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임금과 신하가 학문에 대해 허심탄하게 논하다1

정조실록 11권, 정조 5년 3월 18일 신묘 2번째기사 1781년

이문원에서 《근사록》을 강하고 이어 홍문관에서 《심경》을 강하다.

이문원(摛文院)에 행차하여 내각(內閣)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서 《근사록(近思錄)》을 강하게 하였다. 임금이 익선관(翼善冠)에 곤룡포(袞龍袍)를 갖추고 여(輿)를 타고서 인정전(仁政殿)으로부터 본원(本院)에 나아가 어좌(御座)에 오르니, 의장(儀仗)이 동·서로 나누어 섰다. 향로에 연기가 피어오르니 음악을 연주하였다. 인의(引儀)가 각신(閣臣)을 인도하여 입시(入侍)하였는데, 제학 김종수(金鍾秀)·유언호(兪彦鎬), 직제학 정민시(鄭民始)·심염조(沈念祖), 직각 서정수(徐鼎修), 대교 정동준(鄭東浚)이 왼쪽을 경유하여 뜰 동쪽의 배위(拜位)로 나아가고, 원임 제학 이휘지(李徽之)·황경원(黃景源)·이복원(李福源)·서명응(徐命膺), 직제학 서호수(徐浩修), 직각 정지검(鄭志儉)·김희(金憙)·김우진(金宇鎭), 대교 서용보(徐龍輔)는 오른쪽을 경유하여 뜰 서쪽의 배위(拜位)로 나아가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배례가 끝나자 시임은 동쪽 계단으로 올라오고, 원임은 서쪽 계단으로 올라와서는 반열을 합쳐 한 줄로 만들어 전(殿)으로 올라 강위(講位)로 나아갔다. 영첨(領籤)이 안책(案冊)을 내어오니 승지가 전봉(傳捧)하여 꿇어앉아 올렸다. 검서관(檢書官)이 각신(閣臣)에게 책(冊)을 주고, 청강(聽講)을 명하였으며, 여러 신하들이 전으로 올라왔다. 영경연사(領經筵事)는 서명선(徐命善), 지경연사(知經筵事)는 정상순(鄭尙淳)·김익(金熤),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는 이명식(李命植)·정창성(鄭昌聖), 시강관(侍講官)은 박천형(朴天衡), 시독관(侍讀官)은 이시수(李時秀)·이정운(李鼎運)·이겸빈(李謙彬)·유맹양(柳孟養), 검토관(檢討官)은 조정진(趙鼎鎭)·박천행(朴天行)·권이강(權以綱)·홍문영(洪文泳)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근사록》은 곧 학문의 요지(要旨)인데, 태극도설(太極圖說)이 책을 펴면 가장 중요한 뜻이 되니 먼저 이 장(章)을 읽으라.”

하니, 심염조(沈念祖)가 독주(讀奏)하고 문의(文義)를 진달하였다. 이것이 끝나자 하교하기를,

“오늘의 모임은 성대하다. 새로 본원(本院)을 옮기고 특별히 이 연석(筵席)에 임어하여 경들과 일당(一堂)에서 자순(諮詢)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어찌 곧 글을 이야기하고 경(經)을 설명하고서 끝내려는 것뿐이겠는가? 문의 이외에 오늘날의 일에 관해서 할말이 많을 것이다. 위로는 과궁(寡躬)의 허물과 시정(時政)의 득실에서부터 백성들의 고락(苦樂)과 전왕(前王)의 치란(治亂)에 이르기까지, 일은 말하지 못할 것이 없고 말은 끝까지 못할 것이 없게 함으로써 상하(上下)가 서로 이익됨이 있게 하자는 것이, 곧 내가 오늘 본원에 임어한 뜻이다. 만약 책을 가지고 연석에 나오게 하여 준례에 따라 문의만 대답하게 한다면, 이는 한마당 한가한 설화(說話)에 불과한 것이니, 군덕(君德)과 치모(治謨)에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대개 강설(講說)은 곧 말로 인하여 의문을 일으키고 의문으로 인하여 의문을 풀게 하여 결국은 사람의 선심(善心)을 감격하여 발현하는 데 이르게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주자(朱子)155) 와 상산(象山)156) 이 의리가 같지 않아서 문로(門路)가 각각 달라지게 된 것이다. 〈주자가〉 백록 서원(白鹿書院)에서 강론할 때에 강을 듣는 문인(門人) 중에 왕왕 눈물을 흘리는 사람까지 있었던 것은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 같아서였다. 이제 성인(聖人)의 말을 외면서 성인의 도(道)를 강설하여 조금이나마 개발(開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면, 오로지 강설만이 이렇게 할 수 있다. 오늘 마땅히 경들과 함께 하루종일 끝까지 담론하고 밤을 지새워 아침까지 계속 하려하니, 경들은 다 말하여 숨김이 없어야 할 것이며, 나도 마땅히 겸허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겠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일어나서 절하고 수명(受命)하였다.

하교하기를,

“이 책의 책명은 곧 《근사록(近思錄)》인데, 선유(先儒)들이 이 책을 가지고 사자(四子)157) 의 계제(階梯)로 삼았다. 이는 대개 학자가 학문을 함에 있어 먼저 가까운 데에서부터 공부하여 간절히 묻고, 비근한 데서부터 생각함으로써 가까운 데에서 먼 데로 이를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미 ‘근사’로 이름하였으니, 편수(篇首)에 먼저 성리(性理)의 은미하고 깊은 내용을 말한 것이어서 초학(初學)이 깨우칠 만한 것이 아는 듯 싶으며 근사(近思)의 뜻에 맞지 않는 점이 있는 듯 싶다. 무릇 학자는 비록 도(道)를 터득한 것이 깊고도 돈독한 뒤일지라도 의리(義理)의 중요 부분과 성명(性命)의 본원(本原)에 대해 갑자기 뛰어넘어 의논(議論)한 적이 없었다. 자공(子貢)이 총명하고 민첩한 식견으로 성문(聖門)에서 친자(親炙)되어 이미 승당(升堂)158) 의 반열에 올랐는데도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서는 오히려 듣지 못하였었다. 이에 의거하여 궁구하여 보건대, 이 책에서 첫머리에 태극도설(太極圖說)을 기재한 것은 참으로 신장(神章)에 가까운 것으로 중화(中和)에 대해 말한 것은 거의 없으니, 학설이 너무 높고 말이 너무 깊은 결과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설자(說者)가 혹 주자(朱子)가 《소학(小學)》을 엮으면서 첫머리에 ‘원형 이정(元亨利貞)’과 ‘인의 예지(仁義禮智)’를 말하였고, 또 이 책을 엮으면서 첫머리에 ‘무극 태극(無極太極)’과 ‘미발 이발(未發已發)’을 말한 것은 특별히 초학자(初學者)들로 하여금 그 명의(名義)를 알아서 향하여 나갈 데가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이 말이 근사하다. 그러나 공자(孔子)가 성명에 관해서는 드물게 말한 뜻으로 견주어 보면 의심스러운 단서가 없지 않다. 평일 이에 대해 무슨 강구(講究)한 뜻이 있는가?”

하니, 이복원(李福源)이 대답하기를,

“공문(孔門)에서 사람을 가르친 것은 효제(孝悌)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만, 맹자(孟子)에 이르러 처음으로 성명(性命)에 관해 말을 하였고, 정자(程子)에 이르러서는 학문(學問)을 논하고 도(道)를 논한 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은미하고 심오한 뜻으로 다른 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시의(時義)가 그러했던 것입니다. 이 책에서 도체(道體)에 대해 먼저 말하였다는 것은 여동래(呂東萊)159) 의 서문(序文)에서 이미 언급하였으며 《중용(中庸)》에서 먼저 천명(天命)이 성(性)이라고 말한 것도 또한 이런 뜻인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대체(大體)는 그러하다. 그렇다면 공자(孔子)가 사람을 가르치는 차서(次序)와 주자(朱子)가 사람을 훈도하는 계급(階級)이 각각 다른 점이 있게 되는데, 그 같거나 다른 뜻의 이유에 대해 분석(分析)해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대답하기를,

“학자(學者)는 모름지기 먼저 대강(大綱)을 안 연후에야 바야흐로 준적(準的)이 서게 되고 손을 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때문에 주자가 반드시 이 태극도설을 가지고 편수(篇首)에 게재한 것은, 세급(世級)이 더욱 내려갈수록 설명을 더욱 상세히 하기 위한 것에 연유한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진달한 내용이 좋다. 대개 맹자의 세대에는 이단(異端)이 점차로 일어나고, 정도(正道)가 점점 회색(晦塞)되어 가고 있었으므로 맹자가 할수없이 성(性)을 말하게 된 것이다. 염계(濂溪)160) 때에는 성인의 말씀이 이미 없어져 버려 사설(邪說)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으므로 염계가 할수없이 무극(無極)에 대해 말을 한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말하지 않은 것을 맹자가 말한 것이며, 맹자가 말하지 않을 것을 염계가 처음으로 말을 하게 된 이유인 것이다.”

하니, 유언호(兪彦鎬)는 대답하기를,

“성현(聖賢)이 사람을 가르침에 있어 상략(祥略)이 같지 않은 것은 그 사세가 참으로 그러한 것입니다. 더구나 학문(學問)하는 도리는 아는 것을 먼저하고 행하는 것을 뒤에 하는 것이니, 진실로 성도(性道)의 본원(本原)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장차 어떻게 손을 대어 공부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 책을 엮는 법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2

하였다. 하교하기를,

“주자가 말한 수신(修身)의 대법(大法)은 《소학》에 기재되어 있고, 의리(義理)의 정미(精微)에 대해서는 《근사록》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선유(先儒)들이 또 이 두 책을 진실로 도(道)를 바라 보는 계제(階梯)로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사장(祠章)에 치중하면서부터 이 두 책을 눈에 붙여 읽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비록 도에 들어가려 해도 어려웠다. 지금의 세상을 돌아보건대, 온 세상 사람들이 단정한 자세로 도를 향하여 달려갈 마음이 없어 분발 면려하고 연마하려는 노력이 없는 탓으로 이 책을 무용지물처럼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 한갓 자회(字會)·자의(字義)·구탐(句探)·구지(句旨)뿐만이 아니라 큰 규모(規模)와 상세한 절목(節目)에 이르기까지도 애당초 연구하지 않고 있으며 체용(體用)의 본말(本末)과 대소(大小)의 상세함과 소략함에 대해서도 또한 강마(講劘)하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옛 학자들의 병폐는 비근(卑近)한 것에 염증을 내고 현원(玄遠)한 것을 힘쓰며 순서를 건너뛰기를 좋아하며 허무(虛無)를 좇는 것이었으므로 사장(詞章)이나 이단(異端)으로 귀결되지 않음이 없었던 것이다. 지금 학자들의 병폐는 사장과 이단까지도 마음을 다하여 힘을 쓰지 않은 것은 물론, 모든 문자에 속한 일을 한쪽에다 팽개쳐 놓고 울타리 가의 물건처럼 여기고 있으니, 애석한 일이다. 이것이 무슨 까닭인가? 세상에서 우리 나라를 문명국(文明國)으로 여겨 예의(禮義)가 풍속을 이루었고 치교(治敎)가 융성하여 유현(儒賢)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고 일컫고 있다. 이런 때문에 말학(末學) 후생(後生)으로서 비록 실제의 공부를 힘써 행하지 못하여 어려서부터 익혀 늙도록 해도 갈피를 못잡고, 나가서는 종[奴]이고, 들어와서는 주인(主人) 행세하는 자일지라도, 그래도 성리(性理)의 찌꺼기와 성현(聖賢)의 말씀이나마 지니고 있게 되었다. 따라서 비록 가정[家]마다 공(孔)·맹(孟)에 대해 이야기하고, 호(戶)마다 정(程)·주(朱)에 관해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빈말이 아닌 것이다. 후세에 이르러서도 선비의 옷을 입고 관을 쓴 사람으로서 근거없는 이야기를 하고 변폭(邊幅)만 꾸미는 자에게서도 또한 유풍(遺風)과 여속(餘俗)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근일(近日) 이래에는 이런 일마저도 또한 폐기되었단 말인가? 옛날에는 칠성(七聖)161) 이 모두 미혹되었다는 탄식이 있었거니와 지금은 온 세상이 모두 미혹되었다고 할 만하다. 경연(經筵)에서는 도움을 의뢰할 가망이 없고 횡사(黌舍)에서는 현송(絃誦)하는 소리가 끊어졌으니, 이는 모두 교화가 밝혀지지 않은 데서 온 소치가 아닐 수 없다. 이에 내가 바야흐로 내 자신을 돌이켜 스스로 반성하기에도 겨를이 없으나, 그 까닭을 공정하게 생각해 본다면 상하 사이에 반드시 초래하게 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경들은 모두 경악(經幄)162) 의 근신(近臣)이기 때문에 이에 나의 속 마음을 펴서 보여 창언(昌言)163) 을 듣고자 하는 것이니 이러한 날에 무엇을 꺼려서 아뢰지 않는가? 가언(嘉言)과 선모(善謨)로 위로는 나의 마음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아래로는 지금 세상의 습속(習俗)을 바로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각(內閣)을 옮겨 설치한 처음을 맞아 특별히 경연(經筵)을 열고 일대(一代)의 신진(新進)인 사람들을 선발하여 비로소 강제(講製)를 만들었으니, 이는 곧 나의 고심(苦心)과 지극한 뜻으로 혹 조금이나마 보익(補益)되는 점이 있기를 바라서였다. 그런데도 만약 단지 헛된 이름만 널리 퍼지고 끝내 실효가 없게 된다면, 용관(冗官)을 창립한 잘못을 내가 진실로 사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여러 근신에게 기대하는 것이겠는가?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숨김이 없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데, 경들은 모두 단정하고 방정한 선비로서 이미 지척(咫尺)의 연석(筵席)에 올라서 만약 한마디 말도 없이 물러간다면, 비단 스스로의 마음에 부끄러울 뿐만이 아니라 어떻게 후세에 전하여 보일 수 있겠는가? 그러니 오늘날 문풍(文風)을 진기시키고 치도(治道)를 만회할 수 있는 요체에 대해 들을 수 있겠는가?”

하니, 서명선(徐命善)이 대답하기를,

“전하께서 즉위(卽位)하신 이래 무릇 문사(文士)들을 장려하고 권면하는 방도에 대해 극진한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이 없었는데도 지금에 이르기까지 문풍이 진기되지 않고 있으니, 어찌 아무런 이유가 없겠습니까? 대개 주(周)나라 문왕(文王)을 기다리지 않고 흥기한 사람은 모두가 호걸(豪傑)스런 선비인 것입니다. 그런데 쇠세(衰世)에 호걸스런 선비를 어찌 얻기가 쉽겠습니까? 권선 징악(勸善懲惡)하는 정사를 행하지 않고서 능히 스스로 도제(導齊)164) 의 근본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은 예로부터 얻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신은 지금 그런 폐단을 바로 잡는 근본은 전적으로 ‘격양(激揚)’이라는 두 글자에 달려 있다고 여깁니다. 진실로 탁류(濁流)를 치고 청류(淸流)를 드날리어 온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글을 모르는 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며 글을 잘하는 것이 귀한 것임을 알게 한다면, 인재가 울연(蔚然)히 흥기하고 치도(治道)가 성취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만, 이는 전하께서 한번 전이(轉移)하는 데 달려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돌아보건대, 지금은 세급(世級)이 이미 낮아졌고 다스리는 도리도 점점 비하되고 있으니 주나라 문왕을 기다리지 않고 흥기하는 것을 어찌 지금의 사람들에게 요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권선 징악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그 대체(大體)가 좋다. 그른 것을 고치고 습속을 바로잡을 방도에 대해 여러 신하들은 끝까지 다 말하여 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가 대답하기를,

“오늘 강회(講會)에 친림하신 것은 참으로 성대한 일입니다. 성상(聖上)께서 과연 계옥(啓沃)하고 보도(輔導)하는 유익함을 받아들이시어 끝내는 문풍을 크게 진기시키는 효험이 있게 된다면 오늘의 강화가 진실로 불행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오히려 혹 그렇지 않다면, 하나의 미문(彌文)165) 을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본각(本閣)의 규도(規度)를 오랫동안 정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성의(聖意)가 애를 쓰고 여러 신하들이 마음을 기울인 결과로 끝내는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신은 이에 대해 삼가 기뻐하면서도 또한 걱정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후 치법(治法)과 정령(政令)이 모두 처음에는 힘을 쓰다가도 나중에는 해이해지는 조짐이 없지 않았는데, 각사(閣事)의 성취된 것이 이와 같이 유종의 미를 거두었으니, 이로부터 온갖 일을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면 끝에 가서 해이해지는 우려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신이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렇지 않다면, 본말(本末)이 전도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걱정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하교하기를,

“그렇다. 선유(先儒)의 말에 ‘정전(井田)은 반드시 한 고을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먼저 한 고을에다 시행하여 보고, 천하에 미루어 나가게 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임금된 자가 나라를 경영하고 학자(學者)가 덕을 증진하는 것은 반드시 모두 먼저 들어가는 첫머리 부분에서부터 손을 댄 연후에야 순서대로 일을 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각(內閣)을 설치한 것도 또한 이러한 뜻인 것이다. 문풍을 진기 면려하고 일세(一世)를 고동(鼓動)시키는 효과를 장차 하나의 내각에서부터 시작하고자 한 지가 이제 이미 6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근래에 와서 비로소 대략 규도(規度)를 정하였고 의절(儀節)도 점차 확립되었으니, 거의 명분에 따라 실효를 요구할 가망이 있게 되었다. 내가 정성스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 것이 어찌 부질없는 것이었겠는가? 과거 세조조[光廟朝] 때 처음으로 내각이라는 이름이 있게 되었는데, 그 요점은 송(宋)나라와 명(明)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중고(中古) 이후에 폐기되고 수거(修擧)하지 않았으며, 선조(先朝) 때에 이르러 비로소 편차인(編次人)을 두고서 사륜(絲綸)을 윤색(潤色)하는 임무를 맡겼었다. 다만, 그 직(職)에 정하여진 호칭이 없고, 그 관(官)에 정하여진 법규가 없어 비록 내각을 수거하려는 뜻을 갖고는 있었지만 내각의 제도를 아직 회복하지 못하였다. 지금 이 내각을 설치한 것은 내가 창립한 것이 아니라, 곧 국조(國朝)의 고사(故事)에 따라 대략 가감(加減)한 것이다. 이제 다행히 의문(儀文)이 비로소 갖추어졌으나, 만약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나의 마음을 본받지 않고 한갓 허함(虛啣)만 벌려놓게 한다면, 오로지 내가 문풍을 진기하려는 본의(本意)가 그저 그 부문(浮文)을 보태는 것에 족하게 될 뿐이다. 그러니 이것이 어찌 크게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수거(修擧)하는 정사(政事)가 단지 일각(一閣)에만 행하여졌을 뿐이요, 이밖의 온갖 법도에 대해서는 실로 처음의 계획대로 계속해 가지 못한다는 탄식이 있다. 그리하여 위미(委靡)하고 총잡(叢雜)스러워 수습할 수가 없으니, 오히려 어찌 치화(治化)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지금의 국사를 돌아보건대, 어렵고 걱정스러운 일이 눈에 가득하고, 조상(朝象)이 흐트러져 아직도 안정이 되지 않고 있으며, 백성들의 수심과 고통이 아직도 구제되지 못하고 있다. 사기(士氣)가 더욱 퇴폐되어 가고 있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진작(振作)시킬 것이며, 인재(人才)가 점점 비하되고 있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육성할 것인가? 군정(軍政)이 날로 문란해지는데도 그 폐단을 바로잡을 방책이 없고, 경비(經費)가 날로 부족한데도 용도를 넉넉하게 할 방도가 없다. 이밖에 갖가지 병폐에 대해서는 이루 거론할 수 없이 많으니 진실로 그 이유를 따져보면, 그 허물이 누구에게 있는 것이겠는가? 오늘날 진실한 말이 없는 것이 곧 오늘날의 큰 병폐의 근원인 것이다. 잘은 모르겠으나, 내가 간언(諫言)을 나오게 하는 실상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경들에게 간언을 올리려는 정성이 없어서 그런 것인가? 이에 참으로 좌우를 돌아보면서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깨달을 수가 없다. 아! 명(明)나라의 과도(科道)에 대한 폐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당시에 설관(說官)한 것은 대개 언로(言路)를 널리 열기 위한 것이었는데 결국에는 붕당(朋黨)으로 나누어져 점차 서로 참소하고 이간질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한사람을 기용하면 문득 탄핵하고 논박하는 소장이 올라오고, 한마디 말을 하면 뒤따라 결적(抉摘)을 가하여 새외(塞外)의 장수가 서로 잇따라 주참(誅斬)을 당하고, 임하(林下)의 선비들도 또한 모두 화(禍)를 당하게 되었다. 명(明)나라 2백 년의 원기(元氣)가 이에서 다시는 진작되지 못하고 말았다. 지금의 풍기(風氣)와 습상(習尙)으로 만약 공거문(公車文)166) 을 날로 쌓이게 한다면 혹 이런 폐단이 있을까 걱정스럽지만, 언로는 나라의 혈맥(血脈)이니 존망(存亡)이 거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떻게 일에 앞서 미리 걱정하여 언로를 열 방도를 생각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목이 메인 것 때문에 밥먹는 것을 폐기하는 데로 귀결되게 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이러한 도움을 구하는 하교는 진실로 속마음을 펴서 보이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연석(筵席)에 오른 여러 신하들이 끝내 한마디 말도 우러러 부응함이 없으니, 이는 실로 나의 평일의 정성이 능히 사람들에게 미더움을 받지 못한 탓이다. 이에 진실로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나 또한 능히 한탄스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종수(金鍾秀)가 대답하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선한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처럼 여길 뿐만이 아니다.’라고 하였는데, 모름지기 마음속으로 좋아하는 것이 자기 입으로 말한 것보다 더 깊은 연후에야 바야흐로 아랫사람을 감동시켜 미덥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상(聖上)께서 비록 부지런히 구언(求言)하는 하교를 내리셨습니다만, 신하 가운데 끝내 응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마음속으로 임금의 마음이 창언(昌言)을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 혹 사교(辭敎)와 다를 수도 있다고 여겨서 그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오로지 전하께서 더욱 자신에게 반성하는 방도에 진념(軫念)하시어 간언이 나오게 하는 여지를 만드는 데 달려 있을 뿐입니다.”

하였다. 정민시(鄭民始)는 대답하기를,

“천하의 모든 일은 먼저 규모(規模)를 세운 연후에야 그 실효를 요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근래 세도(世道)가 더욱 비화되고 문풍(文風)이 더욱 무너져 내린 것은 오로지 규모가 확립되지 않은 때문이며, 규모가 확립되지 않은 것은, 또 정치가 요도를 얻지 못한 것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그러하다. 어떻게 하면 과연 요도(要道)를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심염조(沈念祖)가 대답하기를,

“근래의 습속이 《소학(小學)》을 드물게 공부하기 때문에 어려서는 몽양(蒙養)의 기회를 잃게 되고 자라서는 예절을 행하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결국은 행검(行檢)이 방만하게 전도되기에 이르고 어지러이 명리(名利)에 골몰하게 됩니다. 이제 근본을 추구하는 뜻으로 저재(儲才)의 방도를 극진히 하고자 한다면, 옛날 《소학》의 가르침이 바로 급선무인 것입니다. 이런 때문에 예로부터 사학에 모두 교관(敎官)을 두었고, 간간이 또 분교관(分敎官)을 많이 두어 도하(都下)의 동몽(童蒙)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지금은 교관의 제도를 비록 복고(復古)시키기는 어렵더라도 먼저 양몽관(養蒙官)을 계칙하여 훈도(訓導)하는 방법을 극진히 하게 하고, 또 사학(四學)의 교수(敎授)들에게 명하여 성심으로 과업(課業)을 권면하게 한다면, 거의 인재를 육성하는 방도에 보탬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하교하기를,

“말은 좋으나, 이제 사학(四學)의 교관을 두고 국내(國內)의 어린아이들을 가르쳐 성효(成效)를 요구하고자 한다면, 그 또한 어려운 일이다. 윤 화정(尹和靖)167) 이 이천(伊川)168) 에게 나아가 반 년을 배운 뒤에야 바야흐로 《대학(大學)》과 《서명(西銘)》을 볼 수 있었으니, 대개 이는 먼저 그의 기질(氣質)을 배양하여 학문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사상채(謝上蔡)169) 가 명도(明道)170) 에게 배움을 청하였을 때에 명도가 정좌(靜坐)하는 것으로 가르쳤으며, 횡거(橫渠)171) 가 사람을 가르칠 때에는 예(禮)를 우선으로 하였다. 대저 정좌하게 되면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 본심(本心)을 보존할 수 있고, 예를 배우게 되면 몸을 검속(檢束)하여 행동을 계칙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초학자(初學者)가 학업을 연마하여 증진하는 방도는 이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 훌륭하구나. 두 선생이 사람을 가르친 교훈이여! 이는 옛 성왕(聖王)이 사람들에게 《소학》을 가르친 뜻과 더불어 그 법이 한가지인 것이다.<계속>

이양행 정리

원문

○幸摛文院, 召內閣諸臣, 講《近思錄》。 上具翼善冠、袞龍袍, 乘輿, 自仁政殿, 詣本院升座。 儀仗分東西立。 爐烟升樂作。 引儀引閣臣入侍。 提學金鍾秀ㆍ兪彦鎬、直提學鄭民始ㆍ沈念祖、直閣徐鼎修、待敎鄭東浚, 由左就庭東拜位。 原任提學李徽之ㆍ黃景源ㆍ李福源ㆍ徐命膺、直提學徐浩修、直閣鄭志儉ㆍ金憙ㆍ金宇鎭、待敎徐龍輔, 由右就庭西拜位, 行四拜禮訖。 時任自東階陞。 原任自西階陞, 合班爲一行上殿, 就講位。 領籤進案冊, 承旨傳捧跪進。 檢書官授閣臣冊, 命聽講, 諸臣上殿。 領經筵事徐命善, 知經筵事鄭尙淳ㆍ金熤、同知經筵事李命植ㆍ鄭昌聖、侍講官朴天衡, 侍讀官李時秀ㆍ李鼎運ㆍ李謙彬ㆍ柳孟養, 檢討官趙鼎鎭ㆍ朴天行ㆍ權以綱ㆍ洪文泳。 上曰: “《近思錄》, 卽學問要旨, 而《太極圖說》, 爲開卷第一義。 先讀此章。” 念祖讀奏, 陳文義訖。 敎曰: “今日之會盛矣。 新移本院, 特臨此筵, 要與卿等, 一堂詢諮者, 豈直爲談書說經而止哉? 文義之外, 顧今日可言者多矣。 上自寡躬闕遺、時政得失, 以及乎生民之苦樂、前辟之治亂, 無事不言, 無言不到, 俾有所上下相益者, 卽今日臨院之意也。 若使登筵挾冊, 隨例應文, 則是不過一場閑說話, 何補於君德、治謨哉? 蓋講說, 卽因言而起疑, 因疑而釋疑, 終至於感發人善心者也。 是以朱子與象山, 義理不同, 門路各異。 而白鹿之講, 門人聽講者, 往往有泣下者, 言之感人也如是矣。 今欲誦聖言而說聖道, 以至于一分開發, 則惟講說是已。 今日當與卿等, 盡日劇談, 夜以繼晷。 卿等盡言無諱, 予當虛襟而受之也。” 諸臣皆起拜受命。 敎曰: “此書書名, 卽《近思》也。 先儒以是書爲四子之階梯。 蓋學者爲學, 先從近裏處下工, 切問近思, 自近及遠故也。 旣名《近思》, 則篇首先言性理之微蘊, 恐非初學之所可曉, 而有非近思之意也。 大凡學者, 雖於造道深篤之後, 義理頭腦, 性命本原, 未嘗驟議而躐論焉。 以子貢明悟之識, 親炙聖門, 已在升堂之列, 而性與天道, 則猶不得聞焉。 以是究之, 此書之首載《太極》, 誠幾神章, 中和說者, 無幾近於說太高、語太邃之歸乎? 說者, 或以爲朱夫子編《小學》, 而弁言元亨利貞、仁義禮智; 又編是書, 而首言無極太極、未發已發, 特欲使初學者, 知其名義, 有所嚮往而已。 此說近似, 而視孔夫子罕言性命之義, 不無疑晦之端。 平日有何講究之義耶?” 福源對曰: “孔門敎人, 不出於孝弟, 而至孟子始言性命。 至程子, 則論學論道之言。 無非微奧之旨, 非有異同也, 時義然也。 此書之先言道體, 呂東萊序文已及之, 而《中庸》, 先說天命之性, 亦此義也。” 敎曰: “大體然矣。 然則孔子敎人之次序、朱子訓人之階級, 各有所異。 其所以同異之義, 可以分析而言之歟?” 鍾秀對曰: “學者, 須先識大綱, 然後方有準的, 可以下手, 故朱子必以此圖, 揭之篇首, 此由於世級愈下, 說得愈詳矣。” 敎曰: “所陳好矣。 蓋孟子之世, 異端寢起, 正道漸晦, 孟子不得已而言性。 濂溪之時, 聖言旣湮, 邪說益肆, 濂溪不得已而言無極。 此所以孔子不言, 而孟子言之。 孟子不言, 而濂溪始言者矣。” 彦鎬對曰: “聖賢敎人, 詳略不同, 其勢固然, 而況學問之道, 先知後行。 苟不領會於性道之本原, 則將何以下手用工乎? 編書之法, 不得不然也。” 敎曰: “朱夫子之言, 脩身大法, 《小學》書備矣。 義理精微, 《近思錄》詳之。 先儒又以爲二書, 固望道之階梯, 而自夫人騖詞章, 此二書或罕寓目, 雖欲入道, 難矣。 顧今之世, 擧世之人, 無端厥趨向之心, 無淬礪濯磨之效, 莫不弁髦是書。 不徒不能字會、字義、句探、句旨, 以至規模之大、節目之詳, 初不硏究, 體用本末、大小精粗, 亦不講劘, 固已可歎。 而古之學者爲弊也, 厭卑近, 而務玄遠, 好凌躐, 而遁虛無, 不歸於詞章, 則歸於異端。 今之學者爲弊也, 竝與詞章異端, 而不曾致意而用力, 凡屬文字之事, 擔却一邊, 視如笆籬邊物焉。 惜乎! 此何故也? 世稱我東文明立國, 禮義成俗, 治敎郅隆, 儒賢輩出。 是以末學後生, 雖未力行於實地工夫, 而童習白紛, 出奴入主者, 猶在於性理之糟粕、聖賢之言語, 雖謂之家談孔、孟, 戶說程、朱, 誠非虛語也。 至于後世, 而衣儒冠儒, 懸空說去, 修飾邊幅者, 亦可見遣風餘俗之尙有存焉。 奈之何近日以來, 此事亦廢? 古有七聖皆迷之歎, 而今則可謂擧世皆迷矣。 經筵乏資益之望, 黌舍絶絃誦之聲, 莫非敎化不明之致。 予方反躬自省之不暇, 而夷考其故, 則上下之間, 必有所以致之之由矣。 卿等, 皆經幄近臣也。 玆於敷示心腹, 欲聞昌言之日, 何所憚而不奏? 以嘉言善謨, 上以格予心之非; 下以矯今世之俗耶? 當內閣移設之初, 特開經筵, 選一代新進之輩, 始創講製, 卽予之苦心至意, 或冀有一分補益者也。 若使只(博) 虛名, 終無實效, 則創冗官之失, 予固不辭, 而是豈所期待於諸近臣者哉? 君臣之間, 貴在無隱, 卿等皆以端方之士, 旣登咫尺之筵, 若無一言而退, 則不但自愧乎心, 豈可傳示於後也? 今日所以振文風、回治道之要, 可得聞歟?” 命善對曰: “殿下臨御以來, 凡所以奬勸文士之方, 靡不用極, 而至于今文風之不振, 豈無所由? 蓋不待文王而興者, 皆是豪傑之士也。 衰世中豪傑之士, 豈易得哉? 不行勸懲之政, 而能使自趨於導齊之科, 自古未易。 臣謂在今矯弊之本, 全在於激揚二字。 苟能激濁揚淸, 使擧世之人, 咸知不文爲恥, 能文爲貴, 則人才可以蔚興, 治道可以成就。 此在殿下一轉移間矣。” 敎曰: “顧今世級已降, 治道漸下, 不待文王而興, 何可責之於今人耶? 然而勸懲之言, 大體好矣。 格非矯俗之道, 諸臣盡言之可乎?” 鍾秀對曰: “今日親臨講會, 誠盛事也。 聖上果受啓沃輔導之益, 而終有文風丕振之效, 則今日之會, 固非不幸, 而倘或不然, 則不過作一彌文而止矣。 本閣規度, 久未有定, 而今番聖意懃懇。 諸臣殫心, 終得成就。 臣於此, 竊以爲喜, 亦以爲憂。 聖上臨御以後, 治法政令, 皆不無始銳終弛之漸, 而閣事之成就如此, 其克有終始, 從此百事皆如此事, 則可無終弛之慮。 此臣之所喜也。 萬一不然, 則本末倒矣。 此臣之所憂也。” 敎曰: “然矣。 先儒有言曰: ‘井田必自一邑始。’ 蓋先之一邑, 推之天下之意也。 王者經邦, 學者進德, 必皆先從入頭處下手, 然後乃可以取次做去。 今予內閣之設置, 亦此意也。 振勵文風, 皷動一世之效, 將欲自一閣始者, 今已六年于玆矣。 近始略定規度, 稍立儀節, 庶或有循名責實之望。 予之所以眷眷不置者, 豈徒然哉? 粤在光廟朝, 始有內閣之名。 要倣宋、明之制。 中古以後, 廢而不修, 逮于先朝, 始置編次人, 畀以潤色絲綸之任。 但職無定號, 官無定規, 雖有內閣之意, 內閣之制, 尙未復焉。 今置此閣, 非予創立, 卽因國朝故事, 略可損益者也。 今幸儀文始備, 而若使諸臣, 不體予心, 徒侈虛銜, 則惟予右文之本意, 適足爲益其浮文而已。 此豈不大可憂也? 然而修擧之政, 只行於一閣, 而此外百度, 則實有不承權輿之歎。 委靡叢雜, 莫可收拾, 尙何望治化之成也? 顧今國事, 艱虞溢目, 朝象渙散, 而尙不得底定矣, 生民愁苦, 而尙不得拯濟矣。 士氣益頹, 將何以振作; 人才漸下, 將何以作成? 軍政日紊, 則矯弊沒策; 經費日匱, 則裕用無計。 以至種種病敗, 不勝其多, 則苟究其由, 誰執其咎? 今日之無實言, 卽今日之大病源也。 未知予無來諫之實而然耶。 卿等無納諫之誠而然耶? 是誠左右顧, 而莫省所以也。 噫! 皇朝科道之弊, 可勝言哉? 當時設官, 蓋所以廣開言路, 而畢竟分朋, 漸至於交構讒間。 用一人, 則輒登彈駁; 出一言, 則隨加抉摘。 以至塞外之將, 相繼就誅; 林下之士, 亦皆罹禍。 皇朝二百年元氣, 於是而不復振矣。 以今之風氣、習尙, 若使公車日積, 則恐或有似此之弊, 而言路, 國之血脈, 存亡係焉。 豈可先事而豫憂, 不思所以開言路之道, 自歸於因噎而廢食乎? 今此求助之敎, 亶出敷心之意, 而登筵諸臣, 終無一言之仰副, 實予平日之誠, 不能孚人。 固所自愧, 而亦不能不慨慨也。” 鍾秀對曰: “《書》云: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須是心之所好, 甚於口之所言, 然後方可孚感于下。 聖上, 雖勤求言之敎, 而臣下終無應之者。 其意, 以爲上心之樂聞昌言, 或與辭敎有異而然也。 此專在殿下益軫反躬之道, 以爲來言之地而已矣。” 民始對曰: “天下事, 先立規模, 然後可責實效。 近來世道益下, 文風益壞者, 職是規模不立之故, 而規模之不立, 又由於治不得要道也。” 敎曰: “然矣。 何以則果得要道耶?” 念祖對曰: “近俗鮮有《小學》之工, 故幼失蒙養, 長致扞格, 終至於放倒行檢, 紛汨名利。 今欲以推本之意, 盡儲才之方, 則古者《小學》之敎, 正爲急務也。 是以自古四學, 皆有敎官, 間又多置分敎官, 以敎都下之童蒙。 今則敎官之制, 雖難復古, 先飭養蒙之官, 俾盡訓迪之方, 又命四學敎授, 誠心勸課, 則庶有補於作成之道矣。” 敎曰: “言則好矣, 今置四敎官, 養國內群蒙, 欲責成效, 其亦難矣。 尹和靖從伊川學半年後, 方得《大學》、《西銘》看, 蓋欲先養他氣質, 則以學問之意也。 謝上蔡請學於明道, 明道敎以靜坐。 橫渠敎人以禮爲先。 大抵靜坐則可以居敬而存心矣; 學禮, 則可以檢身而飭行矣。 初學進修之道, 莫要於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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