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東夷)가 바바리안인가?

식민사관의 괴수인 이 모씨가 과거 미국의 어느 역사 세미나에 갔는데 외국학자가 동이(東夷)에 대한 설명을 부탁하자 동이족을 ‘eastern barbarian’이라고 풀었다는데… 듣고 있던 우리나라 학자들이 깜짝 놀랐다고 한다. 동이(東夷)라는 것을 한자식으로 직역했다는 말이다. 동이에 대한 기존 역사의식도 없으면서 외국 학계에 왜곡된 역사관을 심어 주는 것을 보면 우리역사에 대한 인식도 일천한 그들이 한국을 대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노까지 느끼게 된다고 모 박사는 당시의 감정을 격하게 드러냈다. 우리 스스로가 우리선조들을 야만스럽게 본 것이다. 이처럼 바바리안이라는 표현은 서구의 시각으로 외부자를 위험하고 미개한 존재로 상정하는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을 반영한다. 따라서 서양인들에게 ‘동이족’을 ‘동쪽의 바바리안’으로 풀이해주면 자동적으로 ‘야만스러운’ 인식을 심어주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동이는 중화족들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이 동이족을 대륙 역사에서 밀어내기 위해서이기도 하겠지만 동이족은 두려움과 폄하의 대상이었다고 본다. 바바리안(barbarian)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 피터 브라운(1935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근대사를 공부하고 계속 교수로 할동했다. 그는 초기에 프랑스 사료학파의 영향을 받아 인류학과 사회학을 역사적 분석의 도구로 삼아, ‘문화와 종교’를 사회현상이나 역사적 변천과 변혁의 일부분으로 해석했다)의 글을 참고 해 본다.

우리 선조들이 동이족이다. 흔히 동쪽 오랑캐라고 엉터리로 가르치고 있다고 강상원 언어연구가는 지적했다.

옥스포드 사전에서 찾아보면 프로미넌스 엑셀런트 또는 슈퍼네셔럴 또는 인텔리전스 프로빈스 등등 아주 최고의 단어를 가지고 있는 글자라고 강상원 박사는 말한다.

이걸 중화인도 우리의 역사를 완전히 비하하고 자기들이 위대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그런 엉터리가 있다는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이야기다. 우리 선조들은 예절이 밝은 나라라 공자도 동이족이 사는 땅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말을 논어에 기술해 놨다.

영화 <코난:암흑의 시대(2011, 미국> 스틸 컷

바바리안은 누구인가? 유목민과 자작농 Who are the Barbarians? Nomads and Farmers

정착지를 지배하던 제국들은 언제나 바바리안(야만인)’으로부터 문명을 수호하는 존재로 자신을 드러냈다. 그러나 각 제국에게 의미 되는 ‘바바리안(Barbarians)’과 자신의 국경에서 그들과 맺는 관계는 제국마다 현저하게 달랐다. 서유럽이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로마 제국이 북부 경계를 따라 거주했던 ‘바바리안’들과의 관계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판명된 것에 기인한다. 중동의 고대 제국들과 아라비아 사막과 중앙아시아 대초원 지대에 살았던 유목민들의 관계에 비하면, 로마 서부의 ‘바바리안’들은 거의 ‘바바리안’이라고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유목민이 아닌 자작농이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은 바르다이산과 동시대인들에게 바바리안은 많은 것을 의미했다는 것이다. ‘바바리안은 막연하게 골칫거리인, 심지어 매혹적이기까지 한, 다른 문화와 언어 집단 출신의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러한 기준에 비추어 볼 때, 페르시아인은 ‘바바리안’이었다. 그리스인과 바르다이산과 같은 동부인들에게는 로마인들조차 ‘바바리안’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처럼 바르다이산에게도 ‘바바리안’은 사실상 ‘유목민’을 의미했다. 유목민은 문명화된 삶의 척도에서 가장 하위에 있는 인간 집단으로 여겨졌다. 사막인들은 가능할 때마다 경작지를 지배하고 파괴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항상 위협하는 존재로서, 사막과 경작지는 태곳적부터 해결되지 않은 반목의 상태에 놓여 있었다.

물론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이런 과장된 고정관념은 거의 사실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목축농과 소작농은 단조롭고 유익한 공생 관계를 맺으며 서로 협력했다. 비록 괄시받았을지언정 유목민은 유용한 하위층으로 대해졌다. 비록 종종 거슬리기는 했지만 이러한 방랑자들이 정착 세계를 위협할 정도의 영구적인 위협은 결코 될 수 없었고, 하물며 왕국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수메르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동에서의 사막 유목민들에 대한 멸시로 인해,(이전 유목민들의 너무나 충격적인 업적인) 7세기 아랍 정복과 자연스럽게 뒤따른 이슬람 제국의 탄생은 동시대인들을 매우 놀라게 했다. 아라비아의 뜨거운 사막으로부터 비롯한 대규모의 침입과 정벌은 예측됐던 것이 아니었다.

항상 두려움을 느꼈던 이들은(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지만) 오히려 헝가리의 푸슈타에서 우크라이나 남부를 가로질러 중앙아시아와 내아시아까지 뻗어있는 초원지대인 추운 북쪽 지방의 유목민들이었다. 이 지역의 여건은 공격적이고 잘 조직된 유목 제국의 간헐적 출현에 유리했다. 빠르고 건장한 말 떼들이 북쪽 초원지대의 마른 풀밭에서 빠르게 그리고 거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 번식했다. 지나치게 풍부한 생명체들(말들)은 전장에서 유목민들에게 묘한(초자연적인) 기동성을 부여하며 무장한 한 국가의 무시무시한 출현을 선사했다. 중앙아시아의 훈족 연맹은 4세기 중반 캅카스 산맥을 관통하여 아르메니아의 골짜기로 진입했다:

그 누구도 기병대의 방대함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모든 병사는 돌을 옮기고 아래로 던져 돌더미를 만들도록 명령받았다. 과거의 사건을 이해하기 위한 내일을 위해 남겨진 두려운 징후들. 그들이 지나가는 곳마다, 길을 따라가는 모든 교차로에 그런 표식들을 남겨두었다.

그런 케일런의 광경이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아라비아와 사하라 사막의 유목민들에게 감명받지 않은 문명 세계의 통치자들은 불안한 시선으로 북쪽 대초원의 유목민 세계를 샅샅이 훑어보았다.

그러나 비록 초원지대의 유목민 제국들이 아무리 무섭다고 한들, 그것은 간헐적인 현상이었을 뿐이었다.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실질적인 유목 생활은 가족의 최대 분산에 의존했고, 각각은 중앙 권력의 최소 개입 상태에서, 유리한 목초지로 가축을 이동시키는 데에만 주도권을 유지했다. 정복과 약탈을 통해 한 명의 통치자의 통솔하에 가축을 모는 것에서 인간을 모는 것으로 전환하는 것은 유목 세계의 오랜 역사에 있어 이례적이고 대개는 단명하는 발전이었다. 심지어 아틸라(434-453)와 같은 강력한 군 지도자조차도, 유럽의 상상력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음에도, 그의 야망이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착지의 거주민들을 공포에 떨게 했던 그의 능력은 자동으로 ‘중단’됐다. 훈족은 토착 초원지대에서 멀어질수록, 그들에게 군사적 우위를 제공했던 방대한 수의 말을 위한 목초지에서 멀어지게 됐다. 오싹한 수십 년 동안, 아틸라는 로마 세계에서 공물을 갈취했다. 그러나 453년 그의 타계 이후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그의 유명한 훈족 제국은 붕괴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결과 유목 민족들은 유럽의 역사에서 주변적인 역할만을 담당했다. 서기 5세기 훈족은 7세기와 8세기에 아바르인족에 의해 계승됐다. 하지만 아바르족 역시 수십 년간의 화려한 무력을 과시하고 나서야 정착했다. 훈족과 아바르족이 가져온 것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당대 많은 이들이 우려를 했던 세계의 종말이 아니라 그들 뒤에 놓여 있던 거대한 공간의 암시였다. 동유럽과 우크라이나의 유목 연합들은 유럽의 정착 사회가 거의 필적할 수 없던 광대한 지평을 가진 국제적 유라시아 세계에서 최서단의 대표자들이었다. 희귀한 물건의 이동과 관습의 차용이 이를 보여주었다.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날짐승과 똬리를 튼 용이 반향된 복잡한 금세공이 박힌 북아프가니스탄의 석류석이 아틸라의 다뉴브 궁전으로 흘러 들어갔다. 5세기 중반에 이르러, 그러한 보석은 로마의 장군들과 지역 왕들에 의해 똑같이 높은 지위에 상응하는 국제적인 ‘바바리안 세련미’를 형성했다. 매사냥도 이 시기에 중앙아시아에서부터 서유럽으로 들어왔다. 8세기에는 다뉴브강과 프리울리 사이 지역에서 롬바르족과 아바르족이 접촉하면서 엄청난 신문물인 등자(鐙子)가 서부 유럽의 마부들에게 확산했다. 오랜 시간 동안 빈과 접경한 지역의 통수권을 지녔던 아바르 총독은 여전히 중국 지방 총독의 공식 직함을 어렴풋이 상기시키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동유럽에서 유목민은 이 시기와 그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다. 그러나 서유럽에서 아틸라와 이후에 아바르족을 낳았던 진정한 유목 세계는 비록 인상적이기는 했지만 아득하게 남아있었다. 서유럽에서 진정한 유목민은 드물었지만, 로마인들은 모든 ‘바바리안들’을 고대 세계에서 매우 통했던 근본이 없고 난폭한 이미지로 동화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바바리안에 대한 우리의 이미지는 로마의 태도에 의해 물들여졌다. 우리에게도 바바리안은 로마의 경계부 너머에 있는 가장 기동성 있고 위험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서구 유럽에서 로마인과 ‘바바리안들’ 사이의 관계는 상당히 다른 방식으로 생겨났다. ‘정착’ 지역과 ‘바바리안’ 지역의 대립은 바르다이산과 같은 근동 지역민에게 매우 중요했다. 이는 농부와 유목민 사이에 있던 고대의 대립과 거의 일치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대립은 브리튼, 라인강, 그리고 다뉴브강과 같은 로마의 경계 지역에 관해서는 적절하지 않다. 정착 세계의 이데올로기는 마치 아주 깊은 골이 로마 제국의 경계 내에 속한 사람들과 그 외부에 모여 있는 바바리안을 분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그들의 삶은 마치 초원지대와 사막 유목민들의 삶과 같은 것처럼 치부되어, 문명인들의 삶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것으로 묘사됐다.

번역 | 강지영(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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