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은 본디 맑은 흐름을 좋아하지 않네

성희안, 시로써 연산군을 축출을 기획하다

‘임금은 본디 맑은 흐름을 좋아하지 않네(聖心元不愛淸流)’

서강 강가 월산대군의 정자에서 폭군 연산군과 술을 마시던 성희안(成希顔:1461~1513)이 써낸 시 구절이다.

일인 군주국에서는 왕의 한마디가 법인 시대에 감히 이렇게 비판적인 시를 써서 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조선 선비의 칼날은 혀에도 숨겼지만 주로 글 특히 시에서 드러냈다.

폭군이라고 알려진 연산군을 향해 이러한 비판적인 시를 읊조리는 건 자칫 자신의 머리가 뎅겅 날아갈 수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성희안은 그대로 시에 자신이 평소 품고 있던 칼날을 풀어 내던졌다.

연산군은 크게 화를 내어 성희안을 이조참판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조선시대선비들은 글로써 글 중에서도 시로써 자신의 궐기를 내보였다. 불의를 보면 그 문장 속에서 칼날을 숨겼고 왕의 자리를 위협했을 정도였다.

어느 날 연산군이 월산대군별장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중신들에게 시를 짓게 하니, 성희안은 작심한 듯 글을 지어 올렸다.

‘성심원물애청류(聖心元不愛淸流)-’, 풀이하면, 우리 임금께서 원래 청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라는 뜻이라, 연산군은 자신을 비꼬는 훈계조의 시가 분명하다는 괘씸한 생각에서, 그만 성희안을 부사용(副司勇)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이는 무관직인 오위도총부의 종9품 최말단 자리였다.

그러나 기개가 늠늠한 성희안은 묵묵히 때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한동네에 살고 있는 군사부정 신윤무(辛允武)가 찾아와, 박원종의 인물됨을 들먹이며, 폭군을 그냥 두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 있는 말을 했다. 성희안은 곧 박원종과 접촉, 드디어 반정시나리오를 자신이 맡아 연산군을 옥좌에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처음 성희안과 뜻을 나눈 신윤무는 간신 임사홍를 작살내, 병조판서에 올라 병권을 잡았고, 성희안은 이조판서에 오른 뒤, 함께 도모한 공신들의 차례에 따라 우, 좌의정을 거쳐, 1513년 4월, 53세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나 그도 역시 모래 살지 못하고 그해 7월, 석달 남짓 영의정자리를 지키다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성희만은 창녕성씨 중시조 송국(松國)의 차남 한필의 후손으로, 세조 7년에 돈녕부판관 찬(瓚)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희안의 어머니는 정종의 아들 덕천군 이후생(李厚生)의 딸이었으니, 그는 왕실의 외손인 셈이다.

성희안 묘와 신도비

성희안은 1485년 성종 16년 25세 나이로 문과에 올라 첫 벼슬로 홍문관정자가 됐다. 문치를 펼친 성종이 학문이 있어 보이는 성희안을 눈여겨 봐, 그의 소탈한 성격과 뜻이 대범함을 살펴, 성희안을 고문격으로 삼아 직위를 자주 올려주었다. 1494년 새로 등극한 연산군도 부왕의 뜻을 이어, 성희안을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에 특별히 승차시켜, 조정의 인사와 군권까지 거머쥔 막강한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연산군이 점점 파악해 지자, 성희안은 연산군의 장래가 글렀다고 여겨, 이런 임금을 받들어 출세할 생각을 접기에 이르렀다가, 급기야 그의 운명을 바꾸는 큰 사건을 저질렀다

월산대군정자에서 임금을 비판하는 시를 적어 올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도 역시 모래 살지 못하고 그해 7월, 석 달 남짓 영의정 자리를 지키다가 안타깝게도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그런데 역시 성희안도 단점이 있었다. 드러난 인물이다 보니 역사가들은 허물을 빠뜨리지 않고 꼬집은 셈이었다. 이자는 〈음애일기>에 성희안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희안은 성질이 소탈하고 대절이 있었다. 조정에 서서는 강개하여 뜻이 구차스럽지 않았다. 하지만 학술이 없는데다가 또 남에게 굽힐 줄 몰랐고, 남의 과실을 용납 할 수 있는 아량이 없었으며, 성미가 급했다. 그런 까닭에 정승으로서의 공과 이름이 크게 손상됐다.

영의정 성희안이 청송부사 정붕(鄭鵬)에게 사람들 보내, 잣과 꿀을 구해 보내라 했다. 이에 정붕은 곧은 인물이라 분개한 나머지 “잣은 높은 산봉우리에 있고, 꿀은 백성의 집 벌통 안에 있으니, 어찌 원으로써 얻을 수가 있겠소” 라고 글을 써서, 심부름 온 사람에게 들려 보냈다. 성희안은 크게 깨닫고 사과편지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성희안에게는 오라비의 득세를 믿고 남편을 몹시 우습게 여기는 한 여동생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 신수린(申壽麟)이 여종의 손목을 자주 만진다는 말을 듣자, 바로 그 여종의 손목을 잘라 남편의 아침밥상에 올려 남편을 기절초풍하게 했다. 이 일로 성희안은 크게 망신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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