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기생의 시조문학이 가지는 특성

우리의 역사 속에는 선비와 기생간의 아름다운 사랑이야기가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황진이와 서경덕, 두향과 이황, 홍랑과 최경창, 이매창과 유희경 등이 있으며 이를 두고, 조선시대 4대 사랑이라 한다. 기생은 전통사회에서 볼 때 매우 특수한 존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적인 신분으로는 천민이었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생활을 사대부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한 면에서 기생이라고 하는 양면성을 지닌 신분에 속한 사람들이었다. 이런 성격을 가진 기생은 신분이 분화되었다. 권력사회가 남성체제를 갖춘 국가가 성립하는 과정이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기생의 시조의 작가 층으로 유일한 여성충이라는 것은 완강한 남성 중심에 부딪칠 수 있었던 것은 신분적 특수성에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조선조 시조문학이 가지는 특성에 관해 시조 문학적 특성 및 문학적 수준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고.

이시는 자신을 청산에 비유하여 서경덕을 향한 변치 않는 마음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묘한 것은 성거산에 은거하여 살던 서경덕이 가끔은 황진이를 그리워했으며 그가 남긴 시조가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마음이 어리석고 보니 하는 일마다 모두 어리석다.
만 겹으로 구름이 둘러싸인 성거산에 어느 누가 나를 찾아오겠는가. 그런데도 불어오는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본다.
이 시에는 황진이를 향한 서경덕의 마음이 은근히 서려있다.
그럼 황진이는 어떠했을까?
그녀 역시 비록 스승으로 서경덕을 모시고는 있지만 끔찍이도 그를 흠모 했으며 서경덕이 읊은 시조에 곧바로 화답했다.

내 언제 신(信)이 없어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 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내가 언제 신의도 없이 님을 속였겠는가 절대 그런 일은 없어요.
달 밝은 깊은 밤에 무엇을 해야겠다는 마음도 없지요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까지 낸들 어쩌겠어요
이 시 또한 그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지만 나 또한 애타는 마음이란 뜻이다.
나도 당신이 그리운 것을, 당신이 나를 그리며 나뭇잎 소리를 내 발걸음 소리로 착각하는 것까지 낸들 어쩔 수 없잖아요? 그만큼 나도 당신이 보고 싶다는 말이었지요.

어느 날 황진이가 문득 서경덕에게 이렇게 말했다.
”송도에는 꺾을 수 없는 것이 세 가지 있사옵니다.”
서경덕이 황진이를 쳐다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첫째가 박연폭포요.
둘째가 선생님이십니다.”
그러자 서경덕이 미소를 지으며 셋째를 물었다.
”세 번째는 바로 접니다.”
송도에 있는 것 중 도저히 꺾을 수 없는 세 가지 혹은 가장 뛰어난 세 가지를 일컬어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지요.
이 송도삼절은 황진이의 입을 통해 만들어졌고 서경덕도 동감이나 하는 듯이 소리 없는 미소만 지었다
둘의 관계가 연민의 정을 느끼며 오직 흠모 혹은 존경이라는 단어뿐이었다.

​훗날 황진이는 화담이 그리울 때면 홀연히 집을 나서 화담의 발이 닿았던 금강산, 속리산, 지리산을 찾아다니며 화담이 내디딘 발자취를 따라 운수행각을 했다.
그러다 황진이는 세상의 모든 명리를 끊고 세상의 이목도 피해가면서 지팡이와 짚신을 벗 삼아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이것은 단순한 유람이 결코 아니었으며 스승이자 연인의 발자취를 따라 그의 크고 작은 숨결을 느끼고자 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세월을 보내다가 세상 사람이 알아보지 못하는 곳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결국 그렇게 흠모했던 화담의 곁으로 간 것이다.
시, 서, 화는 물론 미모까지 겸비한 황진이는 오늘날로 보면 슈퍼스타 연예인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녀를 기생으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여류시인이며 천재적인 예술가였다.
어린 시절 사서삼경을 독파하고 시, 서예, 음악을 배웠다.
예능은 물론 빼어난 미모까지 두루 갖춘 예능인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이름난 문인, 종교인, 선비, 왕족들까지 꽃을 꺾듯이 쓰러뜨리며 사회에 대한 원망이나 또는 복수심을 그녀만의 방식으로 표현하고 갔다
서녀, 기생으로 자신을 놀리고 속박했던 세상을 딛고 황진이 자신이 세상을 놀려버린 것이다

조선조 기생의 기원
기생의 기원을 살펴보면, 역사는 남성중심의 군주 제도가 정착되는 과정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기생의 역사는 삼국시대에서부터 우리나라에서 아주 오래된 것임을 볼 수 있다. 신라의 기록에서 이미 기생 이야기가 나온 것임을 보게 된다.
조선시대 기생 중에서 명기로는 기예와 미모와 지성을 두루 갖춘 개성의 황진이가 있다.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사대부의 족보에 올라 있는 홍랑, 두향과 이황, 부안의 기생으로 시재(詩才)가 뛰어나고 거문고를 잘 탔으며, 천민 신분의 시인인 유희경을 사랑했던 매창 등이 있다.

시조 문학적 특성
시조의 작품세계는 기생이라는 신분적 특수성을 엿볼 수 있으며,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서 독특한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남성들과 맞상대를 한다. 남성들의 풍류를 돕는 그들의 특수한 사회적 기능과 시조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 그들의 감성세계까지도 영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본다. 시조의 주종을 이루는 작품 유형으로는 애정시조가 있는데, 전체 작품에서 애정시조가 차지하는 비율이 압도적이다.
남성 사회에 예속된 존재라는 “기녀들의 비극적 운명성이 작품세계에도 그대로 투영되어, 화합될 수 없는 사랑의 슬픔과 지속될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이 절절히 노래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녀시조라고 해서 이런 유의 상사 노래만 있는 것은 아니다. 1)
작품 수는 남성들에 비해 적다. 남성과 서로 화답하는 형태의 남녀수작 노래, 임기응변식의 반짝이는 재기로 좌중을 압도하는 기지의 노래들은 남성들에게 당당함을 보여준다. 애정시조 와는 다른 세계를 보여준다.
당당하고 적극적 감성까지 아울러 내보인다는 것이 기생 시조의 아주 중요한 특성인 것이다. 이런 적극성이 대남성적 감성의 영역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생들은 남성들이 감히 이루어 낼 수 없는 주목할 만한 시적 성취를 이루어 냈던 것은 남성 작가들이 스스로 억압하던 금기의 영역을 비집고 들어갔기 때문이다. 성적 담론을 당당하게 공론화 하는 등 남성들이 해낼 수 없었던 시적 감성의 자유로움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척박했던 토양에 기생들이 시조로서 소담스런 서정의 꽃을 피워 냈다. 시조가 내재하고 있는 서정시로서 가능성을 최대한의 경지로까지 끌어 올리는 놀라운 시적 성취를 이룬 것이다.
일반적 특징을 살펴보면, 기생 시조는 상실의 상황에서 노래한다는 점인데 비해 사대부들의 시조는 흔히 관념적인 면이 보인다. 기생들의 시조는 서정을 표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서 시적 언어로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기생 시조가 이별의 정한을 노래하고 있다고 본다면, 고려 속요가 이별의 순간을 노래한다. 기생 시조는 이별의 상황을 노래에 싣고 있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에 있어서 고려속요가 임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기생 시조는 수평적 관계로 보인다. 기생 시조는 과거이므로 자아를 성찰하고 묻고 답하며 간접적으로 발화한다. 발화에서도 고려 속요는 이별의 순간에 발화하는 것으로 보며, 직접적이고 절박한 상황을 그리고 있다.
여류 시조는 그 작자가 대부분 기녀들이었다. 비록 천민에 속하는 계급이었지만, 그들의 교양은 선비들에 견주어 어느 면에서도 손색이 없었다. 이들의 시조는 여성만이 지닌 섬세한 감정으로 진실하면서도 절실하게 사랑을 노래한 까닭에 더욱 감동적이다. 특히 재도지기(載道之器)의 역할을 했던 사대부들의 시조와는 달리 여성 특유의 우아한 정서를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발전시키고 있다. 이들 작자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으나, 시조에 얽힌 일화가 많이 전하고 있어 그들의 면모를 읽을 수 있다.

기생 시조의 문학적 수준
조선 중기의 시조로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유일하게 여성층이 참여하고 있는 기생시조다. 이 시대의 기생 시인은 사실 통틀어 10여 명에 지나지 않고 작품 수도 15수 내외밖에 되지 않아, 사대부시조에 비한다면 무시해도 좋을 만큼 양적으로 미미한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대의 기생시조가 주목받는 것은 특히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사대부시조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따라 가치 지향성이 강하여 시로서의 순수한 서정적 정취를 맛보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시조를 통해 드높은 정신세계를 발현한 대가로, 아름다운 예술적 향취를 발산할 시조의 미적 가능성 발견은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점이다. 기생시조에서 주로 사랑의 제재는 영원히 반복되며 개발될 문학적 제재이자 미적 영역임을 알 수 있다.
둘째, 시조를 창작한 30여 명의 역대 기생시인 가운데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인들이 거의 대부분 이 시대에 집중되어 있다. 황진이, 홍랑, 이매창 등의 출현은 이 시대를 더욱 주목했다.
대표적인 기생 시인들이 모두 이 시대의 인물이기 때문이다. 특히 황진이는 송도(개성)의 기생으로 가야금과 노래에 뛰어났다. 당당히 어깨를 맞대는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으며, 여기서 황진이를 특히 주목하는 것은 기생 시조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문학적 수준을 바로 그녀가 성취해 내고 있다는 점이 대단하다고 보는 것이다.
기생 시조는 가집 외에 수록 문헌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가집에 수록하였다. 가집 편찬자의 각별한 관심과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작품이 남아서 전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편찬되던 18, 19세기 당대의 기생 시조가 특히 더욱 그러하다. 일부의 특정 가집에만 수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어, 대부분 가집 편찬자의 개인적으로 관심이 없었다고 하면 사장되어 없어졌을 것이다. 18세기 이전의 기생 시조는 겨우 20여 수로 이후의 작품들보다 양적으로 적은데다 세상에 널리 회자되는 잘 알려진 작품들만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수십여 종의 가집에 골고루 실려 있다. 작품에 얽힌 특별한 사연과 함께 수록되어 있는 점이 이런 사정을 뒷받침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기생들의 시조는 수동적인 사랑의 감정과 일방적 기다림을 노래하는 길들여진 매너리즘에 빠졌지만, 조선 후기 전반에 걸쳐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추락한 것과 것으로 보인다.2) 조선 후기에 급격하게 진행된 가부장제의 강화 및 어지러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결속을 위해 여성의 재산권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조건적인 순응을 강요하고 정절을 미화하기 시작한 사회의 분위기였음을 보게 된다.
지금까지 조선조 기생의 시조문학이 가지는 시조 문학적 특성과 문학적 수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특징을 살펴보면, 기생 시조는 상실의 상황에서 노래한다는 점인데 비해 사대부들의 시조는 흔히 관념적인 면이 보인다. 기생들의 시조는 서정을 표출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잘 살려서 시적 언어로 발전시켰다는 특성이 있음을 알게 됐고, 이처럼 기생의 시조문학이 발전하는 밑거름이 됐으며, 성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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