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실록 27권, 중종 11년 12월 10일 병진 4번째기사 1516년

【태백산사고본】 14책 27권 5장 A면
【국편영인본】 15책 243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정론(政論) / 사상-불교(佛敎) / 사상-도교(道敎) / 재정-전세(田稅) / 역사-전사(前史)

한산 군수(韓山郡守) 손세옹(孫世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신이 일찍이 기신재(忌晨齋)918) 가 잘못임을 목도하고, 지난 폐조(廢朝) 때 정언(正言)으로 있으면서 소를 올려 역력히 진달(陳達)하였었는데, 올여름에 성상께서 간원(諫院)의 말을 받아들여 영구히 폐지하도록 윤허하셨습니다. 다만 소격서(昭格署)에서 받는 정조(正租)는 곧 기신재에 쓰는 것인데, 기신재는 이미 폐지하였으나 정조는 아직도 제감되지 않아서 마치 침중한 병은 거의 나았으나 남은 증세가 아직 없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대범 도류(道流)919) 란 것은 곧 황관 도사(黃冠道士)920) 와 같은 따위입니다. 옛적에 연개소문이 유(儒)·석(釋)·황관 등 세 교(敎)를 일으키려고 솥의 세 발에 비유해서 보장왕(寶藏王)을 설득하여, 숙달(叔達)921) 등을 보내 입도(入道)시켜 줄 것을 당 태종(唐太宗)에게 주청(奏請)하였으니 이는 도류가 동방(東方)에 들어온 연원이요, 전진(前秦)의 부견(符堅)이 중 순도(順道)922) 를 파견하여 불상을 보냈었으니 이는 고구려 불법(佛法)의 시초이며, 호승(胡僧) 난타(難陀)923) 가 진(晉)나라에서 왔었으니 이는 백제 불법의 시초요, 사문(沙門) 묵호자(墨胡子)· 아도(阿道)924) 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로 왔으니 이는 신라 불법의 시초입니다. 《삼국유사》의 이른바 ‘순도가 고구려를 세우고, 난타가 백제를 열고, 아도가 신라를 터전잡게 했다.’는 것이 이것인데, 신은 결코 고구려는 순도가 세운 것이 아니고, 백제는 난타가 연 것이 아니고, 신라는 아도가 터전잡게 한 것이 아님을 아오니, 역사를 만든 사람들의 말이 자못 떳떳하지 못합니다.
소수림왕(小獸林王)이 상문사(尙門寺)를 창건하고 순도를 살리며 존숭하여 받들었으되 신은 순도가 그 세상을 복되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고, 침류왕(枕流王)이 신도(新都)에 불사(佛寺)를 창건하고 난타를 살리며 존숭하여 받들었으되 신은 난타가 그 세상을 복되게 하였음을 듣지 못했으며, 눌지왕(訥祇王)이 아도를 모례(毛禮)925) 의 집에 두고 존숭하여 받들었으되 신은 아도가 그 세상을 복되게 하였음을 듣지 못했고, 고구려의 육왕(育王)926) 이 곳곳마다 탑을 세워 세상에 가득하였으되 신은 옛 탑이 그 세상을 복되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했으며, 신라
● 진흥왕이 황철(黃鐵) 5만 7천 근과 황금 3만 푼을 모아
● 석가 삼존(釋迦三尊)927) 의 장륙불(丈六佛)928)

을 만들었으되, 신은 삼존 장륙이 그 세상을 복되게 하였음을 듣지 못했고,

● 경덕왕(景德王)이 49만 7천 3백여 근929) 의 종

을 만들었으되 신은 옛 종이 그 세상을 복되게 했음을 듣지 못했고, 보장왕(寶藏王)이 도사(道士)를 유생(儒生) 위에 앉혔고,930) 백천(百川)의 유로(儒老)들로 하여금 바다같이 왕양(汪洋)한 석도(釋道)931) 를 조종(祖宗)삼게 하였지만 신은 도사들이 그 세상을 복되게 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성종 대왕께서 불도가 성화(聖化)에 상서롭지 못함을 아시어 축수재(祝壽齋)를 혁파했고 금번에 우리 성상께서 또한 기신재를 혁파하시어, 전성(前聖)932) 과 후성(後聖)933) 의 오도(吾道)934) 를 위한 생각이 지극하시니, 이는 동방(東方) 만대의 복이옵니다마는, 유독 도류(道流)가 아직도 남아 그 뿌리를 다 베지 못한 듯합니다.
만일 눌지왕·침류왕 같은 모든 왕이 다시 후세에 나온다면,

●탑을 세우거나
● 종을 만들거나
● 장륙불을 만들어 생민(生民)을 병들게 하지 않으리라고 기필할 수 없는 노릇이니, 이 어찌 오도를 우익(羽翼)하는 일이겠습니까? 실로 이단(異端)의 계제(階梯)를 만드는 일입니다. 바라건대, 전하께서 통쾌히 소격서를 없애고 오도를 높이어 확대시키시되, 시급히 정조(正租)의 공상(貢上)을 제감하여 좋지 않은 폐단을 제거하소서.”

[註 918] 기신재(忌晨齋) : 일월 성신(日月星辰)에 지내는 도교(道敎)의 초제(醮祭)인데, 여기서는 왕실의 기신에 불공을 드려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것을 말한다.
[註 919] 도류(道流) : 도교(道敎).
[註 920] 황관 도사(黃冠道士) : 황관은 도사들이 쓰는 관으로 도교 믿는 사람을 말한다.
[註 921] 숙달(叔達) : 당 고조(唐高祖) 때의 도사(道士). 보장왕 2년(643)에 도사 7명과 고구려에 들어와 불사(佛寺)를 받아 도관을 열고 널리 도교를 펴 도교의 전성 시대를 이루었다.
[註 922] 순도(順道) : 우리 나라에 맨 처음 불교를 들여온 전진(前秦)의 중. 소수림왕 2년(372)에 불상과 불경을 가지고 오자, 상문사(尙門寺)를 세워 살게 하였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삼국유사(三國遺事)》.
[註 923] 난타(難陀) : 마라난타(摩羅難陀)의 약칭. 백제 제 15대 침류왕 원년(384)에 온 인도의 중. 《삼국사기(三國史記)》.
[註 924] 묵호자(墨胡子)· 아도(阿道) : 일명은 아도(我道)·아두(阿頭). 위(魏)나라 사신 굴마(崛摩)와 어머니 고도령(高道寧) 사이에서 태어났다. 16세에 위나라에 가서 불교를 배우고 19세에 귀국, 미추왕 2년에 포교하러 신라에 가, 3년 동안 일선현(一善縣:선산군〈善山郡〉) 모례(毛禮)의 집에 숨어살다가 공주의 병을 고치매, 흥륜사(興輪寺)를 세워 불교를 펴게 하고 다시 영흥사(永興寺)를 세워 살게 하였다. 미추왕이 죽자 백성들이 해치려 하므로 다시 모례의 집에 있다가 죽었는데, 《삼국사기》·《삼국유사》·《해동고승전》에 연대나 국적(國籍)이 각각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
[註 925] 모례(毛禮) : 신라 최초의 불교 신자. 미추왕 2년(263)에 고구려의 중 묵호자 아도가 불교를 일으키려 왔다가 탄압이 심하여 3년간을 그의 집에서 지내게 되자 교인이 되었고, 그의 누이 사씨(史氏)도 비구니(比丘尼)가 되었다. 다만, 눌지왕이 불교를 비호하여 아도를 모례의 집에 두고 존숭했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
[註 926] 고구려의 육왕(育王)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육왕은 인도의 아소카왕인데, 여기서는 잘못 인용한 것 같다.
[註 927] 석가 삼존(釋迦三尊) : 석가모니·문수 보살(文殊菩薩)·보현 보살(普賢菩薩)을 아울러 높여 부르는 칭호.
[註 928] 장륙불(丈六佛) : 불교를 존중하는 뜻으로 신장(身長)이 주척(周尺)으로 1장(丈) 6척(尺)이 되게 만든 불상. 석가모니 시대의 인도(印度) 사람들 신장이 보통 8척이었는데, 후세에 석가를 존경한 나머지 그의 불상을 일반의 배인 1장 6척으로 만든 데서 기인한 것.
[註 929] 49만 7천 3백여 근 : 《삼국유사》 ●황룡사종(皇龍寺鐘) 조에는 ●49만 7천 5백 81(298.5486톤)근 으로 되어 있다.
[註 930] 보장왕(寶藏王)이 도사(道士)를 유생(儒生) 위에 앉혔고, : 이 내용은 《삼국유사(三國遺事)》 보장봉노(寶藏奉老)에 보인다. 그러나 이 부분은 보장왕이 도교를 숭상한 내용에 대하여 일연(一然)이 이를 비난하고 불교를 높인 찬(讃)에 들어 있는데, 여기서는 이를 잘못 인용하여 내용의 혼란을 보이고 있다.
[註 931] 석도(釋道) : 불교.
[註 932] 전성(前聖) : 성종을 가리킨다.
[註 933] 후성(後聖) : 중종을 가리킨다.
[註 934] 오도(吾道) : 유교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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