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 정사(正史)로 골격을 맞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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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

골격을 완성시킬 자료는 정사(正史)다

고리 이전을 연구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 사료이다.

고리 이전을 연구할 때 기본이 김부식찬<삼국사기(이하 삼국사)>와 <사기>에서 <당서>까지 18사동이전이다. 이 두가지가 없었다면 결코 고리 이전을 정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연부터 <삼국사>와 동이전을 믿지 않고, 창작에 힘써왔다. 이것을 간파하지 못한 후학들이 답습하며 광신자가 되기 때문에 바로 보지 못한 과오는 어쩔수 없다고 하자. 그러나 연구하지 않은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인이 아무리 출중하다 해도 수명의 한계가 있고, 수집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사는 공개적으로 전체의 골격을 갖출 자료가 수집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는 구리(九黎)시대부터 고리 이전을 기록했다. 아쉬운 것은 동이전처럼 각각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 없다는 점이 흠이다. 그래서 <삼국사>와 동이전을 함께 보아야 고리 이전을 밝힐 수 있는 것이다

정사가 아무리 잘못 기록됐다고 해도 전체적인 골격을 갖출 수 있게 간행된다는 것

개인의 저서는 단방약같이 거대한 역사를 봐서는 순간의 기록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개인의 수집한계가 전체를 볼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정사는 다수의 수집에 의하여 자료가 모아지고 정리된 상태를 나타낼 수밖에 없다. 지나 18사 편찬을 보면 존속기간이 짧아도 다음 정권이 자료를 정리하여 남겨 놓았다. 그래서 전체의 골격을 나타낼 수가 있다. 그리고 정사는 여러 사람이 작업을 하다보니 상반된 내용도 전하게 된다는 점이다.

<사기>는 사마천이 편찬하고 송 때 집해를 넣고, 당 때 색은과 정의를 넣었다. 그래서 찬반비(贊反非)를 함께 수록하고 있다. 이것이 정사이다. 전체역사를 보는 것은 후대에 맞기고, 그때 그때 수집한 것을 첨부하여 놓았다. 결벽자가 보면 말이 않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각기 달라도 수록되어져 왔다는 것이다

<삼국사>도 같다. 말이 되지 않는 것 같아도 그렇게 시작됐는데 그 자료마져 놓치고 있다. <삼국사>는 그 당시 수집할 수 있는 자료를 모아서 수집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삼국사>에 대한 <사기>처럼 집해 색은 정의를 첨가하여 편찬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는 부정적으로 취사선택자료로 보았을뿐 이러한 생각으로 <삼국사>를 보완하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상반된 것이 있다는 것이 정사(正史)편찬에서 남겨진 교훈이다

正史는 전체 역사를 보고 편찬되어 왔다

正史는 족보를 하듯 전체 역사를 보고 편찬되어 왔다. 즉 시원을 기준으로 한다.

일연은 <삼국사>와 <18사>에 우리역사 시원을 삼국의 전전국가 구리에 기준으로 한 것을 외면하고 고조선을 기준으로 했다. 그러나 삼국사는 전전국가인 九黎, 18사도 九黎를 기준으로 했다.

동이전은 九黎를 최초 국가로 하고, 동이 조상으로 하고, 헌원을 제후의 아들로 기록했다.

삼국사는 전전국가를 정통과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우리가 아시아 역사를 시작한 역사로 기록하고 있고, 고구리가 그 정통을 계승하고 있음을 기록으로 남겼다. 동이전과 삼국사는 후대에 골격을 갖추게 기록하고 있으나 그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후발국가의 국가사관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어 왔음을 알수 있다.

후발국가의 국가사관으로는 전통계승의 역사로 동족사를 마련할 수 없다

일연의 국가사관이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실어 반도사관이 되었다.

신채호의 국가사관이나 한국의 국사관도 반도사관이다.

삼국사와 동이전은 동이후예 즉 九黎-조선-고구리연방 후예를 동족(同族)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와 동이전은 아시아인을 동족으로 기록하고 있다. 지나는 동이 중 만주-조선8도-일본열도인을 동이로 하면서 장안중심의 중과 삼국사기권46 지역인을 화로 하여 中和시켜 中華를 만들었고 동이전을 밀어내고 중화민국인을 한족이 아닌 중화민족으로 만들어 버렸다.

글 |오재성 (삼국사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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