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8도에서 삼국통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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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성

조선8도에서 삼국통일은 없었다.

현재 일본 속담에 “거짓도 백번하면 참이 된다.(100番 主張すれぱになる)”는 말이 있다고 한다. 우리말에 진실은 꼭 밝혀진다는 말은 있지만 속담을 찾아도 신통한 것이 없다. 과연 거짓도 백번하면 참이 되는가? 그렇다면 거짓과 참의 경계는 무엇인가?

김부식은 진삼국사표에서 “지금의 학자와 관리들 가운데 오경 제자의 서적과 진․한의 역사에 대해서는 정통하여, 이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작 우리나라의 사적에 대해서는 그 전말을 알지 못하니 이는 심히 개탄할 일이라고 생각하시게 되었습니다.(今之學士大夫其於五經諸子之書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詳說之者至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嘆也)”라고 했는데 그야말로 삼국사편찬이후에 우리역사를 바로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일연의 삼국유사부터 단재의 조선사연구초까지 고리 이전을 나타낸 사서를 부정하면서 역사를 창작하고 있을까? 이 말은 어찌 삼국사와 동이전같이 가르치지 않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고려이전을 나타낸 사서라고는 우리가 펴낸 삼국사와 지나가 펴낸 18사동이전이 있는데 일연부터 신채호까지 삼국사와 동이전을 왜곡하여 창작을 하여 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삼국사」와 동이전어디에도 조선8도에서 삼국통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현재 국사를 보면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고 가르친다.

그런데 고리 이전을 나타낸 「삼국사」와 지나18사동이전에는 조선8도에서 신라가 삼국통일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어찌된 일인가?

백제가 망하고 고구리가 망한 것은 「구당서」「신당서」「삼국지」가 있다. 그러나 그곳에 조선8도에서 백제 고구리가 망했다는 기록도 없고, 조선8도 지명을 나타낸 것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조선8도에 삼국통일 신라가 있다는 것이 만들어졌을가?

그것은 「삼국유사」 밖에 없다.

우선 웅주를 공주라고 한 것이 「삼국유사」 밖에 없다. 분명히 「삼국사기권36」에서 웅주는 분주라고 했는데 「삼국유사」가 웅주는 금 공주라고 했으니 이곳에만 백제 위치가 조선8도에 맞추었다.

동이전에는 없으나 「삼국사」에는 삼한과 삼국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나타내는 기록이 있으나 조선8도라 하지 않았다. 일연은 최치원말을 인용하여 삼한과 삼국을 말했으나 위치가 조선8도라고 하지 않았으나 일연이 조선8도에 맞추었음을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삼국유사」 역사부분을 「제왕운기」에 시로 담았는데 그 위치를 洪濤萬項圍三面(큰파도 출렁출렁 3면을 둘러싸고 於北有陸連如線(북녘에 대륙 있어 가늘게 이은 땅)이라고 말해서 반도사관에 맞춘 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일연이 삼한과 삼국을 말할 때 인용한 글은「삼국사기권46」에는 위치를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 있는데 일연이 숨기고 조선8도에 맞추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위치에 대하여 최치원은 고구리‧백제가 강성 백만으로 남으로 오‧월을 침범하고, 북으로 유‧연‧제‧로를 흔들었다.고 했으니 위치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지명과 달리 오월과 유연제로는 세계에서 그 위치가 지나 동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동파는 그 위치를 지도에 표시를 했다.

분명히 삼국사에는 고구리 백제 남으로 오‧월, 북으로 유‧연‧제‧로를 다물했다면 그 지역에서 패망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일연이 숨기고 백제 패망을 조선8도로 창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일연만이 아니라 조선시대 성호이익도 「성호전집」권26에서 태사시중장에 대하여 何故漏此不能特書可笑라는 글을 남겼는데 아마도 일연도 그렇게 생각하고 외면하고 숨기고, 삼한과 삼국만을 인용하고 백제 고구리 패망을 조선8도에 맞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일연은 어찌하여 삼국 패망을 조선8도에 맞추었을까?

그것은 소동파의 지장도를 보았기 때문에 소동파는 믿어도, 삼국사와 동이전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일연은 최치원글을 보고 인용도 했고, 소동파의 「지장도」에서 ‘고금화이구역총람도’를 보았다면 과연 최치원말이 옳은지 아니면 소동파가 옳은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았어야 한다. 우선 오‧월과 유‧연‧제‧로는 아시아 아니 세계에서도 그 위치를 나타내는 것은 오직 지나를 떠나서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삼국사기권46」을 입증할 다른 기록이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일연이 보았는지 알수 없지만 「남제서」권58이 「삼국사기권46」를 입증하고 있고, 또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이 입증하고 있었다.

「남제서」권58과 「삼국지, 후한서」 동이전은 같은 지역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것을 확인하는 데는 송나라 대 제작된 우적도가 「중화민국지도집」과 같기 때문에 삼국지명을 그 대로 인정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일연은 아무것도 확인하지 않고 「삼국사」와 동이전을 왜곡했다.

최치원말인 상대사시중장을 「남제서」권58이 입증하고 있다.

우선 최치원이 말하는 오‧월과 유‧연‧제‧로 지역에 「남제서」권58 백제 고구리 지명이 있다.

최치원 말을 「삼국지, 후한서」동이전이 입증한다

우리는 「삼국지」권30과 「후한서」권85를 많이 인용하여 조선8道를 나타낸 것으로 가르치고 있으나 이 사료는 「남제서」권58범위를 나타내고 「삼국사기권46」을 대변하고 있다.

일연이 낙랑국항목을 만들어 놓고 漢나라 낙랑군으로 덮었다. 그리고 동이전을 황해 동쪽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여 낙랑국을 묻어 버렸다. 본래 동이전의 제일 동쪽이 옥저로 옥저 동쪽은 낙랑국 지역이고 낙랑군은 예의 서쪽에 있어서 사람으로 치면 왼팔과 오른팔로 보아야 하는데 낙랑군으로 낙랑국을 덮어므로 인하여 낙랑국 지역 역사를 오리무중으로 만들고 말았다.

일연부터 왜곡을 시작한 것이다. 황해 동쪽은 한나라 낙랑군으로 완전히 덮고 말았다. 이것이 「삼국유사」인 것이다.

소동파는 기자와 김유신의 일통삼한을 한꺼번에 밀어냈다.

지나에서 한무제가 한나라를 건국하고 가장 껄끄러운 존재가 동이였다. 그래서 동이역사를 지우고 싶었으나 사기권30의 江淮사건와 滄海사건을 기록하면서도 동이를 나타내지 않고 싶었다.

그 이후 사서를 편찬하면서 동이전을 두었으나 어떻게 하던 동이전을 밀어내고 싶었는데 동원한 인물이 箕子이다. 조선의 기자를 통하여 밀어내고 싶었는데 그것이 김유신의 三韓一統을 함께 묶어서 밀어낸 것이다. 이것은 漢唐이 지나 대륙을 통일한 것으로 하는데 걸림돌이 제거된 것이다. 그래서 소동파의 역대지리지장도는 2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하여 주는 것이었다.

25사에서 기자를 조선8도까지 밀어내는 작업은 箕 즉 西華를 두고 塚은 몽성에 있다고 하면서도 기자후예 箕丕-箕準이 활동하던 번조선으로 1차 밀어내서 왕검성을 위만에게 던지는 것이었다면, 2차로 밀어내는 것이 만주로 밀어내고 3차로 평안도 평양까지 밀어내는데 성공을 했다(?).

그러면서 동이전을 밀어내는데 결정적인 것이 바로 삼국사기권46 삼국을 황해 동쪽으로 밀어내면 완벽하게 밀어낼 수 있는데 이용된 것이 바로 김유신의 신라를 밀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최치원이 말하는 신라와 고구리 동쪽에 있는 신라를 겹쳐 하나로 보이게 하는 것이다. 분명히 삼국사에는 전부 왕이라고 했던 최치원의 신라와 麻立干 즉 可汗이전 통치자를 왕으로 변경한 신라가 있음을 신구당서 삼국사 삼국유사 모두 말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로 결정하게 되는 계기가 바로 바로 소동파의 지장도였다. 누가 봐도 황해 동쪽에 삼국이 있었던 것으로 믿게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 한 장이 바로 고금화이구역총람도인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와 신구당서에 두 신라를 기록하고 있음에도 이를 외면하고 있는데 고지도가 나타난 것이다. 바로 두 신라를 기록한 지도가 이집트박물관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당서에서 고구리 동쪽에 신라가 있고, 마한 땅에 건국한 백제 동쪽에 신라가 있다고 교묘하게 포장된 것을 잘못 해석하여 교과서에 만든 것이 신라지도인 것이다.

공교롭게도 진흥왕순수비가 구당서의 고구리 동쪽 신라를 덮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삼국사와 동이전 그리고 일연도 자장법사라는 한사람이 선덕왕 신라와 정신대왕 신라를 기록하면서도 두 신라를 모르고 최치원 말을 빌려 삼한과 삼국을 말하면서도 위치를 나타낸 것을 외면하고 숨겼다. 그리고 삼국사와 동이전을 믿지 못하는 사서로 만들어 韓中 고대 왕권들의 시선을 피하게 되고 관심을 두지 않게 하여 오늘날까지 김부식찬삼국사로 남게 한 공로는 바로 역사왜곡이 우리에게 준 가장 커다란 선물인 것이다. 일연의 삼국사 더욱 최치원전 기록으로 모든 것을 묻게 만든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

동이전과 최치원의 상대사시중장을 제자리에 놓으려면 韓中이 함께 해야 되는데 중화는 漢唐지나통일론이 무느지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조선8도인은 신라가 631년에 고구리장성 남쪽을 다스린 것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바로 김유신을 조선8도 인물로 만들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일연이 그렇게 해왔던 것으로 답습하고 싶은 것이 소동파와 같은 마음이 있는 사대사상 때문일까?

九黎와 조선과 高句麗의 다물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삼국사와 동이전은 우리조상들은 아시아를 무대로 활동했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일연의 반도사관이 발목을 잡고 삼국사와 동이전을 주정적으로 보게 하여 자부심을 잃게 하고 있다.

통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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