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 첨성대를 찾아라

우리의 역사, 문화는 우리가 바르게 정리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가 아니면 누가 우리 역사를 바르게 정립해 줄까? 우리민족 스스로가 바른 우리의 역사를 정립하지 못하는 허약한 민족인가? 우리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민족일까? 주변국들은 우리의 땅 우리의 역사를 침범하면서 계속 역사침범 등 역사전쟁을 감행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제라도 제대로 역사의식을 갖고 남들이 우리 역사, 문화를 왜곡 훼손하는 일에는 적극적으로 방지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바른 순서라고 주장을 하면서 그런 노력의 일환으로 사라져 가는 역사유적 유물에 대한 복구와 회복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번호에는 창녕의 향토사학자 오석문(吳錫汶) 선생(《비밀왕국 비화가야>, 《창녕 진흥왕비 신설》, 《비화가야사>)의 글을 통해서 접근해 본다.

창녕 첨성대

창녕에도 첨성대가 있는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소위 제2의 경주라고 불릴 정도로 과거 유물 유산들이 즐비한 곳이 창녕이다. 첨성대의 목적은 무엇일까. 별을 보는 곳일까 아니면 제의를 올리는 장소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만약 이것이 별이나 태양을 관측하는 첨성대라면 여기기엔 하나의 나라가 조재했다는 말이 된다. 별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나라의 운세를 짐작한건 왕국이 아니고서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첨성대는 왕이 거주 하는 궁궐 안에 있어야 하는 시설이기 때문이다. 별들의 운행을 보고 즉각 왕에게 보고를 하고 대응책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러한 거대 왕권의 상징물인 첨성대를 품고 있었던 왕권과 궁궐의 존재를 짐작해 볼 수 있겠다. 흔히 강단사학이 주장하기는 비화가야라고 말하고 있지만 고구려에 예속된 지방간의 나라쯤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창녕에 먼저 생겼던 첨성대는 보잘 것이 없었지만 그래도 창녕지역의 권위와 유구한 역사성을 말해 주고 있다. 훗날 경주에 신라라는 나라를 갖춘 왕국이 본격 출현하면서 좀 더 크고 세련된 첨성대가 생겼다고 창녕 향토연구가 윤순철 씨는 언급했다.

하지만 그렇게 흔적을 갖고 흘러왔던 첨성대가 1960년대 전후한 시기에 첨성대가 철거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잔해물은 어떻게 처리됐는지 《창녕군지》나 여타 역사 관계지에도 전혀 기록을 남기지 않았고 주민들의 기억 속에서도 점점 잊히면서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런 상태로 지속되면 당시의 생존자들이 세상을 하직하면 창녕 첨성대에 대한 기억은 거의 소멸하게 될 것이다. 창녕의 향토학자인 오석문 선생은 소멸되어갈 기억을 환기시키고 과연 이것이 무슨 용도로 축조됐던가 하는 점을 부각하면서 설명을 하고 있다.

경주 인왕동에 선덕여왕이 세운 축조물을 첨성대(瞻星臺)로 명명한 후로 계속 첨성대를 고정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축조물의 규모나 구조 등을 연구해보면 정교하고 복잡한 첨성(瞻星)보다는 첨일(瞻日)의 용도가 더 맞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첨성을 하려고 하면 대의 상부공간이 넓어야 한다. 최소한이나마 첨성기구의 설치와 첨성 인력의 활동공간과 확인 내용을 기록하는 공간들이 필요한데, 현재의 구조물은 그런 필요 공간이 확보되어 있지 않다.

한두 명의 관찰자가 밤하늘을 관찰한 후 별자리를 머릿속에 기억해두었다가 수십 보 떨어진 기록소로 돌아가 도면에 정리를 했다는 등의 추리는 어설픈 억측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모양은 그려낼 수 있겠으나 별자리의 거리나 각도, 밝기의 분류 등은 기억으로 그려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첨일대로서의 용도를 설명하기에는 아주 쉬우면서도 과학적일 수 있다. 그는 창녕에 있었던 이 구조물을 ‘첨일대’로 생각하면서 사용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도판 2)의 창녕 첨성대 구조를 보면 경주 첨성대는 중단부의 중창에 사다리를 걸쳐놓고 관찰자가 오르내렸다고 설명하고 있고, 창녕의 첨성대는 지상부를 연결하는 출입구가 지면에 마주 닿아 있다.

‘정자석이 얹혀 있는 상단에서 내려오는 태양 광선은 첨성대의 바닥 중앙에 조사선을 만들고 이때는 하지를, 중창을 통해서 비스듬히 내려오는 조사선이 바닥 출입구의 경계면에 이를 때 춘·추분을, 중창으로 들어온 조사선이 출입구의 상단과 일치할 때 동지를 알아볼 수 있다.

바닥 중앙에서부터 벽면으로 이동하는 그림자 선의 간격을 세분하는 눈금을 첨성대의 바닥과 벽면에 표시하면 춘하추동 4계절 사이 절기까지 관측할 수 있고 24절기를 모두 계산할 수 있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하면서도 정확한 측정 방법이므로 실용적이다.

그래서 그는 이것을 ‘첨일대’로 보고 태양 그림자 관측에 사용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게 사용하면서 중요한 시기에는 하늘과 조상께 제사를 올리는 신앙의 대상물로 신성시했던 축조물이었을 것이라고 그는 정리를 한다.

창녕 첨성대 제거 의도

과거의 유적, 유물을 특별한 이유 없이 철거, 제거하고 그러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때는 역사 단절이라는 불순한 저의가 깔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수법은 그 이전 일인들이 많이 써왔던 방법인데 우리 정부 산하에서 어떻게 이런 악행을 저질렀는지, 또 창녕인들은 왜 방관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악행을 저지른 범죄 세력이 누구인지 누군가는 꼭 밝혀주었으면 하는 당부를 남기고 싶다고 말한다.

현 시점에서 일부 인사들은 ‘남아 있는 사진도 없는데 어떻게 아나?’ 또는 ‘나는 어릴 때 본 적이 없는데 그런 것이 어디 있었나?’ 등의 아주 무관심하고 성의 없는 반응을 보이는 이가 간혹 있다. 이에 대해 창녕에 첨성대가 있었던 정확한 위치를 도면으로 소개하고 있다. 이를 기억하는 이는 기억을 되살려주기를 바라고, 당시의 철거 사건과 연관되는 내용을 알고 있는 이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창녕시가지 전역은 불교 성지

예전부터 창녕 사람들은 ‘창녕 시가지 전역이 절터였다’고 말해왔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예사로 들어왔던 말들인데 떠다니는 헛말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불사국’ 이라는 국명이 ‘佛事國’의 음차 전달 기록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리와 비화가야국(非火伽倻國)의 국명이 뜻하는 바를 고려할 때도 그렇고 현재 남아 있는 유적과 유물 분포 상황을 보아도 그렇다.

화왕산 관룡사로부터 목마산성을 따라 내려와서 시가지 북편의 ‘인양사 비석’과 비석의 남쪽에 있는 ‘서3층석탑’, ‘퇴천 3층석탑지’와 동으로 자련사, 옥천사를 거쳐 관룡사로 돌아가는 선을 연결하면 창녕 시가지 전역을 감싸는 원형선이 만들어지고, 그 구역의 내부에 술정리동3층석탑, 직교리 당간지주, 첨성대, 송현동 석불좌상 등이 배치되어 시가지 전체가 사찰 영역임을 알려주는 불읍(佛邑)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첨성대는 첨일대 역할을 하면서 중요한 시기에는 제사를 올리는 불교 신앙의 대상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고 한다.

불사국은 부처를 섬기는 나라이고 비화가야국은 불을 다스리는 절의 나라라고 해석했던 방법을 따라가면 비화가야국의 도읍은 불읍으로 불사가 왕성했던 마을이 되는 것이다.

그 불읍(佛邑)에 인양사(仁陽寺)라는 거찰(巨刹)이 있었는데 흔적 없이 사라진 후 비석 하나만 외롭게 남아 있고 첨성대는 누군가에 의해 분해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첨성대가 있었던 1960년대 전후한 시기에는 창녕읍내는 모두 절터였다는 말이라도 전하고 살았지만 첨성대가 없는 지금에는 이 말도 서서히 잊혀 가고 있고 고향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는 세대들은 설사 그런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가까운 장래에 이런 사실들이 성실한 연구의 결과로 밝혀지고 제대로 정리가 되면, 중국 사서에서 의미 없이 전하는 불사국(不斯國)이라는 국명은 불사국(佛事國)으로 문자를 정정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불사국(不斯國)은 불사국이라는 우리의 발음만을 전하고 있을 뿐이며 뜻은 비하하는 내용이기 때문이고 어차피 발음만을 취한다면 불사국(佛事國)의 불사국 발음과 다를바 없기 때문이다.

중국사서가 전하는 의미 없는 문자 불사국(不斯國)에 손도 대지 말라는 태도는 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며, 우리는 아닌 나라’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를 섬기는 나라’를 말하는 것이고 발음은 ‘불사국’으로 문자는 ‘佛事國’인 단어를 쓰자는 것이므로 북위가 변조한 우리 지역의 국명은 우리 손으로 수정하는 것이 훌륭한 문화민족이 가져야 할 태도라고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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