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서주 한윤기 “평생 우리 것을 찾는 그림 작업”

한국화가 서주 한윤기(西舟 韓允基) 선생은 그림으로 가는 길에 곡절이 많았다. 버스는커녕 전기도 안 들어왔던 1962년 깡촌 당진군 대호지에서 태어났으니 그 시대 문명의 혜택이 멀었던 만큼 부모님의 기대치는 부담감으로 작용했다. 집안에서는 농사를 짓거나 공무원시험을 쳐서 공직자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벽에 걸린 운보 김기창 화백의 한국화 달력을 우연히 보았다. 꽃 그림도 있었고 나락이 출렁이는 황금들녘의 동양적인 풍경이 그렇게 좋았고 그런 감정이 있어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목가적인 정서가 무르익었다. 5학년 때부터 더욱 그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6학년 때 수학여행을 온양 현충사로 간 적이 있었다. 당진 밖으로 처음 나들이를 했는데 현충사 단청을 보고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었다. 아름다운 색채가 너무도 경이로웠다. 음악도 잘했는데 피아노를 칠 재력도 없고 배울 수가 없는 현실이었다. 집안에서는 왜 힘든 그림쟁이가 되려고 그러느냐면서 윽박지르는 바람에 정신적인 중압감이 상당했다. 예능 방면으로 가고 싶었었는데 너무나 반대가 심했고 안정된 직업을 구하라는 식구들이 바람 앞에서도 ‘나는 아니다’라고 버티었다.
당시 그런 시대상을 빠져 나오는 길이 실상 그림을 그리는 노력보다도 더 곡절이 컸다.


‘누가 뭐래도 나의 꿈은 화가다’
쏘아놓은 그 꿈의 화살 하나가 약관 17세의 소년 한윤기에게 가출을 시도하게 만들었고 시련 속에 붓을 밀어 넣고 60이 넘은 연륜, 오늘날까지 화가의 꿈을 현실화하는 단단한 무기가 됐다. 그런 곡절 속에서 시골집에서는 그가 한국화가 라는 것도 모르고 자신도 보여주기 싫은 숙제를 가슴 속에 품고 살 뿐이다. “깜짝 놀랐어요. 이 정도의 실력을 갖춘 작가가 인천에 있었구나. 그림 구도도 그렇고 움직임을 처리하는 것도 단련된 데다 해학적이다. 일반 화가들은 이렇게 못할 것 같아요. 그가 시도하는 실험적이고 좀 특별한 것들이 우리 한국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렇게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인천에 이렇게 잠들고 있었구나. 왜 숨겨져 있었는가. 쉽게 말하자면 풍경이나 꽃들은 붓이 두 번 세 번 가면 좋아지잖아요. 근데 이 작가는 그런 그림이 없어요. 한 번에 일필휘지로 치고 나간 것은 대단한 필력을 갖고 있다는 증거죠. 세속에 때 묻지 않는 그림을 그려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부단한 노력이 없으면 체득하기 어려운 건데 평소에 자신과의 싸움이 없었으면 그런 내공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한국화가 서주 한윤기 선생의 사고나 사상이 은둔적이죠. 스스로 밖으로 드러내려고도 하지 않고 항시 공부하는 작가이고 아주 겸손함을 미덕으로 삼는 분이에요.” 그의 그림을 접한 고서화 전문가 김기찬 사장의 찬사다.
그는 17살 무렵 인천으로 무작정 공부하고 싶어서 올라왔다. 인천에 있던 공고에 입학 했지만 집에서든 밖에서든 편히 쉴 곳은 없었다.
“그때 학교 분위기도 아주 살벌했지요. 예능 쪽에 관심을 가진 저 같은 사람이 공고를 다니려니 얼마나 괴리감이 컸겠어요. 저는 맨날 책이 보고 싶었고 늘 가방에는 시집이나 책을 넣고 다니면서 통학하는 차 안에서 읽고 그랬거든요. 시간 날 때는 물론 수업시간에도 책을 읽었을 정도였죠. 기계 만지는 게 싫어서 선생님에게 많이도 맞았고 또 그전에 그림을 하지 못하게 하는 식구들의 윽박지름에 엄청난 스트레스에 노출됐지요.”‘책도 한두 권만 읽으면 되지 뭘 자꾸 사서 읽냐’고 주변에서 나무라자 차비를 아껴서 동인천 배다리 헌책방에 가서 50, 100원씩 하는 문고판을 한 권 씩 사봤다.
‘인생은 책이 선생’이라고 그때 국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서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100권씩 리스트를 만들어서 다 읽었다. 한국 고전부터 현대문학까지 읽었고 단테부터 시작해서 톨스토이까지 외국문학도 대부분 섭렵했더니 나름대로 주관이 서더라고 그는 말했다.결국 다니던 공고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봤고 미술학원에 갈 형편도 안됐으니 홍대입시에서 낙방하고, 다행히 동양화과가 있던 추계예술대학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은 했으나 학비가 문제였다. 알바를 하면 공부에 방해가 될 것 같아 성적이 우수하면 등록금 면제가 된다는 것을 알고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타고 대학을 다녔다.
대학 졸업 후에 선생이라도 해야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도 꾸릴 것 같아서 대학원 진학을 추진했으나 이것마저도 반대에 부딪혔다. 간신히 동국대 미술교육대학원을 졸업했기에 그나마 추계예술대를 비롯 서울국악예고 등에서 선생을 하게 됐고 지난해까지 생계를 꾸려왔다. “교육대학원에 안 들어갔으면 저는 화가가 못 됐을 거예요. 노동일을 하며 먹고 살아야 했으니까요. 그래도 대학 강의라도 하면서 생계를 이었죠. 강의는 지난해까지 했어요”


그림을 통한 한국적인 것 탐색
본격적인 그림 작업은 대학부터였다. 그전엔 주변 선생들을 찾아다니면서 사군자 등 뜨내기 수업을 받았다. 그간 개인전은 30여 차례쯤 진행했고 그룹전은 약 1,000회 정도 참여했다. 40여 년간 오직 그림에 올인한 만큼 대단한 작업량과 다양한 창작방식을 보인 결과였다. 작업은 평면회화를 주로 했지만 다양한 입체까지 두루 아울렀다.
그의 전적을 보면 실험 작품전시도 많이 했다.
1995년 첫 전시회를 시작으로 평균 1-2년마다 한 차례씩 전시회에서 그가 선보인 세계는 실로 다양하다.
한지 위에서의 평면작업을 뛰어넘어 입체적인 작품으로 연결시켜 다양한 미술 장르를 실험했다. 예를 들면 주로 우리의 전통적인 농기구에 천착하면서 멍석이나 키, 삽 등을 이용, 한지 채색을 결합시킨 작품들을 창작하면서 평면회화에서 탈피하기 시작했다.
농사의 아이콘인 삽을 사장되는 농업문화의 상징으로 삼아 한지로 염을 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사라져가는 농경시대의 상실을 나타내거나 어떤 화해 등 작업 의도가 우리 것에 대한 모색에 심혈을 기울였다. 개인전이 거듭되고 소재가 문살, 주걱, 도마, 숟가락 등 생명의 문제까지 외연을 확대하면서 회화의 영역을 넓혔다. 손으로 직접 삽날을 일일이 자르고 구부려서 1년간 작업하다 보니 손가락 관절염과 목디스크가 걸릴 정도로 한 가지 작품에 몰입하는 편이다. 숟가락 작품은 직접 두드리고 그라인더로 오려서 손으로 꼬부리고 용접을 했다. 쇠가 얼마나 단단한지 작업한 뒤 관절이 아팠지만 현재 작업실에 200개나 만들어 놓았다. 이런 게 일종의 입체 조각 영역인데 한국화 작가가 이런 작업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 정체성 찾아 세계로
그는 안목을 넓히기 위해서 매년 해외여행을 다녔다. ‘인도기행 전’, ‘동남아기행 전’을 통해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가는 길엔 언제나 아름다운 색깔의 이야기가 들어 있었다고 말했고 풍요로워진 마음의 양식을 오롯이 화선지에 담았다. 여행에서 과거와 미래가 공존하는 그 사유의 길로 들어섰고 인도여행만 9차례 했다. 2018년엔 ‘한국화기행 전’을 통해 ‘길을 걷다 전’을 펼쳐 만나는 사물이나 사람 모두가 풍경이 되고 모델이 됐다. 이제는 여행이 생활에 일부가 됐고 자기 그림의 모티브가 된다고 말하는 그는 날마다 여행을 꿈꾼다.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의 세계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면서 ‘道談의 像’을 화선지에 담는다. 화선지 그 위에서 또 다른 여행을 시작한다.
그리고 인상적인 것은 춤사위를 적나라하게 화폭에 담았다는 것. 서울국악예고 선생으로 오래 있으면서 춤의 동작을 오랫동안 눈여겨 봐왔고 탈춤, 송파산대놀이 춤을 담아낸 것이 자신의 또 따른 ‘화선지 문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 결산으로 2010년 ‘우리 춤 이야기 전’을 가졌고 2023년 송파산대놀이 등 한국인의 춤사위를 다양한 분야로 풀어놓았다.
“지난해 탈춤이 유네스코에 등재가 돼서 저는 송파산대놀이를 그려 대대적으로 환갑 기념전시를 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못 한 거예요. 그런데 연습을 많이 해놓은 게 다행이에요. 준비가 돼 있어야 기회가 오면 잡을 수 있죠. 인체의 기본기를 다 닦고 다시 춤사위를 관찰한 뒤 춤, 무(舞)를 그려낸 것이 구체성을 띠고 춤을 생동감 있게 붙잡았죠. 제가 춤을 춘 건 아니고 은사이신 이왈종 선생이 말씀하신 인물화를 충실히 한 덕택에 이런 무(舞)를 탐색한 것이 춤 그림으로 녹아 나온 것이죠. 춤 그림은 저밖에 없는 듯해요. 우리나라에서 탈춤과 산대놀이 등 우리 것에 천착하는 작가는 드문 것 같아요. 요즘 화가들은 팔리는 그림을 주로 그리니까요. 외국 가서 몇 번 전시회를 했는데 제 그림이 제일 먼저 팔리더라고요. 한국 것을 그려야 해요. 우리 걸 찾아야 하거든요. 제가 체계적으로 배운 선생님은 특별히 없었지만 대학에서 만난 이왈종 선생님이 제 그림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지요. 그분이 깨닫게 해 준 것은 한국적인 것을 많이 추구하라는 것이었죠. 세계화라니까 외국을 찾아가는 게 세계화인 줄 알고 있는데 우리 땅에 있는 우리 것이 좋아요, 오래된 거예요. 창세 신화 만 년 전 마고부터 내려오잖아요. 그 개념을 몰라요. 우리들은 일제 식민사관에 빠져 우리 민족이 3류 민족이라고 세뇌됐지요. 알고 보면 우린 대단한 민족이거든요. 우리의 자부심을 제대로 펼쳐놔야 해요.

실험적인 입체작품
예술에 있어 그림은 평면 회화와 입체 회화가 있다.“입체는 조각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저는 평면, 입체, 다 망라해서 주제는 우리 한국적인 것을 그려내고 싶었어요. 우리나라 문화를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이게 앞으로 숙제인데 화가는 조각도 잘해야 하고 여러 가지 다 잘해야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조선시대 김홍도가 여러 갈래의 그림을 잘 그렸고 운보 김기창도 그랬고 저도 여러 가지를 실험하면서 하다 보니까 이런 진면목이 보이는 거예요. 제 나이 60이 넘으니까 보이더라고요. 전에는 먹고 살기 힘들고 바빠서 그런 생각 못 했는데 이제 인생도 보이고 앞으로 뭘 그려야 되겠다는 것도 보이고 그간 연습이 됐으니 제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야 될 때가 왔구나 했지요” 하긴 지천명이 넘으면 자신을 객관화시킬 수 있는 연륜이다.
상업적인 그림은 안 그리는 게 아니라 못 그리는 것일까?
“상업적인 그림을 잘 그려야 돈벌이가 되는데 속된 말로 꽃, 새 그림 등 상업적인 그림을 그리기가 쉽잖아요. 대학 다닐 때부터 이런 그림 안 그린다고 선생님께 혼났어요. 하지만 누군가 화가는 눈에 보이는 사물보다는 내 후면에 보이지 않는 것을 관조적으로 그릴 줄 아는 게 화가라고 그러더군요”한윤기 작가의 그림은 대부분 순수작품인데 원래 예술적 기질을 가진 화가였기 때문일 것이다. 기질과 필력은 물론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까지 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있는데 그 진가가 바깥으로 드러나지 않으니 안타깝다. 이른바 그는 그림하고 결혼한 시인 같은 화가였다. 오직 그림만이 자신의 삶을 대변해 준 것 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그의 진정성 있는 그림을 보면 푹 빠질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림이 아주 깔끔하고 형태와 색의 여백과 동선이 일필로 휘돌고 장르가 다양한 만큼 대단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다. 더군다나 춤과 몸의 율동을 파악해야 하는 춤 그림까지 하나의 동선으로 그어내는 것을 보면 상당한 기량이 아닐 수 없다.대학에 들어가면서 기본기를 마스터한 연후에 자기 세계, 자기 그림으로 바꾼 거라 이 춤사위가 한국화가 한윤기 작가의 그림으로서 완성된 셈이다.

여행은 내 작품의 모티프
“제가 가보고 싶은 나라는 거의 갔다 왔거든요. 30여 년 동안 해외를 매년 2~3군데를 다녔지요. 어려운 와중에도 집사람이 보내줬거든요. 제가 공부하러 여행을 간다면 믿어주고 과감하게 지원해 주었지요. 집사람(오채운; 시인, 문학박사, 한양대)과 예술적인 감성이 맞아서 늦게 결혼을 했고 딸아이가 하나 있어요. 지금도 무조건 아침 8시 이전에 나를 화실로 내보내요. 저녁 10시 전에 못 들어오게 할 정도로 작업에 치열하게 만들죠. 제가 외국 여행을 다닌 것은 세계사 등 역사를 이론적으로 많이 공부했지만 직접 가서 기원을 확인해야 하겠더라고요. 티벳이나 중국에 가서 그 문화가 인류 이동에 의해서 우리나라까지 오는 흔적을 봤죠. 스리랑카에도 있고 라오스에도 흔적이 있더라고요. 그 기원을 찾아간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한국적인 거와 맞춰지더라고요. 그것을 공부하게 되니까 우리 정체성을 찾게 됐고 그래서 춤 그림도 그리는 것이고, 우리 문양 등 우리의 심성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풀어내는 거죠. 상고사를 보면 파미르 등 이런 쪽에서 우리 민족이 이동해 왔는데 이제는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서 탄생하고 뛰어난 사람들이 한류가 되어 다시 많이 나가잖아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홀대해버린 우리 콘텐츠들이 일본이나 중국, 미국 등으로 넘어가서 재생산돼서 역으로 들어오면 그때서야 ‘와 대단하다’, 혹은 우리 콘텐츠 다 뺏겼다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미 뺏긴 것을 어찌하랴.만약에 한류에 열광하는 외국 팬들이 그 증거를 보고 싶어서 한국을 찾아오면 막상 보여줄 게 있는가? 우리는 그걸 대비해야 하지 않는가?
우리의 문화 그 정체성을 잡는다는 사고와 딱 맞는 한국화가 한윤기 선생은 “그런 것들이 진짜 필요할 것 같아요. 이런 것들이 우리가 세계시장에 어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것이 참 좋아요. 머릿속에 밑천이 많아요. 앞으로 풀어낼 게 엄청 많아요. 제가 어려서부터 골동품 보는 눈이 있었나 봐요. 저는 길가다가도 본 것이 다 오브제들이고 제게 영감을 주거든요. 그냥 지나치지 않아요. 뭔가 특별하게 있었어요. 그런 것들 잔뜩 모아놨는데 군대 간 사이에 다 버렸지만 화실에 오브제들을 다시 모아놨거든요. 제가 대학 졸업하면서부터 그날그날 일을 일지로 쓰면서 오늘날까지 다 모아놨어요. 모으는 게 습관이 되었어요. 사람들은 관심이 없어요, 서양 것만 보고, 거기서 뭔가를 빼낼 줄도 모르고, 안에 들어있는 그 영혼을 볼 줄 모르고. 그것까지 못 보죠. 저는 새로운 소재를 또 개발해서 남들이 안 하는 것을 해보는 거죠. 화랑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거든요. 전속을 맺자고 해도 뿌리치고, 상업적인 그림은 안 그리고 오로지 저는 우리 것에 대한 작품에만 매달렸지요. 가난한 작가의 고집인데 제가 타협을 안 했어요. 요즘 작가들은 먹고살기 힘드니까 유행을 많이 쫓아가요. 저는 유행을 절대 안 따라가요. 나중에 보니까 그게 저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거더라고요”

예술은 몇 천 년 내려온 것을 우리 시대에 맞게 풀어내는 것
지속적으로 추구할 방향이라든지 또 소재 활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이제 실험은 그만하고 진짜 우리나라 정체성을 찾아가는 미래를 추구할 때가 된 것 같아요. 그리고 대가들은 다 60 넘어서 시작하더라고요. 어느 정도 경륜이 되고 또 인생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나이가 돼야 해요. 연습도 돼 있어야 하지요. 지금 우리나라에선 운필을 못 가르치니 할 줄 아는 사람도 드물고 하더라도 국내 화가들의 운필은 손목을 많이 쓰더라고요. 어느 날 북경 어느 대가의 화실을 방문했지요. 운필을 보여주는데 어깨로 그림을 그리더군요. 붓은 힘이 없었고 물에 젖으면 푹 주저앉는 거예요. 그걸 무심필이라고 그래요. 우리나라 붓은 털 속에다가 칫솔모를 심었어요. 그래서 탕탕 튀어요. 추사 글씨는 운필과 붓의 물성 그리고 끝없는 노력이 있어 그렇게 나올 수밖에 없었구나 하는 걸 이제서야 깨달았어요.전무후무한 작품입니다. 추사가 무심필을 쓴 거예요. 당시엔 그게 제일 좋은 붓인데 요즘엔 그런 붓이 없어 제가 직접 개발해 만들어서 사용합니다. 지금은 그런 붓이 안 나와요. 붓에 플라스틱을 심어서 그 운필이 되면 선이 철근같이 나옵니다. 이제는 운필이 자유롭게 숙련이 되어 아무리 푹푹 죽어도 붓이 서요. 그러니까 인물을 표현하는 선이 나오는 거예요. 김홍도 같은 분들이 예전에 그 운필로 제대로 쓴 거죠” 선조들이 사용하는 붓마저도 사라지고 만 것이다.
“개화기에 서양문물이 무분별하게 밀려들면서 우리 걸 버렸어요. 80–90년대에는 우리의 정체성을 살리고자 한국화가 융성했는데 세계화 경제 정책으로 지금 지방대학엔 한국화과가 다 무너졌어요. 한국화가 세계적인 경쟁력이 안 된다고 자꾸 학교에서 소홀히 해버리는 거예요. 제가 들어갈 때는 동양화과가 서울대, 홍대, 이대, 추계, 중앙대, 성신여대 정도밖에 없었거든요. 그 후로 우후죽순처럼 생기다가 근래에 지방대학에선 거의 폐강됐어요. 국가의 정체성도 없고, 교육계에 있는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그렇고, 시정돼야 할 부분이죠. 한국이 노벨상을 못 타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남의 것 이삭줍기만 하니 뭐가 되겠어요. 이 시대 현대식 아파트에 수묵화가 어울리겠냐고 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 깊은 맛을 몰라서 그래요. 그 힘을 겸재는 알았지요. 겸재는 우리나라의 여백을 알죠. 그 분들이 저에게 가르침과 깨달음을 주었지요. 지금 땅만 있으면 도시공간을 무시하고 아파트만 짓잖아요. 빈 공터도 후손을 위해서 남겨 놓아야 하거든요. 저는 그게 여백이라고 보는데… 자동차 많고, 아파트를 많이 짓는다고 그게 경제 발전인가요? 겸재는 자연의 여백을, 우리나라의 여백을 표현한 분이거든요. 그전에는 중국풍에서 못 벗어났었지요. 정조 때 문예부흥이 일어나고 엄청나게 예술 쪽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우리의 정체성도 찾는 시대였지요. 우리 그림을 그린 거죠. 그 후 다시 중국 문화권을 존중하다 보니 우리의 정통성이 한동안 혼돈의 시기를 거쳤죠. 80년대 초까지 동양화라 명명하다가 90년대 한국화라 부르더니 현재는 우리 한국화의 명맥이 시들어가는 역사가 만들어진 거죠. 18세기 사회를 비판하는 그림은 신윤복 화가가 잘했어요. 지금 식으로 얘기하면 민중미술이죠. 귀족 미술은 어진을 그리던 김홍도가 한 것이고 풍속화로 서민처럼 보이지만 귀족 작가입니다”


그러나 18세기에 이루어진 한국화는 현재에도 미래에도 반드시 가르침을 주는 미술의 역사다.
그림 하면 그냥 얻을 수 있는 것, 유명해지면 작품가가 천문학적인 값으로 가치를 논하고, 현대 경제 발전이라는 편협한 논리로 예술이 낙오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다. 예술이 살아있는 나라가 선진국임을 모르는 이 현실에서 예술 활동은 날로 어렵다. 낭만이 사라져버린 시대다.
“우리나라 자연을 여백 공간으로 표현한 사람이 겸재 정선이고 김홍도죠. 이 시대에 우리나라 정체성을 그려야 되는데 다 외국 문물을 따르고 우리나라 아파트 구조에 맞는 그림 그린다고 유행 따라가고 하다 보니까 우리 것이 많이 닫힌 상태죠. 대학에서 전문으로 배우는 한국화과가 없어지는 건 우리나라 미술을 외면하는 것이지요. 돈을 따라가야 하고, 유행 따라가야 하고, 새로운 것만이 예술이라고 보는데 안 그래요, 우리 민족에서 그 몇 천 년 내려온 역사를 그대로 지금 우리 시대에 맞게 풀어내는 게 예술이거든요. 예술은 시대성과 역사성 그리고 미래성이 있어야 하거든요. 제가 그것을 추구하는 방향을 잡은 거예요. 이런 걸 할 줄 알아야 동양화도 제대로 그리는 거예요. 아쉬운 점은 제 또래 작가들이 점점 붓을 꺾는 거예요. 화가로 현실을 살아가기가 경제적으로 어려워서이죠, 현재는 화가가 워낙 많습니다. 취미로 또는 문화센터에서 배운 사람들이 많잖아요. 주객이 전도돼서 전문 화가들이 밀려나고 있는 실정이 참 아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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