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구나 때로구나

검가(劍歌)를 부르면서 이 땅의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

검가(劍歌)

때로구나, 때로구나,

이야말로 내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이검(龍天利劍)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

만대에 한 번 태어난 장부요,

5만 년에 한 번 만난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검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

춤추는 소매에 긴 장삼을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바로 잡고

호호 망망 넓은 천지에 한 몸을 기대고 서서

검가(劍歌) 한 곡조를 부르노라.

때로구나 때로구나 노래를 부르니

날이 퍼런 용천검이 해와 달에 번쩍이는구나.

늘어진 소매가 달린 장삼으로 우주를 덮으리.

예로부터 이름난 장수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장부가 앞에 나서니 장사도 소용없구나.

때로구나 때로구나, 좋구나,

이야말로 내 때로구나. 좋구나.

-이내겸(李乃兼)의 두 번째 공초(供招)에서 밝힌 노래-

이내겸은 최복술의 두 번째 공초(供招)에서 “제가 경신년(1860) 경에 듣건대, 양인(洋人)이 먼저 중국을 점령하고 다음에 우리나라로 오면 그 변(變)을 장차 헤아릴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13자로 된 주문(呪文)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쳐서 양인을 제어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은 정성을 다하면 이롭지 않은 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인의 책은 반드시 규(?)로 이름을 달았는데 그 글자는 ‘궁(弓)’자의 밑에 두 점을 찍은 것입니다. 그것을 불태워 마셔서 액운을 없애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그 공부를 시작할 때에 몸이 떨리면서 귀신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천신(天神)이 내려와 가르치기를, ‘요사이 바다 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양인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검가(劍歌) 한 편을 주었습니다. 문(文)을 짓고 부(賦)를 지어 불렀는데 과연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검가는 세 가지가 전해지는데, 아래의 검가는 천도교창건사에 나오는 최해월(시형)의 검가 번역이다.

때여, 때여, 나의 때여,

다시는 오지 않을 때로다.

만세에 으뜸가는 장부로서

오만 년을 열어갈 때로다.

용천검 잘 드는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긴소매 달린 춤옷을 입고

이 칼 저 칼을 가뿐히 들고

아득하고 넓은 천지에

이 한 몸을 비켜서서

칼노래 한 곡조를 부르며

때여, 때여, 이렇게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해와 달을 희롱하고

게으른 듯 긴소매 춤옷은

온 우주에 덮여있네.

만고 명장이 어디 있는가?

장부 앞에 당할 장사가 없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옥계산인 주해

동학천도162년11월24일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동학의 교조(敎祖)

조선의 종교 사상가이자 동학(천도교)의 창시자 겸 제1대 교주로 호는 ‘수운(水雲)’이며 ‘경주 최부잣집’의 비조인 최진립의 7대손이다.

최제우는 순조 24년(1824) 10월 28일(양력 12월 18일) 경상도 경주부 현곡면(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에서 유학자였던 아버지 근암공(近庵公) 최옥(崔鋈)과 셋째 부인인 어머니 곡산 한씨(谷山 韓氏)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최옥은 일찍이 정실부인 연일 정씨 정일추(鄭一錘)의 딸과 둘째 부인 대구 서씨 서달증(徐達曾)의 딸 등과 혼인하여 두 딸을 두었으나, 아들을 낳지 못하여 결국 첫째 남동생 최규(崔珪)의 외아들 최제환(崔濟寏)을 입양하였는데, 최제우는 그 후 후실 곡산 한씨를 들여 낳은 자식이다. 그의 아명은 복술(福述)이고 초명은 제선(濟宣)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재가한 몸이었고 또한 최제우 자신은 서자였으므로 태생적으로 문과에 응시할 수 없었으나, 부친 최옥은 “모름지기 8살 때까지 공부를 시켜보면 싹수를 알 수 있다.”하며 최제우에게 유학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곧 가세가 기울더니 순조 33년(1833, 10세) 어머니를 여의고 헌종 6년(1840, 17세)에는 아버지를 여의어 홀몸이 되었다. 이후 최제우는 헌종 8년(1842, 19세) 울산 출신 월성 박씨 집안 여인과 결혼하며 먹여 살릴 식구까지 생겼지만 일정한 생계방편이 없어 몰락한 양반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농사도 배우지 않았고, 다만 한때 무과를 준비하기도 했으나 얼마 못 가 무인의 길을 접고 10년 동안 전국 각지를 유랑하며 장사꾼으로 일한 듯하다. 최제우는 “시정에서 장사도 해보았고 한량들 틈에 끼어 활도 쏘아 보았고 호협자와 함께 말도 달려 보았고 일찍부터 유도, 불도, 선도와 <야소실>에 이르기까지 제자백가서를 낱낱이 섭렵해보았다.”라고 오지영은 <동학사>에 적었다.

이때 최제우는 조선이 망해간다는 암담한 현실을 선각한 듯하다. 청나라와 대영제국과의 아편 전쟁을 전해 듣고서 청나라가 대영제국에게 패배 당했으니 우리나라는 순망치한의 상태라고 생각했으며 서학을 표방한 서양 세력들은 무슨 일이든 다 할 만큼 능통하기는 하지만 침략하려는 마음가짐을 지녔으니 서학도 올바른 정신세계는 아니라고 여겼다. 이 문제를 두고 높으신 분들과 이야기해보려 했으나 양반들은 장사꾼 행색인 최제우에게 판에 박힌 말들(공자 왈 맹자 왈)을 하며 현실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경험들을 하면서 최제우는 “요순지치도 공맹지덕도 부족언(요순의 통치,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도 이 난국을 타파하기에는 부족하다)”이라며 말 그대로 새로운 가르침과 새로운 문화가 필요한 “다시 개벽”의 시대가 와야 한다는 생각을 굳힌 듯하다.

결국 장삿일을 끝내고 철종 5년(1854, 31세) 가지고 있던 전답을 팔아 (오늘날 울산시 중구 유곡동에서 지내며) 철물점을 하다가 사업을 그르쳤다. 이 때문에 빚쟁이들에게 쫓겨 다시 고향 경주 용담으로 들어가 천도를 얻으려는 수행을 계속했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대략 이 즈음 이름을 ‘제선(濟宣)’에서 ‘제우(濟愚)’로 바꾸었는데, ‘제우’란 ‘어리석은 이를 구제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그의 생각을 짐작해봄직하다.

그러던 중 철종 11년(1860, 37세) 4월 5일(양력 5월 25일), 신내림과 흡사한 현상을 경험하면서 스스로를 ‘상제’라고 부르는 존재와 대면하여 주문의 말과 병을 고치는 부적 문양을 받았다. <동경대전>에서 전하는 최제우의 체험은 다음과 같다.

不意四月불의사월 心寒身戰심산신전 疾不得執症질부득집중 言不得難狀之際언부득난상지제

뜻밖에도 4월에 마음이 선뜩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중할 수도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有何仙語유하선어 忽入耳中홀입이중 驚起探問則경기탐문즉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 물은즉

曰勿懼勿恐왈물구물공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무서워하지 말라.

世人세인 謂我上帝위아상제 汝不知上帝耶여부지상제야

세상 사람이 나를 상제(하느님)라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問其所然문기소연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曰余亦無功故왈여역무공고 生汝世間생여세간 敎人此法교인차법 勿疑勿疑물의물의

나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서학의 신 관념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대목. 또 다른 문헌에는 노이무공 즉 노력을 하나 이룬 것이 없는)

曰然則왈연즉 西道以敎人乎서도이교인호

그러면 서도(서양의 도[道]: 그리스도교)로써 사람을 가르치리이까?

曰不然왈불연 吾有靈符오유영부 其名仙藥기명선약 其形太極기형태극 又形弓弓우형궁궁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않노라. 나에게 영부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受我此符수아차부 濟人疾病제인질별 受我呪文수아주문 敎人爲我則교인위아즉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汝亦長生여역장생 布德天下矣포덕천하의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동경대전(東經大全) – 포덕문(布德文)

최제우는 자신의 신내림이 꿈은 아닌가 하면서 1년을 다시 수행하고서 그때 얻은 가르침의 의미를 진정으로 깨닫고 철종 12년(1861, 38세) 6월부터 비로소 본격적으로 동학의 주문과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포교하기 시작했다. 동학을 믿는 사람들의 숫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폐쇄적인 영남 유림들 사이에서는 혹세무민의 사교라고 하여 동학을 배척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이 때문에 철종 13년(1862, 39세) 9월 경주 관아에서 최제우를 처음 체포했으나 제자들이 탄원한 덕에 석방됐다. 이후 동학 활동을 지속했다가 철종 14년(1863, 40세) 12월에 이름만 바꾼 서학이라는 혐의와 ‘혹세무민’한다는 혐의를 받아 다시금 체포됐다.

조정에서 파견된 선전관 정운귀(鄭雲龜)가 올린 장계에 따르면 ‘경주에 가까워올수록 주문(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소리가 마을마다 채우고 있었다.’고 하므로 당시 동학의 파급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최제우가 철종 13년 6월부터 사람들에게 자기 가르침을 펴기 시작했으므로, 동학의 창시자로서 대외활동을 한 기간은 고작해야 1년 반에 불과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조정이 동학을 위험하게 여길 만큼 사람들이 호응한 것이다.

최제우는 체포된 채로 압송되어 과천까지 왔다가 철종이 갑작스레 죽어 조정이 혼란해진 탓에 다시 대구에 있는 경상 감영으로 이감됐다. 해가 바뀌어 고종 1년(1864) 3월 10일(양력 4월 15일) 경상감영에서 사형이 집행되어서 41세 나이로 순교(殉敎)했다. 오히려 타 학문에 대한 배척도가 심한 영남 지방에서 재판을 받은 것이 더 안 좋게 작용했을 수 있다.

최제우 동상(달성공원)

이후 최시형이 제2대 교주가 되어 동학을 이끌었다. 같은 경주 최씨지만 최시형은 완전히 몰락하여 머슴살이로 생계를 꾸리던 사람이었다. 최제우가 철저하게 능력만으로 후계자를 정했음을 알 수 있는 부분. 뒤를 이은 최시형도 최제우의 정신을 철저하게 이어나갔다.

최제우의 사상은 증산 계통의 종교와 원불교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특히 증산교에서는 중요한 인물이다. 최제우의 동상이 달성공원(대구광역시 중구 달성동) 내 관풍루 앞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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