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아리수’인가?

서울을 끼고 흐르는 경강 그리고 마포와 양화나루를 지나는 서강, 우리민족의 정한과 역사를 함께 흘러가고 있는 한국의 젖줄이다. 이러한 한강을 ‘아리수’라는 이름을 들여다 쓰는 이유는 뭘까.

대륙을 누비다가 한반도로 넘어온 우리 민족은 1402년 명으로부터 ‘조선’이란 국호를 받았고 1403년 대륙의 양자강 이남과 대만의 왜에서 일본 열도(현재 일본)로 이주한 민족은 ‘일본’이란 국호를 받게 된다. 대륙에서의 우리 역사를 깡그리 없애버린 조선과, 그리고 대륙에서 왜의 역사를 고스란히 옮겨가게 된 일본과 차이는 무엇일까? 대륙 역사를 파괴시켜버린 조선은 몇 차례 점령당하고 일본은 옛 강역을 못 잊어 대동아공영이란 미명으로 항시 대륙을 너머다 보고 있다. 일본은 소도의 땅인 한반도를 침략의 근거지로 만들기 위해 온갖 역사 기록의 행간에서 유리한 말들을 뽑아내고 왜곡까지 시켜서라도 침략의 명분이나 구실을 삼았다고 오재성 삼국사연구회장은 말한다. 작은 집이 종가를 넘보는 식이다.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펼친 대의명분도 여기 역사의 행간에서 찾을 수 있다. 중원 땅 즉, 양자강 이남의 월나라 구천의 후예인 이들은 고조선의 제후국 즉, 작은 집으로 대륙의 역사를 갖고 일본열도로 넘어갔다. 그 당시 양자강 이남에 있던 왜가 그 강을 건너서 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고조선과 사로신라를 침략한 역사적 사실을 묻어버리고 마치 일본열도에서 현해탄이라는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신라를 침략했다는 문맥으로 바꿔 침략의 의욕을 자국민에게 세뇌시켜 왔던 것이다.

한반도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일본 열도에서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를 쳤다는 역사를 조작하기에 이른다고 역사학자들은 언급한다. 바다의 조류를 따지면 일본에서 해류를 거슬러 한반도로 오기 위해선 엄청난 모험이다. 대신 한반도에서는 뗏목을 타고 그냥 있어도 해류를 타고 곧장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이다. 우리민족이 해류를 타고 건너가 일본의 왕족이 됐지만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기는 힘든 바닷길이란 게 해양학자들의 분석이다. 과거 대륙의 삼국시대 이야기를 빌려 왜가 양자강을 건너 고조선을 침공했다는 사료를 비틀었다. 그들 선조들이 그 험한 바다를 건너가서 한반도에 있는 신라를 침략했다는 기록 한 줄을 왜곡시켜 오랜 세월 국민들의 의식을 세뇌시키면서 침략 의욕을 고취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결국 조선시대에도 끝없이 한반도를 노략질하는 명분을 삼았던 것이 임진왜란이 된 무서운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재야 사학자들은 주장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우리는 이제 ‘한강’을 ‘아리수’라고 명명하고 서울시가 나서서 먹는 생수병 상품까지도 ‘아리수’라고 이름 붙이면서 일본의 침략적 명분을 증명 시켜준 꼴이 됐으니 경천동지 할 일이다. 이 나라 국민들은 정말 민족의식이 있는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그들의 의도에 협조하는 음모가 있는 건지 궁금해질 뿐이다.” 우리역사교육원에서 역사와 설문해자를 가르쳤던 정윤훈 우리역사문화아카데미 원장은 우리들 스스로가 분별없이 ‘한강’을 ‘아리수’라고 부르는 것은 또 다른 이적행위라고까지 표현했다.

정윤훈 원장은 “아리수에 대한 심포지엄이 지난 2005년 3월 7일 있었고 5월 25일에 개최된바 있었다. 서울시 상수도 사업본부에서 수돗물 불신이 심해지자 수돗물 신뢰를 제고하기 위한 일환책으로, 수돗물을 ‘아리수’란 브랜드로 상품화해서 시판을 하게 됐다. 이게 빌미가 되어 법적인 문제와 혈세낭비, 명명 배경 등의 제 문제가 있어 <아리수 왜곡규명>의 편저자 김성구 의원(2005년 당시 서울시의원)의 노력으로 2005년 3월 7일에 심포지엄을 실시하고 그해 5월 25일에 포럼을 개최했었다”고 밝혔다.

그의 말에 따르자면 ‘아리수’란 명칭에 대해서 “당시 서울시 상수도 사업본부의 설명에 의하면 현재 한강의 고대명칭이 ‘아리수’로 역사학자의 고증을 얻어 확정했다고 했다. 출처를 밝혔는데 속칭 ‘광개토왕 비문’을 근거로 제시했었다고 한다. 실제 ‘호태왕비’를 살펴보면 4면에 있는 탁본은 1989년부터 1903년까지는 아피수(阿被水)와 사피수(師被水) 또는 하피수(河被水)로 서로 다르게 탁본되어 있다. 그런데 1905년부터는 아리수(阿利水)로 바뀌어 지금까지 일본인 나이또(內藤)의 해석과, 청(淸) 학자 나진옥(羅振玉)의 해석을 답습하여, 국내의 여러 학자들도 예외 없이 그들의 충실한 추종자가 됐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淸, 日 양국 학자가 제시한 탁본을 자세히 살펴보면 1905년과 1932년 탁본에 아리수의 ‘利’ 부분이 禾(벼 화)가 아니라 示(보일 시)로 나타날뿐더러 刀(刂칼 도)부분도 없다. 또한 희미해서 알아보기도 힘든 상황이다. 이런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리수(阿利水)’가 아님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것은 일본이 교묘하게 비석의 글자를 바꾼 것으로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이날 포럼에서 주제발표자로 나선 정윤훈 원장은 “이 논쟁은 단순한 상표 이름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역사적 문제, 민족자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될 수 있으므로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며 “아리수 페트병의 광고문구와 로고 선택은 재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울시 수도국의 잘못된 ‘아리수’ 명칭의 ‘아리’는 어떤 사용례가 있는가. 서울시의회에서 개최한 포럼(2005년 5월 25일)에 제출한 정윤훈 원장의 논문 중에서 ‘-아리-’에 관한 조사 내용을 발췌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 수명(水名)에 나타난 -아리-가 들어 있는 예

만주에 있는 송화강의 본명 : 만주어로 숭아리우라(松阿里烏拉 송아리오랍)는 조선 세종 때 음차명(音借名)으로 ‘송화강’으로 불렸는데 천하(天河) 곧 은하수(銀河水)의 뜻이라고 한다.

2. 상용어에서 -아리-가 접두어로 들어 있는 예

남북이 합창할 수 있는 특별한 노래 ‘아리랑’에 접두어로 들어 있다.

3. 상용어에서 -아리-가 접미어로 들어 있는 예

열매나 꽃 등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을 ‘송아리’라 하고, 아래 위가 좁고 배가 부른 그릇을 ‘항아리’라고 한다. 인체 중에서 다리 아랫마디의 뒤쪽을 ‘종아리’라 하며, 여인이 머리에 물건을 일 때 받치는 고리 모양의 물건을 ‘또아리’라고 한다. 또한 산울림을 ‘메아리’라고 한다. 이와 같이 둥글고 휜 모양에 붙이는 접미어가 있는가 하면 작고 낮춤에 쓰는 말로 ‘이파리(잎+아리)’, ‘아가리(악+아리)’, ‘주둥아리’ 등이 있다.

형용사로는 찌르듯이 아프거나 쏘는 듯 한 표현을 ‘아리다’라 하며, 정신이 분명치 못하거나 판단이 어려울 때는 ‘아리송하다’라고 한다.

4. 어떤 이는 <삼국사기>에 있는 물 이름(水名)을 인용해 ‘…욱리하(郁利河)가 한강의 옛 이름 아리임을 증명하며…’로 표현했다. 이는 절운법을 전혀 고려치 않은 해석에 불과했다. 그것은 阿(언덕 아)자는 평성운이고, 郁(성할 욱)자는 입성운이므로 호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1920년 이후에 일본인들이 만든 조선어사전과 1946년 이후 우리 학자들이 만든 국어사전에 설명한 ‘아리수’에 대한 설명도 나온다.

일인들이 만든 사전에는 하나 같이 ‘일시적인 속임수(一時の瞞著手段)’로 설명했고, 우리의 국어사전에도 ‘속임수’ 또는 ‘한 때 속이는 수단’으로 설명하고 있다. 아리송하다는 의미로 보고 있다. 그 후 한글학회와 이희승 저서에는 ‘속임수’와 水名으로 설명하여 ‘한강의 옛 이름’으로 병행 설명하고 있다. 의도적이든, 몰라서 그랬든 간에 한번 잘못하면 책을 쓴 저자는 그 이름에 오점을 찍게 되고, 후손에게 멍에를 지우게 되며, 역사에는 죄인이 된다.

또 한강 표기에서 한자로 쓸 때는 한강(韓江)이 맞다. 그런데 사대주의자들과 일인의 앞잡이인 식민사관들이 한강(韓江)을 한강(漢江)이라고 바꾸어 버렸다. 우리나라의 큰 강이란 뜻으로 불린 한강(韓江)을 한강(漢江) 이라고 폄하해서 부르게 만들었다.

한국에 있는 강이 어떻게 한강(漢江)이라고 하는지 우리의 자존심을 위해서도 한강(韓江)이라고 고쳐 써야 한다.

고구려사에서 보면 한수(漢水)나 한강(漢江)은 중국의 황하를 말하고 있다.

또 “흔히 서울의 수돗물을 아리수라고 하고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고들 말한다”고 삼국사연구회장인 오재성 사학자는 언급하고 “그러나 일본인이 호태왕 비문을 변조하기 전인 1903년 永禧는 渡師被水이고, 정문탁은 1900년 渡阿被水이고, 1898년 三宅米吉은 渡阿被水이고, 1893년 那珂通世는 渡阿被水이고, 청명본은 渡阿被水이고, 井上本은 渡阿被水이고, 1889년 M스코란트는 渡阿被水이고, 小松宮本도 渡阿被水이고, 1889년 酒匂景信은 渡阿被水로, 1889년 橫井忠直은 渡阿被水라고 탁본이 돼있다. 그러다 1905년 이후에는 그 이전의 명칭에 대하여 우리학자들은 단 한 번도 해명을 한 기록이 없다. ‘아리수(阿利水)’라는 단어와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라는 단어는 분명히 다르다”고 오재성 씨는 지적했다.

이어 “그런데 2가지 강 이름에 주목하는 것은 초기 ‘아피수’로 해석되던 것이 아리수로 변경된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아리나예하(阿利那禮河)’는 <일본서기>에 있지만 ‘아리수’라는 단어는 1905년경 세상에 등장한다. ‘아리수’가 기록된 우리 고대문헌이 없고, 일본서기에는 ‘아리나예하’라는 기록이 있는데 신라를 침공할 때의 강이라는 것이다. 그 강 위치를 낙동강이라는 설과 압록강이라는 설도 있다”고 역사학자 오재성 선생은 말했다.

<일본서기>의 그 강을 굳이 낙동강이나 압록강으로 해석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나라 땅을 침공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자료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오재성 선생은 분석하고 있다.

佐伯有義의 六國史(1928)에서 낙동강이나 압록강을 아리나예하라고 하고 한국인 일부 학자들도 압록강을 아리수로 보기도 했다. 여기서 압록강을 아리수로 보는 것이 같으므로 결국 같은 강을 나타내고 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인이 압록강을 ‘아리나예하’라고 지명했고. 우리 학자들이 ‘아리수’라고 해석했다는 것은 한강도 ‘아리수’라고 확정할 때 한강이 아리나예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사용하고 그들은 의도에 의해서 <일본서기>의 강을 한반도에 맞추게 됐다는 것이다.

그들은 먼저 낙동강을 ‘아리나예하’라고 했고 다음이 ‘압록강’까지 올라가고 있다.

“그래서 한강을 ‘아리수’로 확정함으로서 한강이 ‘아리나예하’라고 하는데 동의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의 신라침공과 조선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는데 이용된 것이 아리나예하이므로 우리가 ‘한강’을 ‘아리수’로 인정한다면 침략을 정당화하는데 이용될 것이다. 우산도와 무릉도로 부르던 울릉군의 섬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송도·죽도라며 자기들 영토라고 우겨대는 일본인에게 우리 스스로가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다. 한강이 ‘아리수’라니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고 오재성 선생은 울분을 토로했다.

<삼국사기>권46의 “高句麗·百濟가 강성했을 때 강한 군대 백만을 보유하고 남으로 吳․越을 다물(侵:평정)하고, 북으로 幽․燕․齊․魯를 다물(撓:점유)하여 장안에 큰 걱정거리(蠹:먹다)가 됐고 수(隋)나라의 멸망도 요동정벌에 기인한 것이다.(高句麗百濟全盛之時强兵百萬南侵吳越北撓幽燕齊魯爲中國巨蠹隋皇失馭由於征遼)”는 기록을 가진 우리민족이 그 조작을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일제 식민사가들은 고구려가 백제를 평정한다면 당연히 유․연․제․로-오․월에 대입해서 연구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리수’를 한강에 맞춘 일본의 호태왕 비문변조를 밝히지 않고 있다. 아피수, 사피수, 하피수, 아리수 어떤 것이던 상관없이 광개토태왕의 백제 진출은 한반도의 서울 지역과는 무관한 것이다. 고구려가 백제 수도를 공격하기 위해 건넌 강은 한반도의 한강이 아니라 중원의 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한강을 아리수로 확정하는 것은 광개토왕비를 빙자해서 우리역사를 한반도 역사로 축소하고 왜곡하는 것으로 봐야한다. 따라서 여러 기록과 설명에서 ‘아리수’를 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게 이번 포럼의 결론이다”고 당시 서울시 김성구 의원이 <아리수 왜곡규명>에서 밝혔다.

<아리수 왜곡규명> 포럼에서 사회를 맡은 한국우리민족연구회 당시 여운건 회장은 “중국은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역사로 절취하기 위해 역사를 왜곡했고, 일본은 백 년 전 우리역사를 식민통치하기 위해 역사전반을 왜곡해 식민통치의 근간으로 삼았다”고 지적하고 “삼한정벌론이나 임나일본부설을 정당화하려고 광개토대왕 비문을 조작했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우리나라의 여러 강을 ‘아리수’라고 했다. 이것이 또한 와전되어 ‘아리수’가 옛 한강의 이름으로 둔갑한 것은 분명한 역사 왜곡이라 말할 수 있다”고 결론을 냈다. 이렇게 주변국들은 자국의 강역과 역사를 이용해서 우리강역을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데도 우리들은 이런 것에 무방비로 방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역사가 현재가 되고 미래가 되는, 살아있는 역사 속에서 강물이란 의미가 된다.

“더욱이 ‘아리수’는 1920년부터 1999년까지 우리말 사전에서 ‘속임수’라는 해설을 보고도 한강물을 아리수로 했다니 정말 기가 찰 노릇”이라고 오재성 선생은 언급했다. “‘아리수’는 명사로 ‘한 때 속이는 수단’이리는 아리송한 행위를 말한다.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 사전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아리수’가 입증한다. 과거의 한 사건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우리나라의 운명까지 흔들고 있다”고 말하고 “이 말이 많이 사용되지 않을수록 좋은 세상이라고 주장한다. 이 말의 쓰임새는 길거리 또는 도박장에서 속이지 말라고 할 때 사용되던 말이며 아리송한 행위를 할 때 사용되던 명사다. 또 학생들이 시험을 볼 때 서양어로 ‘커닝하지 말라’고 하며 밀려난 말로 ‘아리수 쓰지 말라’는 부정적인 명사로 사용하는 말로 대체돼야 한다”고 오 선생은 거듭 강변을 토한다.

서울시가 몇 년 전부터 한강을 아리수로 보고 수돗물을 ‘아리수’라 한 것은 광개토태왕비문을 들고 나왔다. 아리수로 해석하는 것에는 신중을 기해야 하며 ‘아리수’로 확정해서는 안 된다. 더욱이 그들은 압록강을 아리수로 보았고 아리나예하도 압록강으로 보았다. 역사적 유래를 따지면 ‘아리수’란 하나의 보통명사이지 고유명사로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는 점도 포럼에서 대두됐다.

“25,000년 이전 황해가 몽골 또는 만주지역으로부터 대만 남단까지 대략 3,000Km 이상의 큰 강이 되어 흘렀다. 이를 대요하 즉, ‘아리수’라 하여 지금의 ‘요하’를 ‘아리수’로 부른 것 같다. 그것이 그대로 후세에 전해져 지금도 ‘요하’를 ‘아리수’로 부르고 있다”고 유왕기 씨는 언급했다. 이어 “250만 년 전~1만 년 전 사이에 지구상에는 4회의 빙하기가 있었다. 아간빙기가 되면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20-100m 정도 높아지기 시작한다. 이때 한반도, 만주, 중국 동해안 지역이 침수된다. 최근엔 7,000-6,500년 전에 이런 현상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추정한다. 이 때 인류는 중국, 한반도, 일본으로 이어진 대륙에 거주했다는 이융조 교수의 발표가 뒷받침 되고 있다. 그래서 상전벽해란 말도 여기서 나온다”고 덧붙였다.

‘요하(遼河)’는 남만주 대륙의 남쪽을 흐르는 강인데 요나라 성종 4년인 1345년에 불려졌다. 그전에는 구려하, 구류하, 거류하라고 불렸는데 이는 ‘고구려의 물’이란 뜻이다. 고구려가 당에 의해 망하면서 발해가 다시 요에게 망하자 강 이름도 ‘요하’로 바꿔버린 것이다. 홀달단군(B,C 1782) 때도 이 강을 ‘아리수’ 또는 ‘압록’이라 불리웠다. 이것은 <요사(遼史)> 지리지에 일명 압록(鴨綠)이라는 기록이 있고 ‘아리수(阿里水)’란 물 이름도 있다. 여기서 ‘압록’이란 고대의 ‘압록강’이 아니다. 현재의 요하나 송화강 및 흑룡강도 압록이라 불린 적이 있다. ‘압록’이란 말은 고대어로 크다는 뜻인 ‘리’, ‘아리’, ‘오리’는 이두문이다. 이들 강은 ‘아리’ 또는 ‘압록’으로 적혔다는 사실이다. 이들 강은 모두 큰 강이었기 때문에 ‘아리가람’ 즉 ‘아리하’ 또는 ‘압록’으로 적혔을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한강을 아리수로 확정한다면 한강을 아리나예하도 한강으로 볼 수도 있는 빌미로 제공하는 것이고 동일본의 삼한정벌론을 확정해 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한강이 아리수가 되는 것은 무릉도가 독도가 되고 동일본의 죽도라고 우겨온 것에 동참하는 식이 되고 말 것이다.

또 ‘반도’라는 말은 일본 열도가 온전한 섬이고 우리 땅을 반쪽짜리 섬이라 ‘반도’라고 비하하면서 사용한 말이다. 본토인 일본이 대륙진출의 징검다리 역할을 삼으려는 의도에서 부르는 반도사관이 만들어낸 치욕적인 말이다.

오재성 선생은 역사의식이 부족한 우리들은 ‘아리수’를 한강에 맞추고 이 땅을 침공한 것을 정당화하려는 그들의 야욕을 그대로 방치하고 있다며 우리들의 대비 노력이 부족함에 일침을 가하고 있다.

한강은 모두에게 물을 공급한다. 한사람만의 소유가 아니다. 한강을 역사 속에 던져본다. 결코 과거에만 묻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한 좋은 의미는 되살려 진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강에 대한 의미부여를 해본다.

따라서 역사는 과거의 산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도 펄펄 살아서 돌고 돌면서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왔던 길 돌아보며 갈 길을 찾는다’는 말처럼 결코 한강은 유구한 우리 선인들의 역사와 철학을 가지고 오늘날에 살아있는 것이다. 나아가 미래에도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는 살아 있는 강이지 치욕의 ‘아리수’는 아니라는 말이다. 한강은 역사이자 생명이다. 우리민족의 영욕과 애환을 함께 나누어 온 강이자 민족사의 힘찬 숨결을 담고 유구히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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