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46 상대사시중장과 계원필경의 上太師侍中狀의 문장비교

Picture of 오재성
오재성

上太師侍中狀에 대하여 조선학자들은 외면하여 왔다. 그리고 조선국가사관과 민족사관으로는 결코 밝힐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나 <삼국사>권46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계원필경집>에도 있으나 그 진실여부를 놓고 연구된 것도 없다. 그러나 <삼국사>권46 상대사시중장을 입증하는 사서가 <남제서>권58이다. 아울러 <사기>에서 <오대사>까지 18사동이전을 <남제서>권58지역과 한반도에 각각 대입해 보면 한반도에는 가능성이 적고 전자에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상대사시중장은 바르게 해석돼야 한다.

伏<以>(聞)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

말씀을 드리면 동쪽 넓은 곳에 세 나라가 있는데 마한‧변한‧진한이다. 마한은 高句麗이고 변한은 백제이고 진한은 신라이다.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고구리‧백제가 전성할 때 강병(强兵) 100만으로 남으로 오‧월(吳‧越)을 다물(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로(幽‧燕‧齊‧魯)를 다물(多勿 ; 점유)하여 장안조정의 근심거리였고 수나라(隋帝)의 멸망도 요의 동쪽 정벌에 기인한 것이었습니다.

貞觀中<我>(我唐)太宗皇帝親統六軍渡海恭行天罰高麗畏威請和文皇受降<回>(廻)蹕

정관(貞觀) 연간에 우리 당나라 태종이 친히 6군을 거느리고 넓은 곳을 지나 하늘을 대신하여침범했습니다. 고구리(高句麗)가 위세를 두려워하여 화친을 청했으므로 문제(文帝)는 항복을 받고 돌아갔습니다.

此際我武烈大王請以犬馬之誠助定一方之難入唐朝謁自此而始後以高麗百濟踵前造惡武烈<七>(王)朝請爲鄕導至

이때 우리 무열대왕께서 견마의 정성으로 일방의 난리를 평정하고 당나라에 들어가 조알(朝謁)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됐습니다. 그뒤 高句麗와 백제가 전과같이 계속하여 발악하므로 무열왕이 7차나 입조하여 길잡이가 되기를 청하였습니다.

高宗皇帝顯慶五年勅蘇定方統十道强兵樓<船>(舡)萬隻大破百濟乃於其地置扶餘都督府招緝遺氓蒞以漢官以臭味不同屢聞離叛遂徙其人於河南

고종(高宗) 현경(顯慶)5년에 이르러 소정방(蘇定方)에게 명하여 10도(道)의 강병과 전선 만 척을 거느리고 백제를 대파하고 그 땅에 부여도독부(扶餘都督府)를 설치하고, 유민을 불러 모아 한나라의 관리에게 담당하도록 하였습니다. 풍속이 서로 달라 여러 차례 반란의 소식이 들리므로 드디어 그 사람들을 하남(河南) 지방으로 옮겼습니다.

摠章元年命英公<李>(徐)勣破高句麗置安東都督府至儀鳳三年徙其人於河南隴右

총장(摠章)원년 영공(英公) 이적(李勣)에게 명하여 高句麗를 깨뜨리고 안동도독부를 두었습니다. 의봉(儀鳳)3년에 이르러 그 사람들을 하남의 농우(隴右) 지방으로 이주시켰습니다.

高句麗殘孽類聚北依<太>(大)白山下國號爲渤海開元二十年怨恨天朝將兵掩襲登州殺刺史韋俊於是明皇帝大怒命內史高品何行成大卿金思蘭發兵過海攻討仍就加我王金某爲正大尉持節充寧海軍事雞林州大都督以冬深雪厚蕃漢苦寒勅命廻軍

고구리의 유민들이 떼로 모여 북으로 태백산(太白山)아래에 의거하여 국호를 발해라 하고, 개원(開元)20년에 당나라를 원망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등주(登州)를 갑자기 습격하여 자사(刺史)위준(韋俊)을 살해했습니다. 이에 명제(明帝)께서 크게 노하여 내사(內史)고품(高品)·하행성(何行成)과 태복경(太僕卿) 김사란(金思蘭)에게 명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광야를 지나 토벌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왕 김모의 작위를 추가하여 정태위(正太尉) 지절(持節) 충영해군사(充寧海軍事)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았는데 겨울이 깊고 눈이 많이 내려 번한이 너무도 추위와 괴로움이 심하므로 회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至今三百餘年一方無事滄海晏然此乃我武烈大王之功也

그로부터 지금까지 3백여 년 동안 한 지방이 무사하고 중원이 편안하니 이는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입니다.

今<致遠>(某)儒門未學海外凡材謬奉表章來朝樂土<凣>(凡)有誠懇禮合披陳

지금 치원은 유생(儒生)들 중 학문이 낮은 자이고, 해외의 평범한 인재로서 외람되이 표(表)와 장(章)을 받들고 좋은 나라에 와서 조회하게 되었습니다. 무릇 진실로 간절함이 있어 예에 맞게 모두 진술합니다.

伏見元和十二年本國王子金張廉風飄至明<年>(州)下岸浙東某官發送入京中和二年入朝使金直諒爲叛臣作亂道路不通遂於楚州下岸邐迤至楊州得知聖駕幸蜀

살펴보건대 원화(元和)12년에 본국의 왕자 김장렴(金張廉)이 바람에 떠밀려 명년(明年)에 이르러 해안에 내렸을 때 절동(浙東)의 어느 관리가 보내주어 장안에 들어가도록 했습니다. 중화(中和)2년 입조사(入朝使) 김직량(金直諒)은 반란이 일어나 도로가 통하지 않아서 마침내 초주(楚州)에서 하륙하고 양주(楊州)에 이르러 어가가 촉(蜀)에 거동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高大尉差都頭張儉監押送至西川已前事例分明

고태위(高太尉)가 도두(都頭)장검(張儉)을 보내 감독하여 호송하여 서천(西川)에 도착하도록 했으니, 이전의 사례가 분명합니다.

伏乞<太>(大)師侍中俯降台恩特賜水陸券牒令所在供給舟<船>(舡)熟食及長行驢馬<艸>(草)料幷差軍將監送至駕前

바라옵건대 태사 시중께서는 굽어 큰 은혜를 내리시어 특별히 수륙의 통행하는 권첩을 특사하고 당지 관청에 명하여 선박과 숙식 및 원거리 여행에 필요한 나귀와 말과 사료를 공급케 하시고, 아울러 군장을 시켜 호송을 감독하여 어전에 당도케 하여 주십시오.

此所謂太師侍中姓名亦不可知也(이하삼국사에는 없음:<不度涯分冐凟嚴威下情不任攀恩戀德兢惕戰懼之至>

여기에서 말한 바 태사 시중의 성명은 또한 알 수 없다.

 

 

김부식 등이 보았던 최치원문집의 상대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이 현재 국립중앙도서관 보존 계원필경에는 없고 규장각 보관분에는 있다. 이것은 2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 중앙도서관본 계원필경은 김부식이 본 上太師侍中狀을 배재하고 만든 것이다. 규장각본은 그대로 전하여진 계원필경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부분을 삭제된 상태로 전해 진 이유가 무엇일까?

첫째는 高句麗, 백제 역사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제‧로-오‧월 사이의 사로신라역사도 문제가 될 것 같으니까 아예 싹을 자르기 위하여 그 문장을 삭제했을 것이고 또한 高句麗, 백제 역사를 한반도에 맞추는데 지장이 있기 때문에 삭제시켰을 것이다. 특히 보장왕과 의자왕의 패망 지역을 유‧연‧제‧로-오‧월의 역사로 밝혀지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즉 上太師侍中狀의 내용을 보면 최치원은 의자왕의 백제와 보장왕의 高句麗를 패망시킨 신라의 위치가 밝혀 질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관심을 크게 갖는 것은 高句麗, 백제가 오‧월과 유‧연‧제‧로를 다물(多勿)했다는 기록이다. 즉 ‘高麗(고구리) 百濟(백제)가 강성할 때 남으로 吳(오)‧越(월)을 다물(侵침)하고, 북으로 幽(유)‧燕(연)‧齊(제)‧魯(로)를 다물(撓점유)하여 장안의 큰 두통거리였고 수나라가 망한 이유도 요의 동쪽을 정벌한 때문이다.

(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라는 기록인데 한조선시대 학자들은 이 문장을 못 보았을까?

<삼국사>에서 보았으나 이를 거론한 사람은 극소수 뿐으로 다 확인하기는 어렵고

한국고전종합DB에서 수록된 것을 찾아보았다.

1) 고운집(孤雲集) 고운 선생 사적 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최치원(崔致遠)

최치원(崔致遠)의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고도 한다. 신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삼국유사》 권1 〈기이(紀異) 1 신라시조혁거세왕(新羅始祖赫居世王)〉에 이르기를, “최치원은 바로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 남쪽, 미탄사 남쪽에 옛 집터가 있는데, 이것이 최치원의 옛집이라고 한다.(致遠乃本彼部人也 今黃龍寺南 味呑寺南 有古墟 云是崔侯古宅也)” 하였다. 공은 풍의(風儀)가 아름다웠으며, 어려서부터 정민(精敏)하고 학문을 좋아하였다. 나이 12세에 이르러 바닷길로 배를 타고 당(唐)나라에 들어가 유학하려 할 적에, 그의 부친 이름이 견일(肩逸)이며, 일찍이 숭복사(嵩福寺)의 창건에 참여했다. 《고운집》 권3 〈대숭복사 비명(大嵩福寺碑銘)〉에 이르기를…

2) 고운집(孤雲集) 고운 선생 사적 동국통감〔東國通鑑〕 최치원(崔致遠)

…여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겼으므로, 표(表)ㆍ장(狀)ㆍ서(書)ㆍ계(啓) 등의 글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중 황소에게 보낸 격서(檄書)에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공개 처형하려고 생각할 뿐만이 아니라, 지하의 귀신들도 은밀히 죽이려고 이미 의논했을 것이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황소가 보고는 자기도 모르게 의자에서 떨어졌다. 이로 인해 명성을 천하에 떨쳤다. 또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은 서장을 언제 올린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동사강목》에 의하면 “진성여왕 7년(893)에 당에 조공 가던 사신 김처회(金處誨)가 바다에 익사하였으므로 다시 부성군 태수(富城郡太守)로 있던 최치원을 불러서 하정사(賀正使)로 삼았다. 그러나 여러 해 동안 흉년이 들고 도적이 잇달아 일어나 길이 막…

3) 고운집(孤雲集) 고운집 제1권 장(狀) 태사 시중에게 올린 장문〔上太師侍中狀〕 최치원

삼가 아룁니다. 동해(東海) 밖에 세 나라가 있었습니다. 그 이름은 마한(馬韓)과 변한(卞韓)과 진한(辰韓)이었는데, 마한은 곧 高句麗요 변한은 곧 백제요 진한은 곧 신라입니다. 高句麗와 백제의 전성시대에는 강한 군사가 100만이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남쪽으로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지역을 침범하고 북쪽으로 유주(幽州)와 연주(燕州) 및 제(齊)나라와 노(魯)나라의 지역을 동요시키는 등 중국에 커다란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수황(隋皇 수 양제(隋煬帝))이 실각한 것도 요의 동쪽을 정벌한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정관(貞觀)정관(貞觀) 당 태종(唐太宗)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이다. 연간에 우리 태종 황제가 직접 육군(六軍)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천토를 삼가 행하였는데, 高句麗가 위엄을 두려워하…

4) 고운집(孤雲集) 孤雲先生文集卷之一 狀 上太師侍中狀 최치원(崔致遠)

伏以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強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貞觀中。我太宗皇帝親統六軍渡海。恭行天罰。高麗畏威請和。文皇受降回蹕。我武烈大王。請以犬馬之誠。助定一方之難。入唐朝謁。自此而始。後以高麗,百濟踵前造惡。武烈王請爲鄕導。至高宗皇帝顯慶五年。勑蘇定方統十道強兵。樓船萬隻。大破百濟。乃於其地。置扶餘都督府。招輯遺氓莅以漢官。以臭味不同。屢聞離叛。遂徙其人於河南。摠章元年。命英公李勣破高句麗。置安東都督府。至儀鳳三年。徙其人於河南隴右。高句麗殘孼類聚。北依太白山下。國號渤海。開元二十年。怨恨天朝將兵。掩襲登州。殺刺史韋俊。於是明皇帝大怒。命內史高品,何行成。大僕卿金思蘭發兵。過海攻討。仍就加我王金某爲正太尉。持節充寧海軍事,鷄林州大都督。以冬深雪厚。蕃漢苦寒。勑命廻軍。至今三百餘年…

5) 성호전집(星湖全集) 星湖先生全集卷之二十六 書 答安百順 이익(李瀷)

…國何嘗有此名。必是濊相也。本是嶺東之國。而至其拓境。寧有包大之理。此類昔曾理會。而只據東史爲證。今老矣。太半遺忘。只言其槩。今見此卷。廣引博採。皆有證據。吾考不及此。欽玩不已。但精魂澌剝。無以上下參互。何以辨別同異耶。惟百順詳加去取焉。東人不讀東史。任其蕪穢。自古無人置意。此書若成。千古一幸。遠古且不論。勝國時郡縣疆界。亦或難曉可歎。金澍事。曾見尹月汀集有傳。金荷潭破寂錄。辨其無實。其言亦是矣。唐天寶中。新羅遣使朝帝于蜀。玄宗賜十韻詩褒嘉。作史者擧此事。及梁太淸中。百濟使臣號泣端門外。惜其二使之名俱不顯則誠然矣。新羅憲康王八年。當唐僖宗中和二年。入朝使臣金直諒。知帝幸蜀。賴高騈送至西川。此事備載於崔孤雲上太師侍中狀。何故漏此不能特書。可笑。權陽邨以檀君千歲爲歷年者爲定論。然其千歲之末孫。亦入山爲神。似無其理。史云都平壤。後移都白岳。今人以九月山當白岳。文化縣有唐莊坪故也。此無所考。愚疑旣云…

6)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第六集地理集第一卷○疆域考 疆域考其一 弁辰考 정약용(丁若鏞)

…時頓降。或其一國來降。不然。史家臆說耳。據赫居世三十八年。瓠公之對馬韓曰。卞韓樂浪。無不畏懷。詳見馬韓考。苟於是年。早已亡滅。誰將畏懷。其不亡可知也。降者。服也。降而不亡。亦無怪也。且弁辰十二國。猶載於後漢書、魏晉史。則不得於前漢之時。獻國於新羅也。此云來降者。來相服屬。非謂竝國土而獻之也。韓韓當時都無弁韓之名。〇又按新羅之史。智證王時。取小伽耶。今固城。法興王時。取金官伽耶。今金海。眞興王時。取大伽耶。今高靈。此方是新羅吞滅弁辰之宗宗實跡也。竝詳別考。乃東俗蒙昧。忽以三韓配于三國。馬配句麗。弁配百濟。七藤八葛。悉違古典。崔致遠上太師侍中狀云。東海之外有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〇甄萱傳云。萱西巡至完山州。謂左右曰。吾原三國之始。馬韓先起後。赫世勃興。謂新羅。故辰卞從之而興。於是百濟開國。〇高麗史云。王隆高麗太祖王建父。說弓裔曰。大王若欲王朝鮮、肅愼…

위에서 보면 삼국사와 성호전집 여유당전서 고운집에서 崔致遠上太師侍中狀云를 언급하고 있다. 이중에서 이익이 ‘崔孤雲上太師侍中狀。何故漏此不能特書。可笑’라고 한 것은 조선시대 학자들을 대변한 것이다.

‘일어날 수 없는 기서을 기록했으므로 가소로운 일이니 거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라는 뜻이다. 어찌됐던 이 부분 上太師侍中狀 아예 무시해 버리고 있다.

그런데 이와 비슷한 곳이 더 있으니 삼국사(삼국사」권28-12), 구당서, 당서, 삼국유사에 아래 밑줄친 부분이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 때 신라가 강성해지니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리(高句麗)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사망했다. 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 발해(발해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時新羅强隆不敢入舊國寄理{治}高句麗死武后又以其孫敬襲王而其地已爲新羅渤海靺鞨所分國系遂絶)

즉 백제 땅을 당나라와 신라가 차지한 것이 아니라 발해와 신라가 차지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것을 上太師侍中狀 무시하듯 하지않고 황당하다고 평가를 내리고 있다.

 

분명히 발해가 백제 땅을 차지한 기록이 <삼국사>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구당서>, <신당서>, <삼국사>는 ‘백제 땅이 신라와 발해말갈이 차지했다’고 했는데 20세기까지 백제 땅이 신라 땅이 됐다 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없으나 백제 땅이 신라와 발해가 각각 나누어 가졌다 하면 어떻게 발해가 백제 땅을 차지했다고 했을까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였을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중국정사조선전>(국사편찬위원회譯)「구당서」譯을 하면서 이병도의 평가를 인용하고 있다.

其地自此爲新羅及渤海靺鞨所分

扶餘隆의 熊津都督府가 新羅軍에 의하여 함락되고 百濟의 舊土가 완전히 新羅의 支配下에 들어간 것은 文武王 11年(671)의 일이었다. 新羅는 泗沘城을 함락시킨 후 여기에 所夫里州를 설치하여 통치하였다. 新羅와 渤海靺鞨이 百제의 故土를 분할・점유했다는 것은 잘못이다 (李丙纛, 『譯註 三國史記』p. 433). 《參考文獻》 李丙燾,『譯註 三國史記』1977.

이와 같은 것이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발해고에 혹평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학자들은 오‧월(吳‧越)과 유‧연‧제‧로(幽‧燕‧齊‧魯)의 명나라 땅에 있으므로 감히 생각조차 할 수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무시하면서 황당하다고 했지만 우리는 이것을 검증해야 한다.

이제부터다. 분명히 高句麗, 백제가 오‧월(吳‧越)과 유‧연‧제‧로(幽‧燕‧齊‧魯)를 다물했다고 했고 백제 땅을 발해가 차지했다고 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삼국사>, <삼국유사>, <지나25사>를 만주-대한(한반도)과 유‧연‧제‧로‧오‧월에 각각 대입하여 진실을 밝혀야 한다. 이유가 있다.

오‧월(吳‧越)과 유‧연‧제‧로(幽‧燕‧齊‧魯) 지역은

1) 기자가 조선에 살다가 묻힌 곳도 이 지역이다. 기준도 해로 들어간 곳도 이곳이다

2) <삼국사>권41에 의한 김유신의 조상 소호금천씨가 살던 곳도 이곳이고 수로왕 김유신 전쟁지명이 있는 곳도 이지역이다.

3) <삼국사>권43에 의하면 장보고의 기록이 존재한 곳도 이지역이다.

4) <구당서 신장서 삼국사>의 의자왕전과 보장왕전의 기록이 일치되는 지역도 이 지역이다

5) <삼국지>, <후한서>에 의한 호태왕비문의 신라, 가라, 백제, 왜 지역도 이 지역이다.

이를진데 검증없이 역사를 축소하고 기본사서를 외면한 역사서를 읽고 남긴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어서야 어찌 후손에게 역사를 바로 본 사람이라고 할 것인가

三國史권46 1246. 2.4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三國遺事 1281-4년 馬韓崔致遠云 馬韓 麗 辰韓 羅也
보물525호三國史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보물723호三國史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1710奎章閣顯宗實錄字三國史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扵征遼
성호이익권26.1740년간 崔孤雲上太師侍中狀。何故漏此不能特書。可笑
我邦疆域考第一集詩文集第八卷 1811년 載崔致遠上太帥狀云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其以馬韓爲句麗者
釋尾春芿삼국사기1909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契齊魯爲中國巨蠱隋皇失馭由於征遼
坪井九馬三삼국사기1913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熬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靑柳綱太郞삼국사기1914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句百濟新羅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契齊魯爲中國巨蠱隋皇失馭由於征遼
조선광문회삼국사기최남선1914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扵征遼
김택영삼국사기1916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句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신호열삼국사기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김종권삼국사기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民族文化推進會壬申影印本삼국사기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誠庵古書博物館本(李炳翼影印本,1984)삼국사기 三國其名馬韓卞韓辰韓馬韓則高麗卞韓則百濟辰韓則新羅也高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

만약 이 땅의 역사만 한다면 그것은 가첩방식이 된다.

어찌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가 하면 우리 고대사는 모두가 아시아를 호령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그것을 다 포함하지 않고 이 땅에 맞추려하는 것은 바로 족보방식으로 전체를 하는 것이 아니고 내 가족 위주로 하는 가첩과 같기 때문이다.

한반도 역사만 챙기는 것은 가첩방식이다. 그렇게 본다면 九黎(구리시대: 환웅시대)를 지나서 朝鮮(단군조선시대)때 단군의 황숙인 고불가가 낙랑국에 봉함에 받아서 최숭과 최리에 이르는 낙랑왕국이 32년에 高句麗에 병합이 되고 503년까지 통치를 받는 干지역이었다. 또 503년 高句麗로부터 신라가 독립하여 936년까지 존재했고 高麗와 이성계 조선으로 이어져 왔으니 이 땅에서는 신라통일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한편 유연제로-오월지역에서 김유신, 최치원의 신라는 (韓)의 사로국(斯盧國)에서 시작하여 4대를 거치고 BC58년부터 AD310에 복국호 신라, 가라, 高句麗, 백제로부터 광복하여 30세에 진평왕에 이르고 의자왕의 백제와 보장왕의 고구리를 무너뜨렸으나 고구리와 백제 일부는 발해가 이어가고 사로신라는 663년에 당나라의 도독부로 전락했고 자치국으로 장보고, 최치원 같은 인물을 배출시켰다.

이렇게 서기500년 이후 고구리에서 독립한 신라와 광복한 신라가 있어 우리역사를 어렵게 만들었다. 고구리는 원나라같은 방대한 연방국가였음에도 단일국가로 생각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원나라 이후 만주와 조선을 중심으로 독립하려는 생각 때문에 이성계 조선말기 청나라에서 독립하자는 독립협회가 구성되어 스스로 대한이라는 국가를 부정하는 꼴을 남겼다.

대한암흑기를 지나서 대한에서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이라고 헌법 전문에 넣으면서도 독립협회의 독립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유구한 역사를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진‧당‧간(秦‧唐‧間)을 나타낸 사서를 정리하고 이 시대를 나타낸 모든 사서를 검증하여 바른 역사를 전수해야 할 것이다.

<계원필경> 규장각본 상대사시중장

*고운문집과 ( )는 三國史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