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짓날에는 추억을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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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

‘가을엔 집에 강아지도 바쁘다’라는 말이 있다. 햇살 좋은 가을에 분주히 갈무리를 하다보면 어느덧 겨울이 성큼 다가와 있다. 장독대 위에 서리 맞고 떨어진 고운 단풍잎이 가을이 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어느 시인의 시구(詩句) ‘오메, 단풍 들것네’를 대뇌이며 ‘오메, 또 한 해가 가내’하며 서글픈 사설을 지껄인다. 회한이 없는 한 해는 없는 것 같다.
마지막 가는 겨울 햇살이 아까워 친구를 불러내 드라이브 일광욕을 하다가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시골 장 구경까지 호사한 하루였다. 시골 장터는 계절을 느끼게 해줘서 정겹다. ‘아~~ 그렇지? 청국장을 할 때지’ 이런 식으로 말이다.
붉은 빛깔의 햇팥이 추억을 떠올려 한 무더기 사왔다. 더운 여름에 뜬금없이 팥죽이 그리워 사다놓은 묵은 팥이 그대로 냉장고 한 켠에 있었다. 어릴 적 엄마 뒤꽁무니따라 장터에 가면 팥죽 할매가 있었다. 구석 한 켠에서 늘 허리를 구부리고 팥죽을 팔고 있었다. 언젠가 지나가다 팥 칼국수 집이 있어서 반가워 팥죽 한 그릇을 사 먹자니 같이 간 젊은 동생이 하는 말 ‘이게 그렇게 맛있어요? 난 별룬데…’하면서 시큰둥했다. 별 특별한 맛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생각해 보니 추억의 맛을 즐겼던 것 같다.
동짓날까지는 바빴던 것 같다. 벼 타작에 콩바심, 곳간문이 활짝 열리고 마을 전체가 들뜨고 무언가로 시끄러웠다. 그러다 가을걷이가 끝나고 한숨 돌리며 팥죽, 팥 시루떡을 찌며 한 해가 마무리 되었던 것 같다.
동지가 끝나면 갑자기 동네가 조용해진다. 들에 있던 사람들이 다 뜨뜻한 사랑방을 찾아 모여 들었기 때문이다. 다음해 농사 얘기도 하고 화투, 윷도 치며 휴식에 들어간다.
동짓날 아이들 또한 바쁘다. 동네 어른들이 팥죽과 팥떡 돌리기 심부름이 아이들 몫이기 때문이다. 팥죽 들고 가면 칭찬과 덕담을 듣던 흐뭇한 추억도 있다. 동짓날 뜨뜻한 아랫목에 모여 서로 새알심이 내 꺼가 적다고 다투며 먹던 팥죽! 사실 맛은 잘 기억에 없다. 추억과 애정 어린 엄마의 잔소리 밖에는….


그래도 난 동지를 기다린다. 추억을 소환하며
돌아가신지 몇십 년 되는 엄마가
바로 얼마 안 되는 것처럼 그리워하며
팥죽을 쑬 마음에 설렌다.
사람은 음식 맛보다는
추억을 먹는 것 같다.


어느 날 암 환자를 돌보던 수녀님이 찾아 오셔서 환자의 소원이 어릴 적 어머니가 해 주던 묵은 동치미 무침이라며 부탁하셨다. 나는 불로초라도 찾는 심정으로 어릴 적 도시락 반찬에 자주 싸주던 동치미 무침을 해 드렸다. 가난한 시절의 표징 같아 아니 반찬 같지도 않아서 몇십 년 잊고 있던 반찬이다. 비슷하게 흉내내 해드렸더니 1주일 후 맛있게 드시고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할아버지가 드신 마지막 음식은 고작 어머니가 해준 무 짱아지였던 것이다. 모든 보양식과 영영사의 처방이 다 소용없었다. 역시 사람은 추억을 먹는가 보다. ‘첫 입맛이 평생을 간다.’라는 주장이 근거가 있는 듯하다.
아기가 태어난 후 모유를 먼저 먹이면 모유를 좋아하고 분유를 거부한다고 한다. 이 사례만 봐도 어릴 적 맛의 기억이 평생 간다고 생각해도 될 것 같다. 그래서 맛의 기준도 천차만별이다.
나라가 할로윈데이 악몽으로 떠들썩하다. 동짓날은 우리나라식의 할로윈 데이다. 귀신이 심술부리지 말라고 액땜으로 붉은 팥죽과 팥떡(고사떡)을 해서 악귀가 못 들어오게 대문에 바르고 팥 죽상을 놓기도 했다. 이거 먹고 ‘악귀야 물러가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올해 동짓날에도 나는
팥죽을 한 솥단지 끓일 것이다.
많이…
‘오늘이 동짓날이잖아요.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이니 이제 어렵던 한 해가 드디어 갔네요. 팥죽 먹고 악귀야 물러가라 하고 내년엔 잘 풀릴거예요!’ 라고 너스레를 떨고 이웃 몇 집 친구 몇 명 불러서 지난 한 해 추억하며 수다도 떨 것이다. 서로 어릴 적 추억도 공유하면서 팥처럼 붉은 열정을 가슴에 담으며 내년도 또 열심히 살아보자고 엄마의 손맛도 떠 올리는 동지가 있어서 다가오는 추운 겨울도 따뜻하다.


팥죽 끓이기
팥 1kg(불려 놓는다)
물 5배(쌀 10cup)
소금 약간(식성에 따라 간맞추기)
새알심 만들기
불린 찹쌀을 곱게 빻는다
익반죽을 하여 동글동글하게 만든다.
– 팥을 3배 정도의 물을 붓고 으깨질 정도로 푹 끓인다.
– 센 불로 끓이면 떫은맛이 나므로 중불로 끓이다가 약불로 뭉근히 끓여서 채에 거른다.(믹서기에 곱게 갈아도 된다.)
– 팥물은 불린 쌀의 5배를 붓고 끓을 때 새알심을 넣는다.
– 새알심이 떠오르면 불을 끈다.




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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