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 상고 사회인과 한국 상고인의 춤은 어디서부터였지?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에서 상고 이래 사람들이 언제부터 춤을 추었는지 살피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차분한 검토가 필요한 분야다.

한국과 관련하여 그나마 중국의 《통전(通典)》 등에 이른바, 동이지악(東夷之樂)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음은 다행일 수 있고, 주목되는 바이기도 하다.

東夷之樂을 거론하고 있는 중국 문헌의 한 예(《通典》《白虎通) 등)

곧, ‘東夷之樂 持矛舞, 助時生也’라는 내용이 그러하다. 그런데 해당 문헌 속의 춤이 어째서 창으로 연희되었는지 의문인데 바로 助時生이란 내용에서 바로 확인된다. 곧 때에 따라 생육하는 바를 돕고자 창을 쥐고서 춤을 추었다는 뜻이다.

춤추는 이가 손에 창을 쥐었는데, 그 창은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공격하는 것이 아닌 땅의 작물이 생육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생산 촉진 도구인 셈이다.

여기서 고구려의 벽화에 보이는 ‘덕흥리벽화 안길 괴수도의 그림’과 ‘통구사신총 널길 부분의 수문장 그림을 견주어 볼 필요가 있다. ‘덕흥리 벽화 안길 수도의 그림’을 보면 마치 중국 고

사에서 나오는 이른바 ‘치우’의 형상과 매우 유사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집단적으로 펼쳐지는 잠개춤의 모습이 잘 형상화된 중국의 한 암각화를 거론해 보는 것도 이해를 깊게 할 터이다. 해당 암각화는 신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전하고 있는데, 춤추는 대다수 사람이 한 손에 방패를 쥐고 있고, 남성들이 병장기를 쥐고 있다. 물론 여성들은 별다른 병장기를 쥐지 않은 빈손인 상태임이 비교가 된다. 어째서 신석기시대에 그와 같은 집단적 잠개춤이 펼쳐졌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다.

다만 신석기 후반에 동북아에는 해수면의 상승에 따른 대규모의 홍수가 있었고, 그에 따른 부락간의 연합이나 읍락을 이룬 대집단 간에 갈등이 심화되었을 텐데, 치우 부락과 황제 헌원 부락간에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적 충돌이 《사기》나 《관자》 등의 중국 고문헌에 마치 설화처럼 소개되는 점은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그와 같은 부락과 읍락 단위의 대규모 집단적 갈등 과정에서 잠개(병장기)는 자신은 물론 가족과 씨족. 그리고 전체 읍락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내는 수단이 되었을 것이고, 그러한 잠개를 이용한 집단 무용의 연희가 전체 구성원의 단결력을 과시할 요량에서라도 펼쳐졌을 개연성은 충분히 짐작되는 바이다.

덕흥리벽화 안길 괴수도의 그림

피맺힌 세력 간 갈등 속에 피어난 집단 무용

동방 상고사회의 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 속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하는 자료로 《묘족사(苗族史)》가 있다. 이 기록은 묘족에 관한 설화를 기록하고 있는데 나름 독특한 내용들이 특별히 참고할 만하다.

《묘족사》에 근거하면, 운남성 문산의 마관 등지에서는 매년 전통절에 ‘채화산(踩花山)’이란 연희를 베푼다고 소개한다. ‘꽃 산을 뛴다’는 내용의 이 연희 내용을 보면, ‘채화산은 옛 상고시대 강대 부락(强大部落)의 군사수장(軍事首長)이던 치우를 제사하고자 베풀어졌는데, 전하는 설화에 따르면 치우는 황제족(族)과 싸우다 실패하여 동진(東進)했고, 깊숙한 산 빽빽한 숲 속에 후퇴하여 들어서 각처로 흩어져간 묘족 무리를 소집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래서 묘족 두령이 산 위에 뿌리가 긴 나무 장대를 세워 일으키고, 그 위에 붉게 채색된 허리띠를 매었고, 청년 남녀로 하여금 꽃 장대(花杆)를 돌고 생(笙)을 불고 뛰며 춤추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각 지역 부락 사람들이 전해 듣고서 찾아오기를 시끌시끌했고, 대가(大家)에서는 깃발과 북(旗鼓)을 무겁게 떨치었고, 황제 부족(黃帝部族)과 전투를 진행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꽃 장대(花杆)를 돌고 생을 불며 뛰어 춤추는 악무(樂舞)가 뒤에도 이어져 ‘채화산‘이라는 풍속을 이루었다는 게 설화의 골자이다.

’채화산‘ 풍속 관련 설화 내용을 통해 다음 몇 가지를 주목하게 된다.

1. 설화를 통해 치우(尤)의 군진 세력(軍陣勢力)이 황제 부족(黃帝部族)과 전투에서 불리해지자 잠시 산상거주(山上居住) 기간을 갖는 점이다.

2. 산상 거주 기간 내에 각처로 흩어져 간 부족 성원을 다시 결집시키고자 하는 의도로 일종의 축제가 기획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묘족 두령이 근장수간(根長樹杆)을 세웠고, 청년 남녀들이 꽃 장대(花杆)을 돌며 악기인 생을 불고 뛰며 춤추었다는 점이다.

비록 설화라는 제약성이 있어 역사성을 논하는 데 상당한 한계가 있긴 하지만 해당 설화는 치우 세력과 황제 세력의 상쟁 시기에 산상거주(山上居住)의 양상을 전하고 있어, 같은 시기인 신석기 후기에 조성된 산 위의 마을이 지니는 방어적 기능과 일정한 연관성이 있다.

운남창원(무도목방전투도源)의 (舞蹈牧放戰爭) 암화(이 암화에는 신석기 사회 속의 집단적 잠개충이 드러나 있다.)

또한 치우 세력이 산 위에 거주하며 군사적 재기를 꾀하는 과정에 뿌리가 길게 자란 남누장대(根長樹杆)와 꽃장대를 들고 나와 축제의 분위기로 싸움에 임하는 열의를 되살렸다는 내용은 20세기 한국의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신채호가 거론한 이른바 ‘수두(蘇塗)’와 그 수두 제단의 무사가 지녔던 문화적 성격과 맥을 달리하지 않음을 읽을 수 있다.

‘채화산’ 풍속 관련 내용을 통해 치우의 군진에서 베풀어진 집단 연희의 과정에서 황제 헌원의 군진과 맞서 싸우고자 소집된 치우에게 충성을 하던 전사들이 각기 지닌 도검과 창, 그리고 방패 따위의 무기를 소지한 채 전의를 불태우며 뛰고 춤추었음은 누구나 쉽게 추론할 수 있는 광경이다.

그 같은 추론과 함께 “위대하구려! 치우는 부를 축적하였고, 군중은 사방에서 와서 믿고 기뻐했다. 의관에 칼을 두르고 말에 올라타고 실었으며, 사방의 바다에서 배편에 실어 날랐으니 모두 하늘의 공덕을 좇은 것이다.”라고 치우와 그 읍락인들의 문화를 거론하여 전하는 <태백진훈>의 한 대목도 비교가 된다.

<사기(史記)> 등의 숱한 중국 문헌에서 오병(五兵)의 병장기를 만들었다는 치우가 <태백진훈>에서는 치우 본인이 의관에 칼을 둘렀음을 짐작하게 함은 물론, 그 휘하 장졸들 또한 오병 등으로 무장하고, 배편을 통한 왕성한 대외 활동을 벌인 점을 넉넉히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라 하겠다.

비록 설화적 자료라는 한계를 지니지만, <사기>와 <태백진훈》, 그리고 <묘족사>> 등 적지 않은 관련 자료를 통해 동아시아의 상고시기에 강대해진 읍락 사회(社會) 안에서 각 부락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군사 세력화 과정을 거쳤고 그 과정에서 병장기를 휴대한 채 참여한 집단적 군사 연희의 마당에 모두 구성원으로 참여했을 개연성은 높다. 앞서 거론한 중국 암각화상의 집단적 잠개춤 모습은 그 같은 추론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다.

한국무용 행위 속에 꿈틀대는 경천 의식과 사귀 진압의 의지

잠시 여기서 시기를 끌어내려 조선조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조선조 여성 검무의 종결 부분에서 검무연희자(劍舞演戱者)들이 모두 두 칼을 땅에 꽂듯이 하며 마감하는 점이 주목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처음 이러한 모습을 본 관람객이라면 다소곳한 검무 연희자가 몸을 수그리면서 두 손으로 두 칼을 살포기 잡고서 조용하고도 얌전하게 땅에 꽂는 모습에 미학적 엑스터시를 느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장면은 솔직히 다소 관능적으로도 느껴지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조 검무의 마지막 모습은 여수시 오림동의 고인돌 덮개돌 벽에 새겨진 땅으로 향한 석검의 이미지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고구려의 ‘통구사신총 널길 부분의 수문장 그림’이다. 한 손에 쥔 창은 여수 오림동 고인돌 암각화상의 석검과도 같은 강렬한 힘(에너지)의 상징이겠고, 다른 한 손의 香 같은 기물에서 행복 기원의 상징일 가능성이 느껴진다.

칼날이 땅으로 마치 박하듯 꽂힌 모습은 하늘의 영험한 기운이 땅에 사는 사람들을 위협하는 재액(災厄)을 짓누르는 이미지로 와 닿기도 한다. 경천(敬天)의식과 사귀진압(邪鬼鎭壓)의 강렬한 이미지로 와 닿기에 충분한 회화적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고인돌 덮개돌 벽에 그려진 석검의 그 같은 이미지가 검무 연희자가 마지막으로 두 칼을 땅으로 꼽듯이 취하는 모습과 쉽게 오버랩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창을 쥐고서 추었다는 동이인(東夷人)들의 습속도 결국 날카로운 오림동 암각화 속의 석검처럼 인류 행복을 이끌어 내는 수단으로써 상징물로 추론함에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하다.

따라서 고구려의 ‘통구사신총 널길 부분의 수문장 그림’도 상당히 새로운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해당 벽화의 내용을 보면 건장한 남성이 한 손에는 창을 쥐고서 굳건하게 춤을 추는데 다른 한 손에는 마치 향기를 내뿜는 듯한 기이한 형상의 병을 들고 있다. 바로 그 같은 모습은 앞서 거론한 것처럼 지상 세계의 번영과 복락을 추구하고 기원하는 제의적 모습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터이다.

그러므로 조선조의 한문 자료인 《무당내력(巫黨來歷)》에 보이는 별성거리(別星巨里)의 여성 무인(巫人)상의 모습에서 두 손에 쥔 삼지창(三枝槍)과 도(刀)가 지닌 의미를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다. 역시 세상의 행복과 복락을 기원하고 있음이 그 모습이 지닌 대체의 의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당내력》에 보이는 별거리가 본래 상고 조선 땅을 오곡 따위로 풍성케 하고자 애쓴 시신 고시례를 추앙코자 하는 풍속과 연관됨으로 별성 거리의 여성 무인(巫人)상 모습이 어쩌면 상고조선 당시의 위대했던 위인을 추앙하는 여성 사제의 모습을 전하는지도 조심스럽게 고민해 볼 점이기도 하다.

글 김영해(한국민속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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