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경주는 사로국 신라의 금성이 아니고, 徐那伐(서나벌)은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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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

시조의 성은 박씨이며, 이름은 혁거세이다. 전한 효선제 오봉 원년 갑자 4월 병진[정월 15일 이라고도 한다.]에 왕위에 올랐다. 통치자는 거서간(거서한)이라 한다. 이 때 나이는 열 세 살이었으며 나라 이름은 서라벌이었다.

(始祖, 姓朴氏, 諱赫居世. 前漢孝宣帝, 五鳳元年, 甲子, 四月丙辰[一曰正月十五日], 卽位, 號居西干, 時年十三. 國號徐那伐.)

삼한의 진한이니 삼국지권30과 후한서권85 삼한지역이다.

(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 一曰閼川楊山村, 二曰突山高墟村, 三曰觜山珍支村[或云干珍村.], 四曰茂山大樹村, 五曰金山加利村{加里村}, 六曰明活山高耶村, 是爲辰韓六部.)

이보다 앞서 조선의 후예들이 산골 사이에 분산되어 살면서 여섯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첫째는 알천의 양산촌이라 하고, 둘째는 돌산의 고허촌이라 하고, 셋째는 취산의 진지촌[혹은 간진촌이라고도 한다.]이라 하고, 넷째는 무산의 대수촌이라 하고, 다섯째는 금산의 가리촌이라 하고, 여섯째는 명활산의 고야촌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진한 6부가 되었다.

高墟村長蘇伐公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往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及年十餘{三}歲, 岐嶷然夙成. 六部人以其生神異, 推尊之, 至是立爲君焉.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옆의 숲 사이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었다. 그가 즉시 가서 보니 말은 갑자기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것을 쪼개자 그 속에서 어린아이가 나왔다. 그는 이 아이를 거두어 길렀다. 아이의 나이 10여 세가 되자 지각이 들고 영리하며 행동이 조신했다.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을 기이하게 여겨 높이 받들다가, 이 때에 이르러 임금으로 삼은 것이다.

辰人謂瓠爲朴, 以初大卵如瓠, 故以朴爲姓. 居西干, 辰言王.[或云呼貴人之稱.]

진한 사람들은 ‘호(瓠)’를 ‘박’이라고 하였는데, 처음의 큰 알이 박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겼으므로 그의 성을 박이라고 하였다. 거서간을 진한에서는 왕이라고 하였다.[혹은 귀인을 칭하는 말이라고도 한다.]

흘해왕 21년(320) 처음으로 벽골지에 물을 대기 시작하였다. 둑의 길이가 1천 8백 보였다.

(二十一年 始開碧骨池, 岸長一千八百步.)

위쪽 0.84km 아래쪽 1.81-1,93Km 벽골제 1800보

진평왕15년(593) 가을 7월(8.3-9.1) 명활성을 개축했다. 그 둘레가 3천 보였다. 서형산성은 둘레가 2천 보였다.(十五年, 秋七月, 改築明活城, 周三千步 西兄山城, 周二千步.)

금성은 7-8리의 환형 성이 있어야 한다.

혁거세왕21년 서울에 성을 쌓고 금성이라고 불렀다. 이 해에 고구리(高句麗) 시조 동명이 왕위에 올랐다.(二十一年 築京城, 號曰金城. 是歲高句麗始祖東明立.)

남해 원년(원년(4) 가을 7월(8.5-9.3) 낙랑 군사가 금성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였다.(元年 秋七月 樂浪兵至圍金城數重.)

조분왕3년(232) 여름 4월(5.8-6.5) 왜인이 갑자기 쳐들어와 금성을 포위했다 왕이 직접 나아가 싸웠다. 적이 흩어져 도주하자 정예 기병을 보내 추격하여 1천여 명을 죽였다.(三年 夏四月 倭人猝至圍金城. 王親出戰, 賊潰走, 遣輕騎追擊之, 殺獲一千餘級)

흘해왕37년(346) 왜병이 갑자기 풍도에 와서 변경의 민가를 약탈하고, 또한 금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은 군사를 보내 전투를 벌이려 하였다. 그러나 이벌찬 강세가 말했다. “적병이 멀리서 왔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공격 시간을 늦추어 그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듯합니다.” 왕이 그렇다고 생각하여 성문을 닫고 나가지 않았다. 적들은 식량이 떨어지자 퇴각하려 하였다. 이 때 왕이 강세로 하여금 강한 기병을 이끌고 추격하게 하여 그들을 격퇴했다.(三十七年 倭兵猝至風島, 抄掠邊戶, 又進圍金城急攻. 王欲出兵相戰, 伊伐湌康世曰賊遠至, 其鋒不可當, 不若緩之, 待其師老. 王然之, 閉門不出. 賊食盡將退, 命康世率勁騎追擊, 走之.)

내물왕38년(393) 여름 5월(5.27-6.25) 왜인이 와서 금성을 포위하고 닷새가 되도록 풀지 않으니, 모든 장병들이 나아가 싸우기를 요청했다. 왕이 “지금 적이 배를 버리고 육지로 깊이 들어 와서 죽음을 각오하는 마당에 있으니, 그 예봉을 당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성문을 닫았다. 적은 성과없이 물러갔다. 왕이 먼저 용감한 기병 2백 명을 보내 그들의 퇴로를 막았다. 그리고 또한 보병 1천 명을 보내 독산까지 추격하여 양쪽에서 협공하여 그들을 대파했다. 죽은 적병과 포로로 잡힌 적병이 아주 많았다.(三十八年, 夏五月, 倭人來圍金城, 五日不解, 將士皆請出戰. 王曰今賊棄舟深入, 在於死地, 鋒不可當. 乃閉城門, 賊無功而退. 王先遣勇騎二百, 遮其歸路. 又遣步卒一千, 追於獨山, 夾擊大敗之, 殺獲甚衆)

금성 동쪽 민가가 내려않아 연못이 되다(123)

눌지왕28년(444) 여름 4월(5.3-6.1) 왜병이 금성을 열흘 동안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갔다. 왕이 군사를 보내 추격하려 하자 측근들이 “병가의 말에 ‘궁한 도적을 추격하지 말라’하였으니, 왕은 그들을 내버려 두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듣지 않고 수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 이르러 접전했다. 왕이 이 전투에서 적에게 패하여 죽은 장병이 절반이 넘었다. 왕은 당황하여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적이 여러 겹으로 산을 포위했다. 이 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됐다. 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고 생각하여 군사를 거두어 물러갔다.

(二十八年, 夏四月, 倭兵圍金城十日, 糧盡乃歸. 王欲出兵追之, 左右曰兵家之說曰窮寇勿追 王其舍之. 不聽, 率數千餘騎, 追反{至及}於獨山之東合戰, 爲賊所敗, 將士死者過半. 王蒼黃棄馬上山, 賊圍之數重. 忽昏霧, 不辨咫尺, 賊謂有陰助, 收兵退歸.)

삼국사와 동이전의 공통부분을 제외한 비공통부분의 중 하나가 徐那伐(서나벌)

낙랑왕 최리와 서나벌, 진흥왕이 삼국사와 동이전의 비공통부분이다.

호태왕비문과 창녕진흥왕비문의 碑利城이 공통부분이다.

호태왕비문과 중원비분의 공통부분이 古牟婁城이다.

비공통부분에서 지리를 나타낼 단어는 徐那伐이다. 국호인지 수도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칠伐(벌)은 떼筏(벌)로 범위를 나타내는 말을 대용한 말로 보아야 한다.

삼국사와 동이전의 공통부분은 삼국사기권46을 나타내는 것이며 옥저의 해주 동쪽은 낙랑국지역이고 徐那伐은 이 땅을 나타낼 부분이다.

倭는 狗盧國과 卑彌國의 발전국가다

금성은 구당서에서는 周七八里 衛兵三千人, 당서는 環八里所衛兵三千人이라고 하여 원형 城 이라고 하였고, 樂浪兵이나 倭兵이 포위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서 둘레가 있는 성이다. 그리고 평지성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갑자기 처들어와서 포위한 것으로 보여지는 기록이다. 그러므로 삼국사기권46의 吳越과 齊魯의 신라 수도 금성이라면 가능한 기록이다. 그리고 倭兵이 사라져 가는 쪽에 獨山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이는 덕안 동북에는 많는 독산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지만 특히 越王句踐이 살던 쪽으로 있는 함산과 청양 동쪽의 독산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금성은 고지도에서 덕안 동북에 있는 경주가 금성으로 보아야 하는데 지금은 합비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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