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가 僞書아님을 입증하는 史料고찰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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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聖紀全 上篇, 下篇」은 『환단고기』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역사서로서 3,301년간의 환국과 환웅이 다스린 1565년 동안의 신시 배달국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등사본 환단고기』「三聖列記」의 원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三聖列記

吾桓建國이 最古라 有一神이 在最高之天하니 爲獨化之神하시니 光明 照宇宙하시며 權化 生萬物하시며 長生久視하야 恒得快樂하시여 乘遊至氣하야 妙契自然하시며 無形而見하시며 無爲而作하시며 無言而行하시더니 日에 降童女童男八百於三危太白之地하다. 掊石發火하야 始敎熱食하시니 是謂天帝桓因氏요 又稱桓國天帝라 傳七世하시니 年代는 不可考러라(李沂註曰 在山上曰 桓이요 在山下曰權이라)

後에 ?桓雄氏 繼興하사 奉天神之詔하시고 降居白山黑水之間하사 鑿子井女井 拾天坪하시고 劃井地於靑邱하사 持三印하시고 主五事하사 在世理化하시고 弘益人間하시니 號爲神市요 又稱倍達이라 擇三七日하야 祭天神하시며 忌愼外物하사 閉門自修하시며 呪願有功하시며 服藥成仙하시여 劃卦知來하시어 執象運神하시니라.

命羣靈諸哲하니 爲輔하시며 納熊氏女하야 爲后하시고 定婚嫁之禮하사 以獸皮爲幣하시며 耕種有畜하시어 置市交易하시며 九域貢賦하고 鳥獸率舞러라 後人이 奉之爲地上 最高之神하야 世祀不絶하니 傳十八世하야 歷一千五百六十五年이러라(李沂註曰 桓雄은???이오 ?????라)

神市之季에 神人王儉이 降于太白山 檀木之墟하시니 其至神之德과 兼聖之仁이 乃能承詔繼天하다. 巍蕩惟烈이어늘 九桓之民이 咸悅誠服하야 推爲天帝化神而君之하시니 是爲檀君朝鮮이라 復神市舊規하야 設都補平壤하시며 建邦號朝鮮하시니라 ??端拱無爲하사 坐定世界하시며 玄妙得道하시며 接化群生하시며 命하야 彭虞로 闢土地하시며 成造로 起宮室하시며 臣智로 造書契하시며 奇省으로 設醫藥하시며 那乙로 管版籍하시며 羲典卦筮하시며 尤作兵馬하시며 納菲西岬河伯女하야 爲后하사 治蠶하시니 淳厖之治가 熙洽四表하시다

世稱檀儉帝王이요 稱居發桓이라 檀君王儉이 自戊辰立國을 傳四十七世하야 歷二千九十六年이러라(李沂註曰 臣智는 或은 神智요 奇?은 ????이오 或은??오 ???이라)

乙卯에 周考王時에 開國號爲大夫餘하니 初自白岳으로 途徒鹿山하야 仍設禁八條하고 讀書習射爲課하며 祭天爲敎하며 田蠶是務하며 川澤無禁하며 罪不及孥하며 與民共議하며 協力成治하며 男有常職하며 女有好逑하며 家皆蓄積하니 山無盜賊하며 野不見飢하며 絃歌溢域하니라(李沂註曰 鹿山은 今吉林荷城이라)

己巳秦始王時에 神人大解慕漱 起於北夫餘 丁未漢惠時에 燕酋衛滿에 竊居西鄙一隅하고 須臾侯準이 襲爲裨王이라가 入海而亡하니 自此로 三韓殆半移放冽水之南하고 群雄이 競兵於遼河之東이러니 至癸酉의 漢武時 移兵滅右渠하니 夫餘人高豆莫汗이 倡義興兵하야 赤稱檀君하시고 壬戌의 漢宣時 高無胥-自號爲後解慕漱라하고 進據夫餘故都하고 稱國東明이러니 未畿에 高朱蒙이 亦以天帝子로 繼北夫餘而興하시니 是爲高句麗始租也(李沂註曰 三韓은 官名이고 非國名也오 冽水는 今 漢江也요 遼河는 今 白河也라)

상기와 같이 『환단고기』「삼성기전 상」과 『등사본 환단고기』「삼성열기」의 원문에 다른 부분(적색 글자)이 많다. 내용도 약 10% 정도의 중요 부분을 수정, 추가 또는 일부 삭제되어 있다. 이렇게 일부 변조된 것은 『등사본 환단고기』의「단군세기」「북부여기」에도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렇게 변조된 부분들은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특히 『등사본 환단고기』「삼성열기」에 기재된 ‘桓國天帝’를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편」에서는 ‘安巴堅’으로 변경했다.

1979년에 출간된 『환단고기』의 범례(凡例)에 아래와 같이 이기(李沂)가 감수를 했다고 기술 되어 있다.

“『환단고기』는 모두 해학 이기(李沂) 선생의 감수를 거쳤으며, 또 내가 부지런히 노력하여 잘못을 바로 잡고 다시 고처가며 쓴 것이다.”1)1) 김은수 역주 『주해 환단고기』, 가나출판사(1985년), 14쪽

『등사본 환단고기』의 「삼성열기」와 「단군세기」

위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등사본 환단고기』「삼성열기」「단군세기」「북부여기)」에서 중요한 문장마다 작은 글씨로 “이기주왈. — (李沂註曰. –)”이란 감수결과가 기재되어 있다. 또한 『등사본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단군의 탄생년도가 ‘신묘생(辛卯生)’으로만 되어 있는데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단군의 탄생 년도가 ‘신묘(辛卯) 五月 二日 寅時生’로 변경했다.

위와같이 『등사본 환단고기』와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를 비교 검토하고, 한문 원문에 ‘한글 현토’하여 등사 출판한 시기 및 등사기의 출현과 사용시기 등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결과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이전에 만들어진 이기의 『환단고기』한문 초고(草稿)를 일제강점기 때 등사기로 인쇄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그 근거는 다음의 추론과 같다.

추론 1 : 이기(李沂)는 1909년 3월에 단학회(檀學會)를 창단하고 그의 가문에 소장되어 있던 안함로(安含老)의『삼성기』, 원동중(元董仲)의『삼성기전』, 이암(李嵒)의 『단군세기』, 범장(范樟)의 『북부여기』, 이맥(李陌)의 『태백일사』를 유실되지 않고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그의 제자 계연수에게 편찬토록 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도 이기는 계연수에게 『삼성기열전』, 이암(李嵒)의 『단군세기』, 범장(范樟)의 『북부여기』 를 필사 시키며 내용을 감수하고 주서(註書)를 달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909년 7월에 이기가 자진(自盡) 순국함으로써 『태백일사』의 필사 및 감수를 마저 못하고 1910년 나라가 망하자 계연수는 스승 이기가 갖고 있던 모든 역사 고서와 자료들을 갖고 묘향산 굴속으로 들어가 『환단고기』편찬 작업을 마저 완료하고 30부를 발간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계연수에 의하여 1911년 편찬된 『환단고기』의 원본이 현재 없기 때문에 1979년 이유립에의하여 편찬한 『환단고기』와 『등사본 환단고기』가 내용부분에 있어 여러 가지 다른 부분들이 있어 이것이 계연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이유립 또는 제3자에 의한 내용 수정인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본인은 계연수가 『환단고기』초고중 일부를 수정하고「삼성기전 하편」과「태백일사」를 추가하여 1911년에 『환단고기』 출판했고 30부중 한부를 이유립에게 전수해준 것이 아닌가 추정한다.

『등사본 환단고기』와 1979년 『환단고기』와 차이가 나는 「삼성열기」, 「단군세기」, 「북부여기」를 검토하고 비교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등사본 환단고기』「삼성열기」에 기재된 ‘桓國天帝’를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 「삼성기전 상편」에서는 ‘安巴堅’으로 변경하였는데 이는 계연 수가 이기가 감수한 『환단고기』에 「태백일사」가 빠저 있어 묘향산에서 이것을 정리하여 합치다 보니까 「태백일사」에만 나오는 ‘安巴堅’을 「삼 성기전 상편」에 고처서 변조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것은 스승인 이기가 없으므로 본인이 스스로 바꿀 수 있는 입장이라 ‘桓 國天帝’가 원래 ‘安巴堅’을 의미함으로 임의로 바꾸었다. 이것은 편자가 임 의로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고 이 변조 과정을 볼때 『등사본 환단고기』가 1911년 계연수의 『환단고기』보다 앞선 초고라고 판단된다.

2)『등사본 환단고기』「단군세기」에 단군의 탄생 년도가 ‘신묘생(辛卯生)’으 로만 되어 있는데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 「단군세기」에서는 단군의 탄생 년도가 ‘신묘(辛卯) 五月 二日 寅時生’으로 변경되어 있다. 이것 또한 계 연수가 『환단고기』「단군세기」를 편집할 때 임의로 ‘신묘(辛卯) 五月 二 日 寅時生’으로 추가 변경 한 것으로 보이는데 단군의 탄생년월일은 『규원 사화』, 『단기고사』, 『단서대강』, 『단조사고』등 어떠한 사서에도 없는 것인데 어찌하여 월일(月日)까지 추가 했는지 알 수가 없다.

1979년『환단고기』「단군세기」 『등사본 환단고기』「단군세기」

3)『등사본 환단고기』「단군세기」‘3세 단군가륵’편에 보면 ‘庚子二年이라 이 도백악(移都白岳)하니 亦稱 당장경(唐藏京)이라 시(時)에 俗尙不하고’라고 써있 어 3세 단군이 ‘장당경’으로 천도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1979년 출판 된『환단고기』「단군세기」‘3세 단군가륵’편에 보면 ‘庚子二年 時俗 尙不’ 이라고 되어 있어 장당경으로의 천도 사실을 삭제했다.

계연수가 천도사실을 삭제한 것은 아마도『등사본 환단고기』「삼성열기」에 1세 단군 때 장당경으로 천도한 것으로 기재되 있어 「삼성열기」와 같게 할 려고 한 의도이고 또한 ‘장당경’을 ‘당장경’으로 잘못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삭제 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등사본 환단고기』「단군세기」“3세 단군가륵”편에서 병오 8년 내용 에 “帝 登太白山하사 望見民家에”인데 1979년 출판된『환단고기』「단군세 기」“3세 단군가륵”편에는 “帝 登不咸之山 望見民家” 로 되어 있어 ‘太白山’ 을 ‘不咸之山’으로 바꾸었다.

4)『등사본 환단고기』「단군세기」“16세 단군위나”편에 보면 “愛桓歌하니 愛 桓은 卽古神歌之類也하다”로 끝나는데 1979년 출판된『환단고기』「단군세 기」“3세 단군위나”편에서는 “愛桓歌 愛桓 卽古神歌之類也 先人指桓花 —–天神樂太平” 라고 47자의 가사(歌詞)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 찬양가 의 가사를 어디서 인용해 왔는지 알 수가 없다.

5)『등사본 환단고기』「단군세기」, 「북부여기 상, 하」와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단군세기」, 「북부여기 상, 하」를 비교해보면 1979년 출판된 환단고기』에서는 년호와 재위 년수, 지명 등이 많이 변경되었다.

또한『등사본 환단고기』에 있는 각각의 단군 재위 기간에 기재된 내용도 1979년 출판된『환단고기』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추가 내용(약 5〜40자)이 임의로 삽입되어 있다.

따라서 1979년 광오이해사본 『환단고기』에 ‘이기의 주서(注書)’가 없는데 『등사본 환단고기』에는 ‘이기의 주서’가 있고, 위에서 열거한 1), 2, 3), 4), 5) 의 변조 사항을 볼 때 계연수가 추가 삽입했던 아니면 제3자가 추가 삽입했던 논리적으로 볼때 『등사본 환단고기』의 한문 필사 원문(한글 현토를 하기전 원 문)이 1911년에 편찬한 계연수의『환단고기』보다 앞선 초고라고 판단된다.

추론 2 : 이기가 제자들에게 시킨『환단고기』 한문 필사본을 갖고 있던 다른 제자 (대종교 사람으로 추정)가 일제강점기에 등사 인쇄를 위해 등사지에 철필로 옮 기면서 한글 현토를 달아 등사기로 몇 부 인쇄하여 『환단고기』를 공부하는 자 신들의 제자 또는 대종교 사람 및 지인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 광복 후 한 부가 전해지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게 추론하는 이유는 고서 수집가 최현호가 2010년에 중고서적 거래상으로 부터『등사본 환단고기』를 구입시 대종교의 나철이 저술한 1911년 출판된『단 조사고』와같이 구입하였다고 한다. 이기는 대종교의 교주 나철과 같이 독립운 동을한 기록2)2) 보성군 『홍암 나철 기년관』. 22쪽 도서출판출판 선인(2016년)

으로 볼때 『등사본 환단고기』가 대종교로부터 전래되다가 광복 후에 고서 시장에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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