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강변의 유적지 ‘제천정(濟川亭)’

현재의 지명을 폐지하고 과거의 지명을 불러오고 복원해야 하는가. 용산강변 용산에는 수많은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특히 도성 숭레문 밖의 근교로서 국가적인 행사나 관아들이 즐비했다. 특히 한강변을 끼고 더욱 많은 정자 등 명승지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없다. 이번호는 당시 최고의 명승지인 재천정에 대해서 알아본다.


이태원로를 폐지해야 하는가? 그럼 성경대로(省耕臺路)로 바꿔야하는가? 또 한강로, 원효로를 폐지하고 석우(石隅)동, 원단(圓壇)동, 둔지동으로 전환해야 하는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한성(漢城) 숭례문(崇禮門) 밖의 남교(南郊) 둔지산1) 주변에는 제례에 쓸 소(牛)·산양(山羊)·돼지(豕) 등 희생(犧牲)동물을 기르는 전생서(典牲署)가 있었다. 남교(南郊)의 석우(石隅)2)는 임금이 들에 나가서 농작물을 살펴보는(관가:觀稼)하는 성경대(省耕臺)가 있다. 남교(南郊) 기우제(祈雨祭), 풍년(豊年)을 기원하는 기곡제(祈穀祭)를 설행(設行)3)한 원단(圓壇)4), 사제(司祭)를 설행(設行)한 사한단(司寒壇),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노인성(老人星)에 제사 지내는 노인성단(老人星壇)5), 천전성(天田星)에 제사를 지내는 영성단(靈星壇), 풍사(風師)·운사(雲師)·뇌사(雷師)·우사(雨師)에 제사를 지내는 풍운뇌우단(風雲雷雨壇)6), 역마(驛馬)의 사육에 필요한 경비를 충용하기 위하여 지급하는 마위전(馬位田), 두모포(豆毛浦)7)에 제향(祭享)8) 및 발인 때까지 대행 대왕. 대행 왕후의 재궁을 모시는 빈전(嬪殿)과 수라간에서 쓸 얼음을 관리한 빙고(氷庫), 궁궐의 전각 지붕을 덮는 기와를 제작하여 공급하는 와서(瓦署), 흉년이 들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내어 주거나 죽을 쑤어주는 진제장(賑濟場)을 설치한 이태원(梨泰院)9). 둔지산 남쪽 용산강 가에 관(棺)·곽(槨)을 제조하고 장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 귀후소(歸厚所), 용산강 가와 두모포(豆毛浦)의 월송암(月松庵)10)에 설치하고 번(番)을 나누어 글을 읽게 하였던 독서당(讀書堂)11)인 호당(湖堂), 혼인에서 가취(嫁娶)12)하지 못하고 죽은 처녀귀신 손각씨(孫閣氏)13)에게 남근(男根)을 바치고 제사하는 부근당(付根堂), 별영창(別營倉)의 수군을 훈련시키고 군병들 급료를 지급하는 읍청루(?淸樓)14). 사신들이 한강을 유관(遊觀)15)하는 제천정(濟川亭)16)을 사적 지정하고 원형 복원해야 할듯… <김민수님 글 중에서>


제천정(濟川亭)의 흔적을 찾아서
제천정에서 바라다보는 달구경은 뛰어났다. 동녘에서 달이 떠오르며 비추는 한강의 강색은 유달리 아름다워서 일직부터 한성 십영 가운데 ‘제천완월(濟川翫月)’로 손꼽혔다. 제천정은 한강 북쪽 언덕 지금의 한남동 537번지에 있었다. 한강정은 고려시대의 명사들 시문에도 시제로 오르내렸다. <조선왕조실록>세종 원년 5월조에 상왕과 세종 임금이 대마도 정벌군의 삼군 도총수 유정현 이하 그 일행을 한강정에서 환송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 해에 명나라 사신 왕현, 황엄을 맞이하여 한강정에서 잔치를 베푼 기록도 보인다. 고려, 조선 초기에는 이곳의 정자를 한강정이라고 했다. 세조 2년(1456)과 3년 6월에 각각 명나라 사신 윤봉과 진감을 맞아 한강 제천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서 이때부터 한강정을 제천정으로 고쳐 부르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조선조에 와서 명나라 사신이 오면 으레 한강정 곧 제천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이곳의 경치를 구경시키고 술 마시며 놀게 했다. 세종 32년(1450)에 왔던 예겸은 한강기문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 도성에서 남쪽으로 10리 되는 곳에 물이 있는데 한강이라고 한다. 금강산 오대산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가는데 강수에 임하여 다락집이 있어 한강루라고 한다. 경태 원년(세종 32년, 1450) 정월 14일 공조판서 정인지, 한성부윤 김하가 나와 함께 놀게 되었다. 말을 타고 남대문을 나섰는데 지원 신숙주, 성삼문 및 도감 여러 사람이 함께 갔다. 이리저리 길을 돌아 마을과 들 사이를 지나니 거의 오정이 되어서 누상에 오르게 되었다. 임금님이 미리 좌부승지 이계전, 예조판서 허익을 보내어 잔칫상을 벌여 놓고 맞이했다. 난간에 의지하고 둘러보니 강산의 좋은 경치가 모두 자리 사이로 들어온다. 술이 돌아가는데 내가 즉석에서 시 삼장을 짓자 도감에서 미리 현판을 만들어 가지고 있다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지은 시를 써 달란다. 다락 위에 걸어 놓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글씨를 잘 쓰지 못한다고 말하고 사양했다. 술이 반쯤 취했는데 한성부윤이 일어나서 ‘작은 배를 누 아래에 대 놓았으니 한 번 타고 놀아보지 않겠느냐’고 해서 나는 곧 자리를 치우게 하고 배에 올랐다. 배는 세 척을 연결했다. 그 중 가운데 배에 작은 집을 세우고 지붕을 띠풀로 덮었는데 안에 6-7명쯤 앉을 만하다. 걸터앉을 의자를 놓았는데 너무 높직해서 처마가 시야를 가리므로 나는 강산이 이렇게 좋은데 처마가 낮으니 넓게 볼 수 있게 할 수 없을까 싶어 낮은 의자로 바꾸어 앉았다. 술잔을 씻고 다시 술을 부으며 언덕 따라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다가 몇 리를 못 가서 다시 정자 아래로 돌아왔다. 호군(護軍) 매우(梅佑)가 ‘달이 벌써 떴습니다.’라고 일깨우므로 그만 언덕 위로 올라와서 말을 타고 돌아왔다.”


명나라 사신들은 한강루 곧 제천정 놀이 때마다 으레 우리나라 접반관(接伴官)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고 시를 읊었다. 일찍부터 명나라 사신이 오면 제천정으로 나가서 술 마시고 놀다가 호화로운 배 곧 화방(畵舫)을 강물에 띄우고 저 서쪽 서강 잠두봉 아래 망원정까지 뱃놀이하는 것이 당시의 정규코스였다. 예겸은 이 뱃길을 다음과 같이 ‘한강기문’에 적고 있다.
“저 강물은 유유히 흐르는데 사람, 마차가 연방 강머리로 몰려든다. 다락배를 타고 물을 가로질러 잔잔한 물결에 실려 건너는데 구름이 따르고 바람은 앞잡이가 된다. 뭇 사람들이 어지러이 와서 맞이하고 구름은 나부끼며 나를 호위한다. 회포를 풀어 놓고 크게 노래 부르고 술잔을 들어 지체할 새 사람 그림자가 물 가운데에 감돈다. 새가 하늘가에서 나는데 동쪽 언덕에선 그윽한 난초를 캐고 남쪽 물가에선 꽃다운 영지버섯을 캔다. 미인을 생각하나 오지 않으니 패물 끈을 맺으며 멈칫거려진다.”
이 기문은 제천정으로부터 망원정에 이르는 한강의 뱃길이 그야말로 시와 글로 수놓았던 명코스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용재총화> 권9에 “제천정이 한강 북쪽 언덕에 있어 경치가 뛰어나다. 명나라 사신으로 관광하는 이는 먼저 이 다락에 오르고, 또 이곳을 지나는 많은 선비들도 날마다 이곳으로 모여든다. 사평원이 한강 건너 남쪽 모래밭에 있다. 지세가 합하므로 날이 저물면 강을 건너지 못한 행인들이 거기에서 묵는다. 양화도 북안에 희우정(喜雨亭)이 있는데 원래 효령대군의 정자였으나 후에 월산대군의 소유가 됐다. 성종 임금께서 해마다 관가 취세 함선의 수전 훈련이 있을 때면 친히 희우정에 납시었다. 성종께서 희우정을 망원정으로 이름을 고치고 친히 읊은 어제시와 여러 문신들의 화운을 현판에 새겨 걸게 했다. 월산대군이 죽은 뒤로는 성종께서 다시는 망원정으로 거동하지 않았다. 대신 여러 차례 제천정을 찾았다. 제천정 정자의 규모가 작고 좁다 여기시고 이를 넓혀 짓게 했다.”
이렇게 적은 것으로 미루어 성종 때에 제천정을 큰 규모로 고쳐지었음을 알 수 있다.
<궁궐지>에 의하면 명종 임금도 13년에 제천정에 올라 이곳 한강에서 펼쳐진 수전 훈련을 관람하였다. <궁궐지>에 “인조 2년 갑자(1624)에 이괄이 서울을 침범하자 임금께서 대왕대비와 종묘 및 사직단의 신주를 받들고 공주로 피난길을 떠나던 날 밤, 한강을 건널 때 제천정 건물에 불을 질러 그 불빛을 의지하고서야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라고 했다.
제천정이 이때 불탄 후로 다시는 복원되지 않은 듯 싶다. 인조 14년(1636)의 병자호란 이후로 청나라 사신들이 우리나라를 왕래했지만 그들이 제천정을 찾아 놀았다거나 시문을 남긴 기록이 전혀 없다. 돌이켜 생각하면 한강정, 제천정은 명나라 사신들을 맞아 술 마시고 시를 읊던 국제무대로 이름을 떨쳤지만 그보다도 한강정은 태종, 세종 두 임금께서 친히 이곳 정자까지 납시어 대마도 동정군을 환송하며 전함을 떠나보내던 감격의 장소였다. 제천정은 선조 2년(1569)에 69세로 벼슬을 내놓고 시골 도산서원으로 낙향하는 퇴계 이황 선생을 온 장안 선비들이 이 정자까지 따라 나와서 참되고 맑은 마음으로 만류하다가 석별의 정을 나누던 감회어린 정자이기도 하다.<원천(참고)자료 : 서울육백년, 김영상>
이승소의 시조 제천정완월이다. 이 시조는 이승소가 제천정에서 달을 구경하며 지은 것으로, 제천정에서 바라보는 달과 가을 강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月入秋江江水靜(월입추강강수정) 달은 가을 강에 비치고 강물은 고요한데,
百尺閑臥浮圖影(백척한와부도영) 높다란 백척 정자에 누우니 돌탑과 흡사하네.
對月須傾斗十千(대월수경두십천) 달을 벗 삼아 말 술을 기울이니,
何用月團三百餠(하용월단삼백병) 둥근 달떡 삼백 개 만들어 어디에 쓰랴.
淸輝冷氣上下徹(청휘냉기상하철) 맑은 빛 찬 기운은 상하로 통하는데,
森然竪我兩빔髮(삼연수아양빈발) 숲처럼 이내 두 귀밑머리 일어나네.
但願長照樽中酒(단원장조준중주) 늘 술잔 속에 달 비치기를 바라는데,
何知鏡圓與鉤曲(하지경원여구곡) 어찌 둥근 거울과 굽은 갈고리를 알리오.

1) 용산 서빙고동 근처 한강하류의 산 서빙고가 있었다.
2) 돌 모퉁이
3) 베풀어서 행하다
4)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기 위해 쌓은 단
5) 고려ㆍ조선 시대에, 노인성제를 지내던 단. 서울의 남교, 즉 숭례문 밖에 있었다. 노인성(老人星)을 제사 지내기 위해 쌓은 제단(祭壇). 노인성은 남극노인성으로 옛날부터 사람의 수명을 관장하는 별이라고 하여 서울 남쪽 교외 둔지산(屯地山)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단을 만들었다.
6) 비, 바람, 구름, 우레를 맡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단 서울남쪽 교회에 있었다.
7) 지금의 옥수동 근처 동빙고가 있었다.
8)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
9) 남산골 현재 이태원 부근의 옛 이름 예전에 가난한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다고 한다.
10) 독서당 인근에 있었던 숙종과 관련된 암자
11) 두모포 동호독서당 1483년 용산에 있는 빈 사찰을 증축해 독서당을 만들어 사가독서의 중심이 됐다.
12) 시집가고 장가를 든다.
13) 처녀가 죽어서 된 귀신
14) 훈련도감의 군병들 급료를 지불하는 별영창고에 딸린 누각, 용산강가에 있어 명승지였다.
15) 두루 돌아다니며 구경함
16) 한남동 한강변 언덕에 위치, 왕실의 별장이자 외국 사신들이 한강경치를 즐기기 위해 자주 찾았다. 한강정을 제천정으로 바꿔 불렀다. 1624년 불타서 사라지고 말았다


정여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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