 때 고구려 출신 고선지(高仙芝, ?~755) 장군이 당나라와 사라센간의 달라스 전투에서 패해 포로가 된 사병들에 의해 국가 기밀인 종이 제작기술이 적국에 전해지고, 전 세계에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종이 제작기술은 페르시아와 이집트를 거쳐 1150년 유럽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스페인에 전달되었다.

이어 프랑스(1189), 독일, 이태리, 벨기에, 영국(1490), 러시아(1566), 노르웨이(1650), 미국(1690) 그리고 캐나다(1803) 등에 전달되어 천손민족의 종이 기술이 전 세계 인쇄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서긍의 찬사로 확인되었던 고려의 수많은 서책의 행방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말선초 당시의 실세였던 정도전(鄭道傳)은 앞장서서 산간 곳곳까지 뒤져 책을 수거하여 불태웠으며, 태종 12년인 1412년에는 역대 사서로 알려진 <신지비사(神誌秘詞)>, 즉 신비집(神秘集)이 괴탄, 불경하다 하여 불태워 졌다.

또한 이색의 문집 일부도 이 범주에 넣어 수거했다.

이 기록은 북부여기(北扶餘記)를 저술한 복애 범세동(范世東)의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에서 확인된다. 이 책 또한 조선 5백 년 동안 금서(禁書)로 묶였다.

조선 건국과 함께 국시가 된 유교의 유입은 통치 강화의 수단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종교 전반에 걸쳐 눈에 거슬리는 것들은 모두 사문난적(斯文亂賊)이란 미명 아래 난도질당했다.

또한 고려를 타파하고, 조선 개국에 앞장 선 유학자 사대부들의 권력 유지책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다.

대표적인 예로 성종조에 서거정(徐居正, 1420~1488)2)이 “삼경(三京)·삼소(三蘇)”라 하여 <신지비사(神誌秘詞)>의 내용을 거론하며 “지금 그런 글을 얻는다면 오히려 불살라야 마땅할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 글”이란 바로 ‘고대사서를 지칭한 것’으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이 분서 기록을 남겨 암시한 내용과 부합된다.

조선조가 개국 초부터 고대사서를 수거한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행방은 어떻게 되었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지금까지 수거된 고대사서는 단 한 권도 보이지 않는다. 단제로부터 이어온 천손민족의 영혼과 생명이 깃든 고사서와 함께 세계 최고의 제지기술로 만들어진 ‘잠견지’의 맥은 대륙 동이의 터를 감추기 위해 이 시점에서 처절하게 끊긴 것으로 파악된다.

한 나라의 역사가 폐기되는 것은 반드시 외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古代史書는 불타고 있는가>3)의 추적 과정에서 보았다. 이 보다는 내적으로 썩고 병든 정권과 이를 탐하는 권력 유지자들의 부화뇌동과 그들의 역사의식 결여에서 무너짐을 보았다.

<고려사〉는 60여 년의 세월을 건너 단종 2년인 1454년 10월 13일 인간(印刊)된다.

한 시대를 오도하기 위해 6대 왕조 60여 년 반복적 개찬 개수 작업을 한 것으로 보아 끊임없는 갈등과 문제 제기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래 글을 눈여겨보자.

검상(檢詳) 이극감(李克堪)4)이 당상(堂上)의 의논을 아뢰기를, “《고려전사(高麗全史)》는 사람들의 시비·득실이 역력히 다 갖추어 기재되었으므로, 황보인(皇甫仁)과 김종서(金宗瑞)가《고려전사(高麗全史)》가 출간되면 사람들이 모두 시비를 알까 두려워하여 다만《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만을 인간(印刊)하여 반사(頒賜)하고, 《고려전사》는 조금 인간하여 다만 내부(內府)에만 간직하였습니다.” 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모두 시비를 알까 두려워’라고 했다. 내부 비치용으로 일부만 간행하여 간직했다고 했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대륙을 다스린 황제국 고려, 송나라 소동파가 고려에 먹힐까 두려워 고려 금수론으로 철저히 배격한 이유들을 철저히 감추고 깔아 뭉개버린 고려의 역대 사서와 잠견지 등 문화적 사실(史實)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음이 자명하다.

고려 멸망 6백여 년, 잠견지의 맥을 잇고자 불철주야 복원작업에 진력하는 종이 연구가들이 있으니, 희미하나마 이제 그 옛 자취를 찾아볼 수 있을까 기대한다.

九. 맺음말

위에서 서술한 바, 문자(文字)가 고조선 이전부터 비롯되었음은 단군세기(檀君世紀), 태백일사(太白逸史) 소도경전 본훈(蘇塗經典本訓)에 “신시(神市)에 녹서(鹿書)가 있었고, 자부(紫府)에 우서(雨書)가 있었으며, 치우(蚩尤)에 화서(花書)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배달국 한웅천황(桓雄天皇)은 신지혁덕(神誌 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鹿圖文:神誌文字)를 창제하였다. BC 3900~3800년 경에 창제된 녹도문은 BC 3000년 경의 이집트 상형문자(象形文字), 수메르 설형문자(楔形文字)보다 월등히 앞선 세계 최초의 문자였다.

부도지(符都誌)에 ‘관(管)은 피리(笛)다’라 했다. 음을 만든다는 말, 즉 소리를 낸다는 말은 만물을 창조한다. 또는 창조된 만물을 천리에 맞춰 수증(修證)한다는 뜻이다. 고대문화를 이해함에 있어 ‘음(音)’은 ‘수(數)’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부도지에서의 은 바로 천지창조자(天地創造者)다. 바이블 창세기에서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하였다. 불교에서 옴(om)은 태초의 소리,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이라 했다. 말은 음으로 이루어졌다. 부도지 2장은 실달성(實達城)과 허달성(虛達城) 그리고 마고성(麻姑城)과 마고(麻姑)가 모두 음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천손민족의 문자 체계에서 音과 말과 문자가 이처럼 이루어 졌다는 사실(史實)은 자랑이요, 긍지다.

또한 이러한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만들어 졌던 한민족의 제지(製紙)기술은 어떠했으며 그 역사적 배경은 어떠했는가? 찬란했던 문명, 그 광활했던 고조선 역사가 신화가 아닌 바른 역사로 매김하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하는 뜻에서 상고사(上古史)를 중심으로 기록을 정리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광복과 민족중흥의 토대가 아닌가 싶다. 앞으로 역사학계에 더 많은 연구 성과가 있기를 기대한다.

  1. 고사변(古史辯)〉은 전7권으로 된 문헌으로, 현대 중국의 사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한 책
  2. 서거정(徐居正)은 조선 문종, 세조, 성종 때의 문신이며 학자이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강중(剛中), 초자는 자원(元), 호는 사가정(四佳亭) 혹은 정정정(亭亭亭)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의 여섯 임금을 섬겼다.
  3. 韓文洙, 강의록.
  4.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덕여(德與), 호는 이봉(二峯)이다. 증좌찬성 이집(李集)의 증손이며, 이지직 손자이다. 증영의정 이인손(李仁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노신(盧信)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경사(經史)를 읽으면 대의를 통하였다고 한다. 도승지와 이조참판,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1461년에는 신숙주와 함께 북정록(北征錄)을 찬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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