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기원과 한자 표기 변화는 언제부터였을까?

최초의 기록이 부도지(符都誌)에 보인다. 16절에 ”사람들은 영주(瀛州) 대여산(岱與山) 계곡에서 삼영근(三靈根)을 얻으니, 곧 인삼(人蔘)이었다. 그것을 영주해삼(瀛州海蔘)이라 하였으며… 이러한 것은 부도의 지역이 아니고는 얻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방삭초(方朔草)라 하니 세상에서 불사약이라 하는 것이 이것이다“ 라는 기록, ‘蔘’자를 썼다. 임검(壬儉) 때다.

단군세기에는 기원전 2137년 태백산에서 “삼신(三神)께 제(祭)를 올리고 영초(靈草)를 얻었는데 이를 인삼(人蔘) 또는 선약(仙藥)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參’이라는 표기는 전한(前漢) 때인 기원전 33년 사유(史游)가 지은 급취장(急就章)에 처음으로 보인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인삼(人蔘), 상(上)에 난다”고 했다. 상(上)은 산서성(山西省)의 한 지방 이름이다. 당·송 시대에는 산서성의 상산(上産) 인삼이 최고품으로 취급되어 있다. 상산 인삼은 명나라 시대에 남획됐다. 그러나 생육 환경의 변화로 거의 멸종되었다.

인삼(人參)이라는 명칭은 겉모양이 사람과 흡사하기 때문이며, 삼(參)은 “나무가 곧고 길게 자라는 모습에서 ‘參‘의 음을 따왔다”고 설문해자는 설명했다.

인삼 표기는 명나라 이후까지 ‘人參’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나라 때는 ‘人蔘’, 조선조 이후에는 모두 ‘人蔘’으로 통일되어 있다.

1263년 고려 때 간행한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의 방중향약목(方中鄕藥目)편에는 ‘蔘’으로 표기되어 있다. 또한 고삼(苦蔘)과 현삼(玄蔘)이 나오는데 인삼(人蔘), 고삼(苦蔘, 속명 너삼, 쓴 삼), 만삼(蔓蔘, 속명 더덕, 황삼, 당삼), 사삼(沙蔘, 속명 잔대), 현삼(玄蔘, 속명 심회초心回草) 혹은 단삼(丹蔘, 속명 분마초奔馬草)라 분류했다.

1489년 편찬된 ‘구급간이방언해(救急簡易方諺解)’에 인삼(人蔘)이라는 한자를 풀이하여 심(心)이라 했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도 ‘심’이라는 주석이 보인다. ‘제중신편(濟衆新編)’과 ‘방약합편(方藥合編)’에도 ‘심(鄕名云心)’이라 했고, 1820년 ‘물명고(物名攷)’에도 ‘심’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심’은 산삼을 채취하는 심마니들이 쓴다. 우리 인삼이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739년이다. 고려인삼(高麗人蔘), 고려라는 명칭에서 보듯 한민족 고유의 역사와 문화가 그 속에 담겨있다. 그러나 기후 변화 등 인삼 환경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가 숙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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