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 1백만 명과 달자(몽골용병) 3만명과 병선5만여 척으로 공격

선조실록 120권, 선조 32년 12월 25일 경자 2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전 별제(別提) 노인(魯認)이 서계(書啓)로 10조를 바치기를,
“1. 왜적이 말하기를, ‘토루(土壘)는 전쟁의 진지를 구축하는 데 있어서 만고에 훌륭한 방법인데, 일본이 그 묘체를 능히 터득하여 7년을 횡행하면서 한 번도 실패한 일이 없다. 그런데 저 명 나라나 조선은 행군하며 야영을 할 때에 다만 소나무 가지를 이용하여 성을 만들고 병사들을 둘러세워 막(幕)을 삼으므로, 우리 병사가 새벽을 틈타서 공격하면 저들은 비록 만 명의 군대가 있더라도 모두 겁을 먹고 도망친다. 조선에서 가장 소루하게 여기며 그 묘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진법(陣法)이다.’라고 하니, 이적의 말이 헛소리만은 아닌 듯합니다.”

  1. 가사(假使)가 들어간 뒤로 다시는 소식이 없으므로 가강(家康)이 졸병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친선을 구하는 진위(眞僞)를 탐색하여 본 뒤에 재침하려는 계획이었는데, 그 졸병을 잡아다가 중국에 보내어 돌아가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니 생각건대 저 적들이 필시 더욱 분노하여 재침하려 할 것입니다.
  2. 가강이 현재 주의를 기울여 처리하고 있는 일은 다만 자기들 내부의 변고를 진압하는 일입니다.
  3. 가강이 바다를 건너 재침하라고 명령을 하였는데, 행여 모주(某州)의 장수가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으면 가강은 틀림없이 거기부터 토멸하라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길(秀吉)이 처음 침략할 때와 같이 하면 60주(州)가 모두 바람에 쓸리듯 뒤따를 것이라고 합니다.
  4. 지난 겨울 가사의 사건에 대해서 중국의 대소 관원들이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모두들 ‘이 일은 오래지 아니하여 황제의 귀에 들어가 동정(東征)하러 간 장수들이 모두 대죄(大罪)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지난 8월에 복건(福建)을 출발하려 할 때에 포정사(布政使)·안찰사(按察使) 등 여러 장관들이 모두 신에게 부탁하기를 ‘가사 문제는 관계되는 바가 크니, 당신이 북경에 가거든 절대로 발설하지 말라.’ 하였습니다.
  5. 왜적이 말하기를 ‘명나라와 조선의 병선(兵船)이 비록 크지마는 빠르기가 나는 용(龍)과 같고 또 가까이 접근하여도 붙잡고 올라가기가 어려우며 대포(大砲)도 무서우니 수전(水戰)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하였습니다.
  6. 명나라의 민(뙤) 지방과 절강(浙江) 사이의 왜군을 방비하는 일은 오로지 수전을 힘써서 봄철에는 각 진영의 군대가 3월부터 모두 해상(海上)으로 내려가 배를 탄 상태에서 변란을 대기하였다가 5월에 철수해 돌아오고, 가을철에는 7월에 해상으로 나갔다가 10월에 비로소 철수하여 돌아오는데, 혹시라도 적이 와서 육지에 오르게 되면 포구를 지키던 장졸들을 모두 참수하여 용서하지 않습니다.
  7. 작년 4월 복건성의 군문(軍門) 김학증(金學曾)이 사람을 일본으로 보내 망명인(亡命人) 곽안국(郭安國)·허의(許議) 등을 시켜서 석만자(石蔓子)에게 이간질하게 하기를 ‘황제께서 매우 노하시어 대명(大明)의 정병 1백만 명과 달자(?子) 3만 명을 모두 조선에 보내 부산 등지를 회복하고 곧바로 대마도(對馬島)·일기도(一岐島) 등으로 건너가게 하는 한편, 유구(琉球)·안남(安南)·여송(呂宋)·교지(交趾)·서역(西域) 등의 나라에 명하여 병선 5만여 척으로 일제히 바다를 건너가서 살마주(薩摩州)로부터 공격하도록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8. 민지방의 건령부(建寧府)에 황 거인(黃擧人)160)이라 불리는 사람이 계사년에 모반하자, 그 지방 사람이 변(變)을 알리니 감찰 어사(監察御史)가 군대를 몰고 와서 체포하였는데 그의 집에는 무기가 가득 찼고, 그는 모반한 사실을 일일이 자백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어사가 이 사실을 황제에게 급히 주문(奏聞)하였는데, 황제가 ‘이는 일개 난민(亂民)일 뿐이다. 난민으로 처치하면 그만인 것을 반역이라고까지 확대시켜서 조정에 알릴 필요가 있는가. 그 우두머리만 참형에 처하고 그에게 따라다닌 사람은 처치할 것도 없다.’ 하니, 만민(萬民)이 모두 ‘조정의 계획은 당당하고 기율은 너그러우면서도 엄격하다.’ 하였습니다.
  9. 신이 지난 3월에 복건성에 건너갔는데 군문 이하 각 아문의 장관들이 모두 말하기를 ‘조선과는 한갓 속국(屬國)으로서의 관계만이 아니다. 기자(箕子)를 왕으로 봉한 뒤로 수천여 년 동안 문헌이 끊이지 않았다.’ 하고, 예의로 극진히 대접하였으며, 호송할 때에는 군문이 노자로 15냥을 주었고, 포정·안찰도 5, 6냥씩을 주어서 함께 왔던 기효순(奇孝諄) 등이 모두 춥고 배고픔을 면하고 살아 돌아왔습니다.
  10. 일본의 지도를 올립니다.”

하였는데, 입계하였다.

【태백산사고본】 73책 120권 12장 B면
【국편영인본】 24책 18면
【분류】 군사(軍事) / 외교-명(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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