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년 우리 어머니들이 ‘정안수’라 부르면서 지성을 드려온 새벽 심연의 우물물이 불과 십 수 년 전부터 졸지에 ‘정화수’로 이름표를 바꿔달았다. 이름표를 바꿔단다는 것은 단순히 명칭이 바뀌는 것 이상으로 그 정체성의 혼돈을 가져오는 크나큰 이변이다. 그러나 이 오랜 역사의 반역에 대해 어느 누구도 그런 변화에 이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머리를 맞대고 찾아낸 답에 함부로 이러쿵저러쿵 할 변론거리들을 찾을 수 없었던 까닭이다. 이는 민속과 신화 속에 내재된 역사의 흔적들을 읽어내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비극이다.
정화수 아닌 정안수여야 하는 이유
‘정안수’를 ‘정화수’라고 개명시킨 국어학자들은 ‘정안수’라는 말이 문법적으로 맞지 않는 정체불명의 말로 변질된 ‘표기의 오류’ 정도로 취급한 것이다. 무식한 우리 어머니들이 ‘정화수’의 뜻도 모르고 ‘정안수’, ‘정안수’ 불러왔다는 판단이었던 것이다. 아득한 옛날로부터 근래까지 그 오랜 세월을 정안수 떠놓고 빌었을 수많은 어머니들, 아낙네들이 그들 몇몇 국어학자들에 의해 졸지에 모조리 ‘무식한 여편네들’로 격하돼 버린 것이다.
그에 비해 정화수(井華水)란 글자 그대로 우물의 꽃, 우물의 빛을 담아낸 것이니 얼마나 근사한가. 그러나 이 말이야말로 별로 역사적 근거를 찾기 어렵다. 혹여 몇몇 문헌에 이런 표기가 들어갔다 해도 이는 단지 지식인들의 억지스런 한자 표기에 불과했을 가능성이 오히려 크다.
정안수는 우물 깊은 안쪽의 물을 길어 올린 것이기에 정안수인 것이다. 그런데 우물 정자 井은 한자로 표기되는데 비해 내부를 표기하는 안은 한자표기가 안 된다. 그러니 이런 불완전한 결합을 용납할 수 없는 완고한 학자들이 있었을 법하다.
그러나 한자로 완성되지 않는 모든 단어를 한자로 완성시키지 않으면 틀린 말로 몰아가고 싶은 사대주의자들의 오랜 관습일 뿐이다. 그리고 고대의 한자가 몹시 우리말이어서 한자 표기할 수 없는 순우리말과 뒤섞여 쓰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한자교육을 강조하는 분들은 한자의 근본 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전적으로 부정할 근거를 죄다 갖고 있지 못한 상황에서 그를 비난할 뜻은 없다. 다만 우리민족이 한자 창조에 기여한 바를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니 한자는 중국인만이 만든 것이 아니듯 우리만 만든 것도 아니라는 점이 종종 간과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싶을 뿐이다.
분명 고대 한자의 생성과정에 우리 조상들이 깊이 참여한 것은 확실하다. 거의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고 보는 데에도 이의는 없다. 문제는 우리가 글자를 창조하던 시절의 고대적 관념을 되살리지 못하고는 그 글자 창조에 참여한 우리 민족의 연고를 주장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한자 가운데서도 유독 신성성을 표시하는 글자에 우리 민족의 흔적이 매우 강하게 느껴진다는 점을 주목하고 싶다. 그 대표적 글자가 우물 정(井)자이다. 우물은 고대사회에서 대표적으로 신성한 장소의 중심이었으며 때로는 신성한 장소 그 자체이기도 했다. 또한 우물은 여성들이 주인인 대표적 신성공간이기도 했다. 동네 우물이 됐든 대갓집 뒷마당의 우물이 됐든 말이다.
지금은 우물이라는 실체조차 거의 사라져버렸지만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우물은 동네의 몇 개 보호받는 중심 시설 가운데 하나였다. 그 가운데서도 마을 입구의 당산나무나 마을 뒷산의 당목과 우물은 상호 보완·대비되는 존재다.
마을 입구에 당산나무가 있는 동네에서는 그 나무 근처에 정자를 세우거나 나무 아래 평상을 펼쳐놓아 오가는 행인들이라도 잠시 걸터앉아 쉬어갈 수 있게 했다. 반면 마을 입구 당산나무가 없는 동네는 대체로 산길을 따라 외지와 소통이 이루어지는 외진 동네들이다. 오가는 길이 뒷산 마루 혹은 중턱에 있으면 그 곁에 당산나무가 서있고 그 아래 서낭당이 서있기 마련이다. 서낭당 근처에는 돌무더기도 수북하게 쌓이고, 물론 서낭당 근방에도 깊은 우물은 없으나 용왕을 부를 수 있는 한 뼘 샘물이라도 있기 마련이라는 무속인들의 증언이 있다. 다만 규모와 형식을 갖춘 우물이 없다 뿐 물은 반드시 따른다는 것이다.
2. 정안수에 담긴 신화시대의 기억
그런데 당산나무가 산에 있으면 서낭당이 가까이 있지만 당산나무가 평지 마을입구에 있으면 대개는 우물이 가까이 있는 형상이다. 어쩌다 우물곁에 당산나무가 없을라치면 마을 유력가문에서 자손의 탄생을 축하한다거나 하는 명분을 달아 그 곁에 마을 우물의 안녕을 비는 나무를 심어뒀다.
그럼으로써 신성한 제의의 장소로서 부락이 완성되는 양상이다.
그런데 묘한 것은 우물물을 남성들은 직접 제 손으로 떠먹으면 안 된다는 관습이었다. 이를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로 환원시키려는 경향도 있지만 실제로는 남자들이 우물에 손대는 행위는 마치 남의 여인네를 넘보는 것만큼이나 불경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런 우물의 관습은 실제로는 아득한 고대 세계 여신전의 시대로 이어지는 매우 유서 깊은 민속적 행위이기도 하다. 우물 자체가 여신전의 요체일수도 있고 후대에는 우물 정자가 붙은 이름만으로 여신전의 표상이 되기도 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우물의 기록들을 우리는 민족사서인 한단고기 삼성기 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인 안함로가 쓴 삼성기 상편에 실린 천평에 자정여정(子井女井)을 천평에 마련하고 청구에 정지(井地)를 정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자정여정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대개의 해석자들은 행정적 단위, 구획 등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한단고기 번역자 중 한사람인 이일봉은 여기서 정지는 고대 토지제도의 하나로 해석하고 있다.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정전법(井田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후대의 구정법(九井法)을
염두에 둔 풀이일 것이다.
임승국은 자정여정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으로 해석했다. 우물이나 밭이 있는 곳에 사람
들이 모이므로 이르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는 후대의 시정(市井)을 염두에 둔 해석으로 보인다.
물론 농경민이든 유목민이든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우물의 의미는 생활 측면에서도 매우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대개의 고대인 주거지들이 강가를 끼고 발달했던 점에 비춰볼 때 우물은 의식을 거행할만한 상징적 시설물로 처음 등장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글자 그대로 보더라도 자정여정은 자녀를 얻기 위한 신성한 기도처로서의 우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해 볼 여지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자식을 낳는다는 것은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축복받는 일이었다는 점에서 첫 도읍의 행사가 신성한 기도처를 마련하는 일이라는 점은 당연한 것이다.
신시시대가 신정(神政)을 펼친 시대였을 것으로 본다면 기도처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라 여겨진다. 후대의 우물이 여성들의 영역에서 어떻게 기능했는지를 봐도 역시 기도처로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자정여정을 통상적인 해석자들의 해석대로 자정과 여정이라고 나눠볼 경우 남녀를 나눠 교육시키는 교육기관 겸 종교적 수련기관으로 볼 여지도 생긴다. 고대 여신전은 아이를 낳고 양육하는 기구로서의 역할이 매우 컸을 것으로 볼 때 여신전의 아이들이 각각의 역할에 맞게 나눠 교육됐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한단고기에는 또 구정(丘井)이 등장하는 데 대개의 번역자들은 이를 후대 중국측 사서 등에
나오는 구정(九井)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굳이 언덕 구자를 쓴 이유가 달리 있지 않을까 싶다. 대체로 신천은 평지보다 높은 곳, 언덕이나 산중턱쯤에 세워지는 게 일반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역시 신성한 장소로서 우물의 설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3. 여신전의 역사를 탐색하기 위한 첫걸음
우물의 신성성과 임신·출산의 연관관계는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건국 신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삼국 가운데서도 신라의 건국 신화 속에 나정, 알영정 등 유독 우물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데 여기서 우물은 그대로 여성들이 주인인 신성한 집단거주지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여신전이라 볼 수도 있고 여인국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여인국이란 표현은 여신전이 사실상 사라져 그 존재자체가 지워져버린 후에 뒤늦게 발견되는 것으로서 여신전이 오해됐거나 와전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점에서 석탈해의 탄생신화는 우물이라는 존재는 보이지 않지만 특별히 여신전의 사라져가는 역사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여인국 왕녀 출신 어머니가 낳은 알은 용성국 왕인 아버지에 의해 버려지도록 명령을 받는다.
용성국이라는 이름 자체가 본시 여인의 상징인 물의 주재자로서의 용왕이 여성에서 남성 용왕으로 대체된 시대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가부장적 문화질서 속에 여신전의 주인이어야 할 석탈해의 어머니는 단지 여인국의 왕녀로 지위가 격하되며 그가 낳은 여신전의 아기는 버려질 운명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석탈해 신화에서 또 하나 여신전의 풍습을 볼 수 있는 것은 신전에서 알로 태어나 버려지는 남자아기는 붉은 천에 싸여 금색 상자에 넣어진 채 배에 실려 물길을 따라 아래로 떠내려 보내진다. 그 아기는 육신의 아비인 왕이 사는 궁궐에서 건져 올려지는 선택을 거쳐 하늘의 아들, 천제지자로 성장한다.
이런 그림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의 오랜 신화전승에서도 발견되며 가장 선명하게 기록으로 남은 것이 구약성경에 실린 모세의 탄생설화다. 죽음을 피해 붉은 색 강보에 싸인 채 갈대상자에 실려 강물로 떠밀려나가고 이집트 공주가 궁궐에서 건져낸다. 성경에서는 이집트 공주가 강가에서 목욕을 하다 발견했다고 기록돼 있지만 당시 이집트 궁궐은 충분한 목욕시설을 갖춘 훌륭한 건축물이었다는 게 고고학계의 증언이다. 강물에 떠내려 오는 모세의 발견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다는 얘기다.
그렇기에 모세는 이집트의 왕자로서 충분한 교육을 받고 자란다. 이집트 왕권에도 도전할 권리가 있었기에 훗날 파라오로 등극하는 다른 왕자의 끊임없는 견제를 견뎌내야만 했다. 그리고 이집트 왕권경쟁에서 밀려나 미디언의 땅, 사막 속으로 피했다가 훗날 지도자를 갈구하던 히브리인들을 이끌어 가나안이라는 새로운 땅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우물은 우리 사회뿐만이 아니고 많은 고대사회에서 종종 여성을 상징했다. 하늘과 결합하는 또 하나의 하늘로 상징되기도 했다. 따라서 새벽 먼동도 터오기 전 여명의 시간에 우물의 깊숙이 두레박을 내려 심연으로부터 퍼 올린 정안수를 떠놓고 하늘에 비는 것은 실상 동기감응을 유발하는 지극한 성적 메타포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신화 가운데 하나인 아카드 신화 속에는 태초의 심연 혹은 그 심연의 물인 압수 흑은 압주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여기서 압수는 모든 물의 근원이 뿌리를 댄 심연 혹은 그 심연의 물과 같은 의미다. 이 압수는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곳, 최초의 인간들이 창조되기 전에 인간을 창조한 신들이 머물던 곳이다.
이 메소포타미아의 압수가 우리 고대사에 등장하는 압수와 표기가 같다.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압수가 신성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생명의 물, 알수 또는 아리수의 의미를 지녔다는 점에서 메소포타미아의 압수와 근본 의미도 흡사하다. 다만 발음의 근거가 밝혀진 바 없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압수에 비해 우리 고대사 속에 등장하는 압수는 좀 더 명확하게 단어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오리 압자를 써서 압수(鴨水)로 표기하는 우리의 압수는 이두표기다. 왜 하필 오리 압자냐 하는 점에 대해서는 오리의 북방 발음이 아리로 알의 아리와 같기 때문일 것이라는 단재 신채호의 추정이 나와 있다.
정안수는 바로 우물 속 깊은 곳의 물을 새벽 동이 트기 전 이른 새벽에 길어 올린 신성한 생명의 물, 즉 심연의 물이다. 이 신화적 표현은 흔히 여성의 생식기에서 솟아나는 액체로 간주되기도 한다. 인류 탄생을 가능하게 하는 신성한 물이 곧 우주적 생명의 물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옛 여신전의 우물 축조법은 둥글게 파내려가다 물이 나오면 거꾸로 지상에 가까운 곳부터 위로는 사각으로 돌을 쌓아올려 땅과 하늘을 잇는 방식이었다. 우물의 깊숙한 곳, 그 심연이 곧 하늘인 것이다. 그 하늘의 물을 떠서 머리 위 하늘을 향해 빈다.
여기서 우물이 여성성을 의미한다면 그 머리 위 하늘은 이때 남성성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머리 위 하늘도 하늘이지만 여성의 깊은 곳 자궁 또한 하늘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따라서 하늘은 창조의 공간이며 윗 하늘과 깊은 아래 하늘이 하나로 만날 때 새로운 생명과 풍요가 탄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안수 한 그릇 속에는 아득히 사라져버린 여신시대의 기억이 오롯이 담겨있다. 이처럼 우리도 상당부분 잃어버린 고대적 관념을 회복하지 않고는 한자의 모양과 의미가 어떻게 우리 것인지를 세계인들에게 제대로 설득할 수 없다.
글 | 홍승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