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한 여인이 새끼 밴 암소를 몰고 풀밭으로 나왔다. 풀을 뜯는 소를 넓은 들판에 풀어 놓고 여인은 멀리 보이는 산이 붉그스럼하게 번져가는 모습을 따라 가까이 다가갔다. 빨갛게 핀 철쭉에 넋을 뺏기고 있었다. 매일 다니던 들판을 피해 그날은 산으로 들어갔다. 심심하던 차에 소가 산자락에서 풀을 뜯는 사이 철쭉꽃을 꺾으며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숲에서 한아름 철쭉꽃을 꺾어 나왔는데 풀을 뜯던 암소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 봐도 암소는 보이지 않았고 결국 여인은 소를 찾으러 점점 산중으로 깊숙이 들어갔고 동굴을 발견 했다. 소가 동굴 속으로 들어갔을까? 궁금하기도 해서 동굴 속으로 한걸음 두걸음 들어갔다.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동굴의 어둠이 엄습하다가 순간 밝아지고 확 트인 공간으로 몸이 미끄러졌다. 아얏! 평소 지나다니다가 전혀 보지 못했던 깊은 계곡이 나타났다. 돌팍에 부서지는 맑고 투명한 물살이 절경이었다. ‘아 깨끗하구나!’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그런데 여긴 어딘가? 여긴 내가 왜 왔지? 물음 투성이었다. 어쩌면 어떤 힘에 끌려들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사라진 소를 찾아 성급한 마음에 이리저리 쫓아다니다가 어느 정자에 도달했다. 그곳에선 흰 수염을 흩날리며 두 노인이 바둑을 두고 있었다.

흠칫 곁눈질로 돌아보던 노인은 말 한마디 없이 바둑에만 열중했다.

‘세월 참 좋군요’ 혼잣말로 중얼 거리자 한 노인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빙긋이 웃으며 쳐다본다.

‘처자는 이 계곡에 무슨 일을 보러 왔는가?’

‘소를 찾으로 왔지요’

‘소? 보이지 않던데’

마침 바둑 돌 하나를 놓던 상대편 노인이 한마디 건넸다.

‘이번 판은 자네가 졌네’

‘이런! 처자에게 말을 걸다가 졌군!’

‘어르신 죄송합니다. 제가 방해를 했군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처자가 노래나 한 곡조 뽑아보게나’

여인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곁에 세워져 있던 거문고를 잡고 음을 고르고 다른 노인은 만파식적을 잡고 청아한 음률을 풀어낸다.

‘이기고 지는 게 무슨 의미람, 자 노래나 불러보게나.

여인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어떤 힘에 이끌리듯 몸이 건질 거려 움직이니 춤이 되고 입에선 저절로 노래가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천상의 목소리 황홀함의 극치였다.

그 여인 수로부인은(水路夫人) 신물에게 잡혀가기 일쑤였다.

너무도 예뻤기 때문에 자주 그런 신출한 일이 생겼다.

그렇지만 다시 지혜를 발휘해서 풀려 나오기를 수십 번이다.

이번에는 좀 색다르게 수로는 납치되어 무릉도원 같은 그 계곡에서 춤 한판과 노래 한 곡조를 뽑으며 보내고 있다.

수로는 불현듯 소를 찾으러 왔던 생각이 떠올랐다. 

‘어르신들 이젠 나가 봐야겠어요’ 

‘즐겁기 한량없는데 떠나다니, 어디로?’

‘집으로 가 봐야지요’ 

‘소는 안 찾고?’ 

‘계곡에서 찾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찾을 때까지 여기서 무작정 살 수야 없잖아요’

‘그냥 여기서 춤추고 노래하고 즐겁게 사는 게 좋지 않겠나?’

‘집에는 기다리는 낭군이 있사오니 가는 게 아녀자의 도리겠지요’

‘낭군이 그리운 건가? 암소도 찾지 못했는데 집에 가면 쫓겨나지 않겠나?

‘혼나더라도 가야지요 낭군이 어떻게 하실지 걱정이긴 해요?’ 

‘궁금할 것도 많네. 잘 살고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될 거야’

수로는 이곳에서 한나절 잘 보내긴 했지만 갑자기 집 생각이 났다  

‘꼭 가야 하겠니?’

‘그럼요. 집도 있고. 낭군도 있는 아녀자인데 여기서 춤추며 노래만 하고 살수는 없잖아요’

‘음 그럼 이것을 주마 갖고 가게’ 

‘뭔가요? 이건 꽃씨가 아닌가요? 그건 왜요?’

‘일단 갖고 가게나. 필요할 테니깐’

수로는 아쉬운 발걸음이었지만 계곡을 뒤로하고 동굴을 통해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아쉬움에 수로는 다시 뒤돌아보는 순간 그 동굴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계곡을 나서자 말자 저 쪽에 길에서 워낭소리가 들려온다.

어느 순행을 하는 사람들의 행렬이 눈에 들어왔다.

뻘쭘하게 길가에 비껴 서있는데 가까이 다가 선 행렬이 멈추었다.

수장인 듯 한 사람이 말을 걸어 왔다.

‘부인 참 아름답군요. 우리와 함께 가면 어떻겠소?’

‘제가 왜 동행을 해야 하나요?’

‘부인은 이번 수행에 꼭 필요할 사람 같아서요’

‘수행이라니?’

성덕왕대 ‘저는 성덕왕의 교지로 이번에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는 길입니다’

이 행렬은 경주에서 강릉 태수로 부임 받아 가는 길이라고 순정공(純貞公)이 자신의 역할과 신분을 밝히며 동행하기를 부탁했던 것이다.

‘수행에 도움을 좀 주시면 좋겠소!’

순정공은 지난 밤 꿈이 생각났다. 산 중에서 어떤 노인이 나타나더니 가는 도중에 한 여인을 만나게 될 것이니 꼭 그 여인을 내치지 말고 함께 수행을 하도록 부탁을 하라’는 꿈을 꾼지라 수로에게 간절히 부탁을 한 것이다.  

강릉태수의 임무를 띠고 가는 그의 애절한 눈빛을 거스를 수 없는 힘이 뻗쳐 나오는 듯 했다.

보통사람이 아님을 간파한 수로는 또 하나의 운명적인 역할을 맡게 됐다.

일행은 어느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게 됐다. 그 곁에는 높이 천 길이나 되는 돌산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바다에 닿아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꽃향기에 취해 둘러보던 수로가 천장 낭떠러지 끝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을 목격하게 된다. 붉은 꽃이 많이 피어 바위를 자줏빛으로 물들일 정도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적이 있었던 붉은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게 아닌가? 철쭉이었다.

앗! 저 꽃은 계곡의 정자 주변에서 활짝 피어 있었던 그 꽃이 아닌가?

수로는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그럼 제가 수행하는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순정공이 긴장하고 건너다보았다.

‘혹시 낭떠러지 꼭대기에 핀 저 꽃을 내게 꺾어 줄 수 있는 이가 있나요?’

수로가 주변을 둘러보며 부탁해 본다.

사람의 발길이 닿을 수 없으므로 불가능하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시종들은 머리를 흔들고 태수는 묵묵부답이다.

이 절박한 순간에 마침 어미소를 몰고 지나가는 노인이 있었다.

수로는 험준하고도 깊은 숲에서 소를 몰고 나오는 노인에게 자꾸만 눈길이 갔다.

지나가던 노인도 자꾸 수로에게 눈길을 던지는 것이다.

일행을 지나 몇 발자국을 지나가던 노인이 이내 멈춰 서서 수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다가온다.  

수로의 모습을 한참이나 살피던 노인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말한다. 

‘이 암소를 잡은 손을 놓을까요?’ 난데없이 노인은 알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수로는 산에 소를 먹이러 갔다가 잃어버렸던 소가 생각이 났다.

‘그대가 잃어버린 소를 잡은 내 늙은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면 저 꽃을 꺾어 드리지요’ 

자줏빛 바윗가에

잡고 있는 어미소를 놓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신다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헌화가(獻花歌)-

(紫布岩乎邊希/執音乎手母牛放敎遣/吾肸不喩慚肸伊賜等/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

누군가의 장난으로 엇갈린 운명을 서로는 알 수 없이 비껴가려고 한다.

하지만 수로는 알 수 없었지만 그 노인은 알 수 있었을까?

잃어버린 소와 찾은 소, 그것의 댓구처럼 위험한 바위 끝에 활짝 핀 철쭉을 꺾어서 바치는 것의 운명적인 헝클림을 서로가 가닥을 풀 수 있을까?

긴가민가하고 다가서보지만 여인이 도통 알아보지를 못하는 걸 보면 분명 젊은 시절의 수로를 닮은 사람이겠거니 하면서 노인도 망설이기기만 했다.

자신에게만 세월이 흘러 바싹 늙어버렸는데 젊은 한때 사랑했던 여인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 이었다. 설마 자신의 아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젊고 닮은 수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닌가? 자신을 몰라보고 있는 것을 보면 정말 자신의 아내가 아닐 것이고 닮은 사람이겠거니 여기고 더군다나 곁에 순정공이란 사람이 남편이 아니겠는가. 줄곧 애만 태우고 보고만 있었다. 일단 노인은 시도를 해본다.

50여 년 전에 소 먹이러 나간 아내가 행방불명이 돼버리자 천 길 낭떠러지 바위 꼭대기 까지 매일 올라가 기다리고 철쭉꽃이 피기 시작했고 그러길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자신의 나이도 80이 넘었다. 결국 아내는 돌아오지 않았고 지금 꼭 닮은 여인에게 자칫 실수라도 할까봐 짐짓 엉뚱한 시도를 해본다. 내 늙은 손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흥정을 해본다.

아무도 겁을 내서 꺾어오지 않으려는 저 바위 끝 철쭉꽃을 늙은 내가 꺾어와서 바쳐도 되겠느냐고 짐짓 말을 섞는다. 그 노인은 산중을 통해서 바위 꼭데기로 가는 길을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저 천길이나 되는 낭떠러지 바위 끝에 철쭉으로 물던 자줏빛 바위 꼭대기로 올라가서 활짝 핀 저 철쭉을 꺾어 드릴까요? 하고 슬며시 묻는 것이다. 그렇게 말을 섞어보지만 못 알아보는 것을 보면 자기 부인이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그렇게 헌화가 노래만 한 곡조 지어 부르고 노인은 떠난다. 마침 그 곁으로 암소를 끌고 가던 노옹이 수로부인의 말을 듣고, 그 꽃을 꺾고 또 가사(歌詞)를 지어 바쳤다고 하는데, 그 노옹이 누구인지는 모른다.

노인이 떠난 뒤 수로는 순정공 일행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수로는 험준한 바닷가 산길을 이리저리 알려주면서 행렬에 편승했다.

그 일행과 함께 바닷가에 연한 험준한 산악길을 가고 있는데 온갖 신물들과 괴물들을 맞닥뜨린다.

그럴 때마다 수로가 나서서 그 어려운 난간을 물리치고 무사히 일행들이 나아가도록 도움을 주었다.

그것은 계곡에서 나올 때 노인이 준 세 개의 꽃씨를 가져왔는데 두 알을 사용해서 귀신들과 괴물들 물리치고 나아간다.

천 길 낭떠러지 바위 꼭대기 위에 피어있는 철쭉꽃(躑躅花:척촉화)라고 부른 것이 음운변화로 철쭉이 됐다)을 꺾어 바쳤을까. 부임지로 함께 가던 시종들은 아예 고개를 저으며 사람이 도저히 올라갈 수 없다던 그 벼랑을 어미소를 몰고 가던 낯선 노인이 홀연히 나타나 그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했던가? 정체도 알 수 없는 노인이 왜 꽃을 꺾어 바치겠다고 ‘헌화가(獻花歌)’를 부르고 유유히 사라졌는지 참 궁금해진다. 그리고 그 철쭉이 그렇게 예뻤을까? 우리나라 토종으로 매우 아름다워 지나가던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는 의미로 척촉화(躑: 머뭇거릴 척, 뛰어오르다. 躅:머뭇거릴 촉, 밟다, 자취, 행적)라고 부른다. 철쭉꽃을 통해 어려운 시대를 힘차게 헤쳐 나갈 때 정계나 관료들 또는 개인들도 강인한 철쭉꽃을 보고 마음을 달래며 용기를 얻었다고 하는 꽃이다. 아름다운만큼 강렬한 유혹의 눈길로 길손의 발길을 붙드는 화려한 너의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발길을 멈추었다고 한다. 철쭉은 우아하고 아름답고 언덕이나 절벽사이 틈새에 피어 비바람과 온갖 풍상에도 굴하지 않는 모습이 강인함이 우리 민족성을 빼어닮인 정서가 깃든 꽃이기도 하다. 꽃말은 사랑의 기쁨이다. 추한모습 보이기 싫어 가장 절정기 때 송이채 낙화해버린다고 한다.

일행이 나아가다가 바닷게 연한 정자에서 쉬는 사이에 수로는 또 일을 벌이게 된다. 용에게 납치되다시피 수로는 용궁으로 가게 됐다. 용궁의 보석 그리고 향기로운 음식 즉 그리고 향기를 갖고 다시 용궁을 빠져나오는 수로. 용에게 납치돼 간 게 아니라 제 발로 스스로 용궁에 간 것이 아닐까 싶다. 어떤 것이 그녀에게 극복하는 힘을 준 것일까. 물론 계곡에서 노인이 준 세 개의 꽃씨 중 마지막 꽃씨를 이용해서 용궁을 빠져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꽃을 꺾어 달라’는 요구, ‘수로부인을 내놓아라’는 요구에서 노인은 조력자로 나티나지만 수로는 결국 이 지상의 욕구보다는 다른 세계에서 욕구를 채우고는 탈출해 나오는 승리자로 표출되고 있다.

산에선 ‘헌화가’가 나오고 바다에선 ‘해가’가 나오는 것이다.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녀를 빼앗아간 죄가 얼마나 큰가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구워 먹으리라.

-해가(海歌)-

(龜乎龜乎出水路/掠人婦女罪何極/汝若悖逆不出獻/入網捕掠燔之喫)

글 |정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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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2 ‘수로부인조(水路夫人條)’에 실려 있는 설화. 신라시대 이름 모를 노인에 의하여 불린 4구체 향가. 신라 성덕왕대 순정공(純貞公)이 강릉 태수로 부임해 가는 여정에서 동행하는 여인 수로와의 긴 여정을 읊은 가사(歌詞)들이다. 수로행에서 얻은 ‘헌화가’와 ‘해가’ 두 편의 시가가 현대 상황과도 맞아 떨어지는 듯하다.

당시 신라의 서울이었던 경주에서부터 강릉 태수로 임명 돼 떠나는 천리길, 바다와 산이 연한 경계의 길을 아름다운 여인 수로와 함께 권력을 지니고 권세의 길로 나서는 태수의 여정에 홀연히 소를 타고 나타난 노인과 천길 벼랑위에 핀 꽂. 그리고 바다 용왕의 납치사건 등으로 이어지면서 수로부인의 행열은 산과 바다의 난관을 다 극복해내는 설화성을 갖는다. 마치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으로 경전을 얻으러 가는 여정 같다. 여기서 ‘수로’는 임지에 오르는 태수의 안전한 수행길이 물 흐르듯 완수하기 위한 무녀의 주술성을 갖는 역할과 장해를 해결하는 노인은 신적인 영험을 보이는 신성으로 표출하기도 한다.

영원히 늙지 않는 순수 아름다운 것의 승리를 나타내고 있는 걸까. ‘꽃을 꺾어 달라’는 요구, ‘수로부인을 내놓아라’는 요구에서 노인은 조력자로 나티나지만 수로는 결국 이 지상의 욕구보다는 별세계의 욕구를 채우고는 탈출해 나오는 승리자로 표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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