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유야 선유야 봉우리를 내 놓아라

한강 속의 풍류의 섬 ‘선유도’

선유봉을 전설로만 묻어 놓을 것인가?

선유도에 봉우리가 두 개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서울을 관통하고 흐르는 강, 지금은 한강으로 통일하고 다만 두 줄기로 나눠서 흘러오는 강을 남한강 북한강으로만 구분하고 두물머리에서 합수해 오면 한강으로 뭉뚱그려 놓았다. 과거엔 강의 이름을 세분화시켜서 서울로 흘러들면 경강이라 했다. 그리고 더욱 세분화되면서 용산에서 마포 앞 강가를 또 서강이라 했다. 그런데다가 선비들의 풍류의식은 더욱 발달해 굽이쳐 흘러가던 물결이 잠시 머무는 곳을 호수로 비유하는 시적변용으로 자신의 기개와 풍류의식을 드러냈던 것이다. 압구정 앞쪽을 동호라 했고 서강 변에 물이 머무는 곳을 서호, 마포 앞을 마호, 용산강이라 불리던 곳을 용호 등으로 시적 변용을 꾀할 만큼 그들의 시적 사유와 풍취는 뛰어났다고 말할 수 있다. 더군다나 물과 모래사장, 섬, 억새, 버드나무 등 강이 주는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이 조망이 좋은 강변에 정자를 짓고 강상의 나룻배와 얼비치는 구름과 강물 속으로 펼쳐진 모래톱과 바람과 멀리 뻗어가는 들녘과 먼 산의 모습들을 차용하여 자신의 정원으로 만들어내는 자연일치사상으로 신선이 되고 자 했고 그런 배포가 뛰어난 선비들의 궐기를 엿볼 수 있다. 그런 욕구 속에 자신의 모든 욕망을 묻으려고 했고 그들 선비들은 얼마나 만은 시를 읊었든가. 재미있는 것은 당시 조위한의 별서는 강 건너편 양화나루에도 있었다. 정철의 제자들이 어느 정자에 모여 사미인곡을 서로 읊으며 풍류를 즐기고 스승을 경외했던 운치는 지금 찾아볼 수 있을까?

이곳에서도 이안눌, 권필 등과 시회를 연 바 있다. 이들의 모임에 가기(歌妓) 추랑(秋娘)과 하추(荷秋)가 참석하여 스승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을 부르는 등 풍류가 극치를 이루었다.

또한 권필은 이기설, 성로(成輅, 1550~1616)와 함께 당시 서호삼고사(西湖三高士)로 일컬어졌다.

성로는 젊은 시절 정철의 문하에서 수업했고, 정철이 패퇴하자 세상과 절연하고 양화나루 입구에 초가를 짓고 20여 년을 유유자적하면서 생을 마쳤다. 성로는 권필, 이안눌, 이기설 등과 함께 정철의 제자였다.

이런 한강변의 운치를 모두 걷어 내버리고 철옹성 같은 아파트로 둘러싸더니 두 줄기로 난 강변도로는 한강을 더욱 꽁꽁 싸매고 말았다. 강으로 접근하는 접근로마저도 토끼굴이라든지 치졸하게 만들고 말았으니 안타깝다. 그런 선인들의 고급문화를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자본주의의 개발위주의 정책에 함몰되고 말았으니 누누이 살아오는 이 땅의 가치 즉 명승지라고 말하는 강의 전통, 물의 문화를 거의 살리지 못하고 망가뜨리고 말았으니 우리 것은 홀대의식은 극치를 이룬다. 그러면서 마냥 다른 나라의 강 황하니 세느강이 어쩌니 하면서 동경만 하고 있는 걸 보면 아직도 우리의 풍류의식 수준은 한강의 오염수처럼 더러워져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비유가 떠오른다.

강물은 자연의 정기를 모아서 흐르며 우리 삶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강 주면에 붙어사는 인간들의 오염수나 뱉어내는 배설의 강으로 전락된 듯하다.

벼슬에 있어도 그렇고 피로도를 느끼는 선비들의 휴식처이자 벼슬에서 떨어졌거나 귀향을 갔다 온 이들의 도피처이거나 와신상담 도모하던 세도가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한강변이다. 당시 조선사회의 파벌도 강했든 만큼 끼리끼리 모여서 담론을 만들고 구설수를 띄우던 현장 소위말해서 ‘누정정치’까지 만들던 곳이다.

누군가가 말했다. 이제 한강도 그냥 서울시민의 배설수만 모아 흐르는 강이 아니라 과거 선비들의 궐기를 내뿜고 문화를 내품으며 전신의 채혈로 만든 시가들을 모우고 흐르면서 중간 중간 지명을 따라 붙여진 강의 이름들을 되살리며 강을 유람하는 그런 풍류는 어떤지를 묻고 싶다.

“자네 오늘은 마호에서 차 한 잔 어때?”

“좋지 2시 쯤 망원정에서 보게”

이런 운치를 살려보는 것은 각박한 삶에 정서적인 측면을 도모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500년의 조선을 끌고 온 수도 한양의 저력과 가치를 느끼면서 사는 것이 우리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 지도 생각해볼 시기가 왔다고 본다.

어쨌든 여러 가지 숙제가 던져진 것이 한강을 끼고 흐르는 한강의 질문이겠다.

각설하고 현재 산을 모두 잃어버린 영등포를 관통하고 있는 한강이 흐르고 강 중간에 선유도, 밤섬 그리고 섬의 성격을 거의 잃어버렸지만 여의도 등 3개의 섬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주목하는 곳이 영등포구 양평동 4가 쪽에 있는 선유도란 섬이다.

원래는 ‘선유도’란 섬 이름보다 선유봉으로 더 알려졌던 섬이다. 초기엔 양평동과 모래땅으로 붙어있어 선유산으로 불리다가 혹은 선유봉(仙遊峯)으로 옛 지도에 표기되면서 불리던 곳. 현재 선유봉은 양평동 4가 한강변에 위치한 봉우리로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여 많은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던 명소였다. 두 개의 산봉우리가 우둑 솟아있던 선유봉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또 선유봉 암석은 숫돌로 이용할 정도로 양질에다가 명나라 사신이 선유봉 암벽에 중국 황하 가운데 있는 산의 이름으로 결류 속에서도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뜻을 의미하는 ‘지주(砥柱)’란 글자를 새겨, 선유봉 암석의 기풍을 선비의 꿋꿋한 지조에 비유했다. 예전에는 선유봉에 인접했던 양화도 나루 사이에 백사장이 많고 건너 양화진으로 건너가는 마포와의 사이에는 강폭이 넓고 물결이 잔잔하여 강상(江上)에 취흥을 돋우는 배를 띄우기가 좋았다.

일찍이 선유봉은 고려시대부터 번성했던 양화도 나루를 경유하여 마포의 잠두봉을 잇는 한강의 절경이었다. 이곳에서 시와 그림, 그리고 춤이 널리 성행되어 명, 청 사신들까지도 그 풍경에 감탄하여 수많은 시를 읊었다고 전한다. 강산풍월(江山風月)을 좋아하는 풍류객들은 이곳에 누각 또는 정자를 짓고 거처하거나 선유봉 주변 한강에 놀이 배를 띄우고서 풍치(風致)를 즐겼다.

강물이 굽이치는 강에는 그런 풍류만 있는 게 아니라 거친 물줄기와 도강 등의 정치적 아픔도 이면에는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중에는 폐세자가 된 양녕이 왕위를 놓치고 명산대천의 자연풍경을 즐겨 찾았던 양녕대군은 말년에 서강 가에 영복정(榮福亭)을 짓고서 한가롭게 지냈다고 전한다. 세조가 방문해서 영복정이란 이름까지 지어주었다는 이야기다. 또 그의 동생 효령대군도 현재 망원동 자리에 희우제를 지었고 세종이 여러 차례 들락거렸고 훗날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한 월성대군이 희우제를 망원정으로 고쳐 이곳에서 강상의 경치에 자신의 욕망을 녹였고 훗날 연산군 때 성희안이 임금을 비판한 시를 써서 결국 반정의 시발점이 됐던 곳도 이곳이다. 그 밖에도 왕족이나 종친들이 주로 서강가에 많은 정자를 지었다는 기록들이다. 또 왕족인 이총은 이곳 양화진에 정자를 지어 살면서 1천여 편 이상의 시를 읊을 정도로 명승지였다고 했다.

그러나 선유봉은 1925년 대홍수 후 일제가 민족정기를 말살하려는 의도의 석연치 않은 한강 치수사업을 계기로, 질 좋은 선유봉의 암석들이 마구 채취해 제방을 쌓거나 여의도 비행장 건설로 대동아전쟁 물자조달에 사용되어지는 등 점차 봉우리 해체의 비운을 맞게 됐다. 광복 후에도 미군들의 채석과 개발이 우선되는 도시개발의 여파로 남아있던 선유봉 암석들마저 계속 채취됐다. 1962년 양화대교를 건설할 때 깎이면서 1965년 양화대교가 관통되면서 선유봉이 대부분 허물어 졌으며, 이곳에 1978년 선유정수장이 설치됨으로써 안타깝게도 선유봉의 그 아름다운 옛 모습을 모두 상실했다. 예전 선유봉에 있었던 사찰인 용화사의 부처와 미륵은 한국전쟁 중 미군에 의해 노량진 본동 473-4 극락정사로 옮겨 모셔져 있다.

정수장이 폐쇄되고 2002년 월드컵 개최전인 4월에 선유도 공원이 문을 열었다. 막힘없이 바라보는 한강이 시원하고 고개를 돌리면 월드컵경기장에서부터 북한산, 남산, 여의도까지 한 눈에 들어오는 명당이다. 현재 선유도 공원에는 선유정, 선유나루, 원형소극장, 시간의 정원, 만남의 숲, 열린 마당 등 여러 가지 테마공원 등 다양한 시설들이 조성됐다. 옛 정수처리장의 기둥들로 이루어진 멋진 정원과 이름 모를 풀들 사이에 튀어나와 있는 옛 벽의 흔적, 원형 구조물 등 자연과 인공이 평화롭게 어우러진 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선유도는 그 옛날 신선이 노닐던 곳이라는 옛 명성에 버금가는 한강 속 풍유의 섬으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할까. 선유봉 강변을 돌면서 강상의 이야기들을 나누면서 옛 전통이나 시가들을 읊어보거나 현재 강상 유람으로 강의 프로그램이나 선유를 소재로 시를 읊어보는 축제도 필요한 듯하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여기에 끌어오는 ‘공무도하가’를 차용하여 ‘선유도하가’라는 시편을 먼저 터트려내 본다.

백수광부(白首狂夫)가 물살에 휩쓸리자

그 아내도 물결따라 갔다

공후(箜篌)를 뜯던 여옥(麗玉)도 노래따라 가고

사연을 듣던 여용(麗容)도 바람따라 가고

배를 젓던 막리자고(藿里子高)도 구름따라 흘러갔다.

그 어느 강가인들

나루터가 없었겠는가?

두둥실 배 떠나가고

이별노래 부르지 않은 날이 있었겠는가!

아우라지 어우 어우 울음소리

거친 물결 울음에 먹히고 마네

땅을 찢어 섬을 만들고

섬은 물줄기를 찢고

또 어우러지고

서로서로 나누고 합치는 사이

흘러가는 구름 한 조각

흘러온 바람살과 엉겨

이 몸에 품고 선유(仙遊)에서 노닐다

-정노천 시인의 선유도하가(仙遊渡河歌)-

‘선유야 선유야 두 봉우리를 내 놓아라!’ 이렇게 ‘구지가[(龜旨歌)’를 패러디 해본다면 사라진 봉우리가 다시 우뚝 서겠는가? 다만 조선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겸재 정선은 1741, 1742년경에 선유봉을 배경으로 ‘양화환도’, ‘금성편사’, ‘소악후월’ 등 3편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남기기도 했다. 겸재 정선의 그림에서나마 가까스레 선유봉우리가 붙들려 있는 현실이다. 이를 살려내는 것이 선유도의 생명뿐만 아니라 이곳에 현재 살고 있는 후손들에게 풀죽은 의식에 다시 다양한 생기를 불어 넣을 수 있는 정서적 요인이 될 것이다.

글|정우제(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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