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식부터 무교의 시작

Picture of 조성제
조성제

우리에게 무교의 시작은 한단고기나 부도지나 모든 상고사에 무지무지한 기록이 많이 나온다.

하늘에 제천의식을 했다는 게 바로 우리 무교의 시작이다.

대한암흑기에 우리 무교를 무속이라 바꾸고 미신이라고 비하하기 시작했다.

또 풍물이라는 것을 한웅천왕의 문물이라 생각하는데 풍물을 일제는 농악으로 바꿨다.

풍물이란 이 용어 자체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이 담겨 있는데 농악은 아무런 정체성이 없다.

대한암흑기 일제의 민속학자들이 무교를 무속으로 바꾸고 풍물을 농악으로 바꿨는데 우리는 농학을 가지고 세계 인류 문화유산으로 등록하겠다고 하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지 풍물로 해야지 왜 농학인가.

그와 마찬가지로 상고시대에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민족이 하늘에 제사 지낸 그 기록들이 수없이 많이 나온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보면 부여 영고, 고려의 동맹, 예의 무천 이런 행사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이런 행사는 그 이전부터 있었지만 예의 무천 같은 경우에도 왜 예의 무천이냐? <사고전서>나 <만주원류고>를 보면 ‘고조선의 무천’이라고 돼있다.

일제 조선총독부 때 고조선을 신화로 만들었기 때문에 고조선에 무천이라고 할 수 없는 거다.

그러니 우리가 배운 역사책에서 ‘예의 무천’이라고 나오는 거다. 그럼 부여의 영고, 고려의 동맹, 고조선의 무천 이런 제천 의식이 물론 그 전부터 있었지만 이런 의식들이 어떻게 무속 행위냐 무교행위냐? 영고는 북을 치면서 신을 맞이한다는 거다.

동맹은 동쪽을 바라보고 맹세한다는 거고, 무천은 하늘을 향해서 춤을 춘다는 것이다.

일월성신맞이라는 굿이 있다. 이 굿은 신 내림 굿을 할 때, 내가 처음으로 무당이 될 때 제일 먼저 하는 굿거리다.

일월성신이라는 거는 글자 그대로 해와 달과 별을 받아 모시는 굿거리다. 근데 이 굿은 동쪽에다 상을 차려놓고 북을 치면서 하늘을 향해 무당들이 춤을 추는 거다.

이 일월성신맞이 굿에 바로 부여의 영고, 고려의 동맹, 고조선의 무천이 다 함축돼 있는 국거리가 바로 무당들이 무당이 되기 위해서 제일 처음하는 굿거리가 바로 일월성신맞이라는 거다.

이것이 바로 우리 굿 속에 우리가 알고 있는 영고와 무천과 동맹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삼국사나 삼국유사에 보면 남해 차차웅이라고 나온다. 신라 이대 차차웅은 무당이었다.

신라 시대 임금들은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아시다시피 신라 법흥왕 때까지는 임금이라기보다는 제사장의 개념이 더 강했다.

제사장의 개념이다. 지증마립간까지 법흥왕이 이차돈의 순교 이후부터 법흥왕이라 그러지 그 전에는 전부 마립간 이사금 차차웅 거서간 이렇게 불렀다.

삼한관경 본기에 보면 한웅 천왕이 제사를 지내러 갈 때 풍백은 천부의 거울을 새겨 앞서가고 우사는 북을 치며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고 그랬다. 운사는 백금을 들어 호위를 한다. 이것도 바로 한웅천왕이 제사를 지내러 갈 때 행사하는 모습이다. 천부의 거울을 새겨 앞서가고 천부의 거울이 바로 동경이다. 무당들한테 가장 필요한 무당들이 일월성신 맞이할 때 가장 먼저 사용하는 게 동경이다. 그걸 명두라고 한다. 명두 밝을 명(明)자 별 두(斗)자 명두는 뭡니까 해와 달과 별을 명두라고 한다. 무당들이 사용하는 명두 뒤에는 해와 달과 북두칠성이 반드시 그려져 있다. 중국이나 일본 무당들도 명두를 사용한다. 그런데 중국과 일본무당과 우리 무당의 명두 차이점은 북두칠성이다. 그들 명두엔 북두칠성이 없다. 몽골 무당들도 명도를 많이 사용하는데 북두칠성이 없다. 우리말에 ‘소꼬리 진 놈이 임자다’라는 말이 있다.

소꼬리 쥔 놈이 바로 임금이라는 뜻일 게다.

그 말이 강희자전에 나온다. 제사를 지낼 때는 그 당시에 모우라는 털이 긴 흰 소꼬리를 잡고 흔들었다. 이 모우의 꼬리가 풍물패에 상쇠머리에 올라가서 상모가 되는 거다.

이 모우를 달고 있으면 그 조직의 우두머리라는 거다.

몽골의 징기스칸 옆에 항상 저 모가 서 있다.

왜 징기스칸이 수장이니까. 하얀 모가 쓰여 있을 때는 평화시고 까만 모우가 서있을 때는 전쟁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다. 설문해자에 보면 신명을 잘 다루는 사람들이 있는데 남자는 격이고 여자는 무라 그런다.

심령이 나는 사람이 있는데 남자는 격이라 그러고 여자는 무라 그런다. 격은 바로 축문을 읽고 제사를 준비해주는 그런 사람이다.

우리가 지금도 유교에서도 제사를 지낼 때는 남자가 축문을 읽고 남자가 시장 보러 다니고 남자가 상을 차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게 다 유교의 예법이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져서 유교의 예법이 생긴 건 아니다.

옛날 삼국시대 때 우리가 하늘에 제사 지내던 그 풍습들이 변하고 발전시켜서 지금의 유교의 예법이 생긴 거지 어느 날 갑자기 공자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니다.

예전에는 무당들이 의사였다. 조선시대 그런 기록들이 많이 나온다.

또 <산해경>에는 무왕국이라고 있다.

고구려 시대의 무교 구시대의 상고시대의 그 무교 흔적은 너무나 많다.

우리 한단고기나 부도지나 모든 신시의 제사가 바로 무교의식이다.

고구려 무는 고구려의 무교는 우리는 우리의 역사는 늘 성자의 역사다 보니까 고구려의 무기에 대해서 그 기록들이 굉장히 적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적당하게 사모가 있었다.

사무는 뭐냐 왕을 왕이 무슨 일 있을 때 조하고 묻고 하는 무당이 있었다.

사모가 있었다는 그 기록 정도가 나옵니다.

당나라 침공 시 주몽의 무당이 제사 지냈다.

백제도 마찬가지다. 백제도 패망한 날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 기록이 많이 안 나온다.

삼국사기나 이런 건 다 승자의 역사 신라 신라의 기록은 나오지만 백제의 기록은 드문 편이다. 비교적 신라는 기록이 많이 나온다. 차차웅이라는 이런 기록도 나오고 신라는 일단은 보면 고구려하고 백제하고 신라가 다른 거는 고구려는 소수림왕2년 372년에 불교를 받아들였어요.

호국불교 왕권을 강화시켜준다는 명목 아래 왕들이 입맛이 당겨서 금방 받아들였다.

고구려가 받아들이니까 백제도 금방 받아들였다.

백제가 373년에 받아들였어요. 불교를 국기로 했죠.

신라는 고구려 백제보다 152년인가 155년인가 늦게 국교를 맞아 들였다.

그 이유는 신라는 그만큼 신교가 강했기 때문이다.

육부족 장들이 소위 말하면 내각 정치를 하고 왕들은 제사장의 개념으로 많이 존재했다는 거다.

지증왕까지 법흥왕이 이차돈을 순교시키고 불교를 공인하기 전까지는 다 마립간이었다.

다 거서간이었고 차차웅이었고 이사금이었다. 그거는 제사장의 개념이지 통치의 개념은 아닙니다.

신라의 금관이 임금이 쓰는 왕관이라고 한다. 천만의 말씀 제사장이 쓰는 모자다.

제사장이 쓰는 모자지 임금이 그런 모자를 쓰고 어떻게 그 정사를 보는가. 그 출저나 모든 것들이 삼한하고 관련되는 형태이다.

신라 김유신의 백마가 천관녀 집에 가니까 김유신이 백마의 목을 쳤다는 기록 나온다. 천관녀는 기생이었다고 배우고 알고 있었다. 기생 이름이 천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을까 기생은 매화나 월매나 뭐 이렇게 부르는 것을 봐도 그렇다. 바로 김유신의 어머니가 만명이라 알려지고 있다. 김유신의 어머니가 만 명이라 그럽니다.

이능화의 조선무속고에도 기록이 나오고 여러 군데 기록이 나온다. 김유신의 어머니가 무당이었다. 샤만이었다.

그렇지만 그 시대에 벌써 왕이나 귀족 사이에서는 불교 사회로 정착됐기 때문에 샤만을 고집해서는, 신교를 고집해서는 너는 출세 못 한다. 김유신이 신교를 믿었으면 출세할 수가 없다.

그래서 김유신의 어머니 만명부인이 내가 무당 노릇을 안 할 테니까 너도 가지 말라며 김유신 엄마가 무당을 접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김유신이 출세를 한 거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 무당들 사이에서는 신어 내렸는데 소위 말해서 무당 노릇을 안 한 사람, 무당 노릇을 잘 못하는 사람을 보고 만명신이라고 한다.

처음엔 말명으로 부르고 있는 만명이 와전됐다.

이렇게 신라 시대에는 신교가 굉장히 강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서는 경상도 지방이 무교가 가장 센 편이다. 경상도 무당들이 가장 억센 편이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물론 불교가 들어와서 무교가 중심 세력에서 밀려났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뿌리를 받고 민중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어느 정도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시대 유교가 들어오고 성리학이 들어오면서 고려시대 때부터 우리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무교를 탄압했다고 우리는 알고 있지만 사실은 고려 인종 때 1131년부터 상소 올라온다. 무당들을 성 안에 못 살게 하라고 상서도 올라왔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때까지는 연등제 팔관회라는 행사가 있었다.

연등제는 불교 중심으로 행사했지만 팔관회는 신교 중심의 행사였다.

팔관회를 주관하는 무당을 선간이라 그랬다. 고려시대에는 뼈대 있는 집 안에서 무당이 내리면 선관이라 그랬고 일반 백성들이 무당이 내리면 무당이라는 기록들이 나온다.

그러면서 무당들한테 고려시대 때부터 세금을 거두기 시작했다.

세금을 우왕 13년에는 말로도 세금을 거뒀다고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동국통감에 보면 무풍을 음사로 규정해서 도성에서 쫓아냈다.

이때부터 시작해서 조선시대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교는, 굿은 음사로서 항상 비판받고 매도되어 왔다. 그렇지만 고려사 기록을 보면 무당들한테도 이렇게 벼슬을 줬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무당들은 8천민으로 떨어졌다. 승려, 기생, 백정, 광대, 무당 등 이렇게 8가지 업종들은 8천민으로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정책적으로는 무교(무당)를 굉장히 탄압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계속 믿어왔다. 기우제를 지내는 데 무당들을 굉장히 많이 동원했다. 조선시대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데 100명씩 동원해서 기우제를 지내도록 하고 또 성호사설을 보면 궁궐에서부터 도시를 무당들이 마음대로 출입을 했다. 그래서 무풍이 만연했다. 그래서 조선시대는 국무와 이런 게 다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조선시대에는 성수청이라는 기관이 있었다. 성수청은 고려시대 별례기은도감이라는 것을 모방에서 만든 건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서 무당들을 두고 빌게 했다.

우리가 조선시대에는 해품달 때문에 많은 인기를 얻어가지고 국무는 한 사람만 있는 걸로 생각하는데 국무는 굉장히 많았다. 각 지방에 나라를 위해서 제사 지내는 장소는 다 국무가 주관을 했다. 그 제사를 주관하는 무당은 국무라 그랬다. 최고 무녀를 도문녀라고 했다. 그래서 보면 가마산 덕적도 등에서 모두 제사를 지냈다.

그 다음에 동서할인원이 있는데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시립병원이다. 이곳에 무녀들을 한의사들과 같이 기거를 하게 해서 병을 고치게 했다. 그런데 중요한 거는 동서할인원의 운영 경비를 무녀들이 조달을 했다. 또 조선시대에는 각 마을마다 단골 무가 한 명씩 있어서 1년 동안 그 마을이 병도 없고 또 별다른 우환도 없이 무사히 넘어가면 무당들한테 세금을 감면해줬다

조선시대에는 그렇게 탄압하고 핍박하면서도 무당들한테 세금을 엄청나게 거뒀다.

충해왕 4년 때 조선시대 호조 때 책정한 무당 세금을 보면 국무당은 구리가 9근이다. 그 당시에 보면 정, 종일품의 정승들 세금이 구리 10근이었다.

영조 20년에 무당들한테 세금을 베 한 필씩 걷었다.

그래서 19세기 만기요람이라는 걸 보면 그 당시에 무세로 거둬들인 베가 1326필이었다. 그러니까 그 당시에 조선시대 무당들 대강 숫자가 나오는데 세금 안낸 무당도 있을 거고 또 도망간 무당도 있을 것이니 약 2천 명은 되지 않았을까. 문제는 황해도 이남 무당들한테만 받았다. 황해도 이북 무당들은 뭐 했느냐? 이북 무당들한테 세금 걷어서 국방비로 썼다.

국방비 지금도 국방비가 국가 재정이 가장 많은 돈을 차지하는데 무당들한테 걷어서 무당을 그렇게 탄압하면서 무당들한테 돈을 걷어서 국방비로 사용했다는 게 참 웃기는 이야기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지방 탐관오리들은 자기들이 또 세금을 만들었다.

근대사회 우리 무속은 대한암흑기 때 우리가 너무나 많은 핍박을 받아왔다. 일본 애들이 일본 강점기 때 신도와 우리 무교는 똑같다. 그러니까 너희들은 무교를 믿지 말고 신도를 믿어라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바로 기본 원리가 그 중에 하나가 이 무교도 들어갔다.

우리 무교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그 시대에 정책에 의해서 많은 핍박을 받아왔다.

많이 힘들었다. 살아남기 위해서 많이 변했다. 본질은 있어도 많이 변해왔다.

일본 신도는 우리와 어떻게 다른가 보았더니 우리와 같았다.

다만 우리처럼 세습무가 강신무가 아니기 때문에 책을 보고 읽고 책을 보고 이야기 하는 게 다르지 우리하고 똑같다. 그들 일본 신사는 세습으로 내려온다. 일본 신사는 신사와 신궁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신사는 우리나라의 성황당과 같은 개념이다. 그 지방에 장군이나 그 지역의 신들을 모시는 것으로 그 마을의 평화를 위해서 모시는 신이다. 농사를 위해서 모시는 신이다. 그런데 신궁은 천왕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만든 게 신궁이다. 천왕가에서 경사스러운 일이 생길 때 신궁을 짓는다. 이번에 태자가 태어났다 태자를 위해서 태자공을 하나 짓고 신공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다 공사라 그래 공사 공사는 공무원입니다.

신도 학과를 나 대학교 신도학과를 나와서 국가시험을 봐서 합격을 해야 신궁의 궁사로 갑니다. 메이지 신궁 야스쿠니 신사 이런데 그건 공무원이에요.

그렇지만 조그만 동네에 있는 작은 신사는 세습으로 대로 세습으로 그 사람들은 신주라고 그럽니다. 이 사람들 신주고 일본은 신궁이라 그러고 그래서 근대사에서는 우리가 일제강점기 때 우리 일본 순사들이 우리가 마을 굿을 하면은 굿을 하기 전에 반드시 신고를 하라 그러고 이렇게 했습니다.

우리가 마을 굿을 하는 것은 1년 동안 마을에서 사소한 감정으로 다투었던 이웃 간의 반목과 갈등 논물 대다가 사오고 애들 사면 어른 사람 되고 이런 갈등들을 마을 굿을 통해서 마을 굿을 통해서 다 푸는 거다. 해원상생하는 그런 순기능이 있다.

도당굿이나 부군당굿, 마을굿 등은 굿을 통해서 굿판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뭉치게 되면 반일감정으로 와전될까 싶어서 늘 굿을 통제하고 못하게 해왔던 것이다.

그런 풍습이 광복되고 난 뒤에도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80년대까지도 무당들이 굿하다가 누가 신고하고 순사들이 오면 다 도망갔다. 산으로 들로 괜히 잡히면 죄목도 없어 벌벌 떠는 거다.

기껏 해가 경범죄 처벌법 소란 행위, 장고 뺏기고, 징 뺏기고, 옷 뺏기고 다 뺏기고 산으로 도망다니면서 그런 세월을 살아왔다.

지금까지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 살펴보았는데 이걸 공부하면서 보니까 우리나라 시대에 고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고려, 조선을 살펴보았는데 민족의 정체성을 상실한 정권이 들어섰을 때, 그 정권이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외세에 의존할 때 그런 시기가 오면 가장 먼저 탄압받는 게 무교였다.

그래도 고려 중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고려 중기부터 서서히 탄압받다가 조선시대에 명나라 소국이 되고부터 엄청나게 탄압했다.

대한암흑기 때 엄청나게 탄압했다. 광복되고 난 뒤에 이유도 없이 탄압을 받았다.

또 기독교의 탄압이 있었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막 짓밟았다.

그것은 우리 국민들이 늘 무속은 미신이고 사람을 현혹하는 거고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이런 교육을 받아왔고 그렇게 알고 있기 때문에 그걸 당연시 해왔던 것이다.

제가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지만 전 세계에 자기 나라의 샤만을 이렇게 폄하하고 매도하고 무시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밖에 없다. 제가 몽골도 가보고 캄보디아, 태국, 중국, 일본 무당도 모두 만나봤다. 그들은 굉장히 당당했다. 우리나라 무당들은 사제 교육도 못 받은 점도 있지만 무당 된 자체가 죄인이란 생각을 갖고 있다. 무슨 큰 죄를 지었는지 죄인 취급을 해버리는 것이다.

조성제

Share:

Facebook
Twi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