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이후의 모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배경 및 의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니체의 핵심 사상들인 ‘힘에의 의지’, ‘영원회기 사상’, ‘위버맨쉬’ 등이 집약되어 나타난다. 이 책을 쓰고 난 후 니체는 100년 후에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던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쓰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까 염려했다고 한다. 이 책의 부제 ‘모든 사람들을 위한 그러면서도 그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 또한 의미심장하다. 비유하자면 이 책이 기독교 사회에서의 성경처럼 모든 사람을 위한 책이지만 니체 자신의 생의 철학을 배우고 수용하려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읽을 가치가 없는 책이라는 뜻이리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탄생에 대한 것은 그의 전작인 ‘즐거운 학문’에서 ‘질스마리아’라는 시에 언급되어있다.

여기 앉아,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 무를

선악의 저편에서 빛을 즐기고

그림자를 즐기며, 모든 것은 유희일 뿐

모든 것은 호수이고 정오이고 목표 없는 시간일 뿐

그때 갑자기, 나의 여인이여, 하나가 둘이 되었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가 내 곁을 자나갔다….

이 시에서 ‘여기’는 질서마리아라는 마을의 호수가에 있는 큰 바위이다. 니체는 이 바위 위에서 무를 기다리다가 하나가 둘이 되는 것을 즉, 니체 자신과 차라투스트라라는 자기 곁을 지나가는 또 다른 자아를 만났음을 이야기한다. 지금 여기는 하늘이 아닌, 삶의 현장인 이 땅에 있다는 것. 선악의 저편에서 라는 것은 선악의 영역이 신의 영역이라면 그 너머 어떤 상태에 놓여있음으로 해서 신이 더 이상 자신을 건드릴 수 없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에 차라투스트라가 나타나는 것이다.

니체의 위 시에서 나타나는 질스마리아 마을 호숫가 큰바위는 니체가 영감을 받은 바위라 여기고 오늘날 ‘니체의 바위’라고 명명하고 있다고 한다. 니체는 한 때 절망에 빠져 알프스로 여행을 떠났고 호수가 있는 이곳을 지나다가 큰 영감을 받고 니체의 대표작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예언대로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제대로 이해되었고 실존주의 철학이나 포스트모더니즘의 흐름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니체의 저술들은 이전의 철학책이 일정한 체계적 논리에 따라 대상을 규정하던 형이상학적 사변을 진술하는 것과는 달리 오직 인간과 인간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한 기존의 철학과는 달리 니체의 글은 잠언의 형식을 가지고 시인 듯 암시와 상징이나 비유로 말하기에 문학의 한 영역으로조차 느껴진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1970년도까지 니체의 저서는 일부에서 철학 책으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문학에서도 니체의 영향은 지대하다. 릴케, 헤세, 카프카 등이나 중국 문학의 아버지라고 할수 있는 루쉰조차 니체를 닮고 싶어 니체의 콧수염을 했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구성은 제1부 ~ 제4부 및 최종부로 되어 있다. 아래에서 이야기할 제1부는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과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으로 나눠있다. 먼저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을 보기로 한다.

제1부 –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은 책의 내용을 축약한 듯 핵심 내용을 드러낸 중요한 부분이라고 본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라투스트라는 독수리와 뱀과 함께 산속 동굴에서 도를 닦으며 10년을 보낸 후 30살이 되던 해에 자족한 마음으로 이른바 하산을 한다. 그가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노인이었고 둘은 대화를 한다. 노인이 신을 사랑하고 찬양한다고 열렬히 말을 하자 차라투스트라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한다. 차라투스트라는 혼잣말을 한다 –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제 신의 죽음이라는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에게 전하고자한다”. 이렇듯 차라투스트라가 말하는 내리막길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신의 사람이 아닌 대지에 발을 붙인 사람이 되고자 하는 의지로 시작됨을 알린다.

차라투스트라가 하산하여 첫 방문한 곳은 도시의 시장터였다. 그곳에서 그는 군중들에게 소리 높여 ‘위버멘쉬’에 대해 다음의 가르침을 준다. 위버멘쉬는 사람은 극복되어야하는 존재이고 대지의 뜻을 따르는 자라는 것, 그리고 크나큰 경멸이 가라앉아 사라질 수 있는 바다와 같은 자라는 것과 번갯불이고 광기와 같은 자라고 설명을 한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의 설교에 대해 군중은 냉담하고 냉소적이며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멘쉬를 광대로 혼동한다. 군중 속 한 사람이 차라투스트라의 위버멘쉬에 대해 ‘줄타는 광대 이야기는 들을 만큼 들었으니 그 모습을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이번에는 진짜 광대가 그 말을 오인하고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등장하여 곡예를 시작한다.

줄타기 광대에게는 줄 위가 현실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떠는 것, 멈춰 서는 것 모두 위험하다. 그런데 광대는 줄을 타는 동안에 알록달록한 옷을 입은 익살꾼이 나타나 그를 뛰어넘어가는 바람에 당황하여 줄에서 떨어진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군중들은 이 광경을 보고 모두 사라졌지만 차라투스트라만은 그의 곁을 지키며 위로한다. 죽음과 악마를 두려워하는 광대에게 차라투스트라는 말한다. ‘신과 마찬가지로 악마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영혼이 신체보다 더 빨리 죽기에 죽음 이후 저편에서 새로운 삶이 이어진다는 망상을 깨라고’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죽은 광대의 송장을 텅 빈 나무에 보관하고 긴 잠을 자고 깨어나 지금부터 자신의 길동무는 송장이 아니라 살아있는 길동무여야 한다고 선언한다. 그의 머리 위에는 벗인 독수리와 뱀이 나타나 그들의 특성인 긍지, 영리함이 함께하는 자신의 내리막길을 가는 것으로 머리말이 끝난다.

제1부-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에 대해

이 장에서는 모두 23가지의 사안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 낙타, 사자, 아이의 비유로 이야기한 ‘세 변화에 대하여’ 이다. 여기에는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고, 사자가 마침내 아이가 되는 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첫 번째는 낙타의 정신이다. 삶을 배우려면 짐을 질 줄 알아야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인생을 살아가려면 인생의 짐을 감당할 힘을 키워야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짐을 감당한다고 해서 현실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해결책이 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한 단계 더 나아가 두 번째로 사자가 되어 정신의 자유를 쟁취하고 그 자신 사막의 주인이 되어야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자유를 쟁취하고 새로운 가치를 위한 권리를 쟁취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강탈이며 강탈하는 짐승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자기애를 위해 자유를 되찾기 위한 강탈을 위해서 사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세 번째 최종 단계로는 어린아이의 정신이 필요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가치 창조, 그것은 사자도 해내지 못하고 어린 아이만이 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는 순진무구하고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고 신성한 긍정이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다.

제2부ㅡ ‘행복이 넘치는 섬’과 ‘자기 극복에 대하여’ 에 대해

2부에서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22개 항목으로 되어있다. 이 중에서 중요하게 생각되는 부분이 ‘행복이 넘치는 섬에서’와 힘에의 의지를 피력한 ‘자기극복에 대하여’ 이다.

‘행복이 넘치는 섬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위버멘쉬를 다시 언급하면서 ‘신은 일종의 억측이다’를 세번이나 말한다. ‘너희는 신을 창조할 수 있는가?(없다를 전제) 그러니 일체 신에 대해 침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위버멘쉬는 창조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신들이 존재한다면 나는 내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참고 견뎌낼 수 있을까! 그러니 신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가 가진 창조정신은 신을 인정할 수 없다. 대신에 창조 의지로 충만한 자유정신, 즉 위버멘쉬를 가르친다. 또한 이런 위버멘쉬를 창조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이 안 되면 스스로 위버멘쉬가 되라고 한다. ‘행복이 넘치는 섬’은 우리가 찾아야 할 이상향이다. 찾아가는 그 길, 바다로 향하는 길 역시 새로운 길이되리라.

‘자기극복에 대하여’에서의 핵심은 힘에의 의지를 말하는 것이다. ‘오직 생명이 있는 곳, 거기에 의지가 있다. 그러나 나 가르치노라 그것은 생명에 대한 의지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라는 것을! 생명체에 있어 많은 것이 생명 그 자체보다 더 높게 평가되고 있다. 그런 평가를 통해 자신을 주장하는 것 그것은 힘에의 의지이다’ 차라투스트라는 더 없이 지혜로운 자들과 대결한다. 그들은 ‘진리를 향한 의지’로 폭력을 휘두른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생명체를 발견하면서 힘에의 의지를 발견했다고 한다. 강자는 강자대로 목숨을 건 주사위놀이에 약자는 약자대로 뒷길로 보다 강한자의 심장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힘을 훔쳐낸다는 것이다. 이런 힘에의 의지는 주인이 되고자 하는 의지이며 생명 그 차체가 가능하게 하는 힘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고 불변의 선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도 그 자체의 힘으로 자신을 거듭 극복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제3부 – 운명의 별이 빛날 때 ‘나그네’,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3부에서는 차라투스트라의 가르침은 16개 항목이다. 이들 중 ‘나그네’와 독특한 상징으로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는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를 살펴본다.

‘나그네’는 차라투스트라가 행복이 넘치는 섬에서 안주하지 않고 떠나 방랑을 하는 모습을 그린다. 여기에는 인간적인 감정이 다른 곳보다 많이 드러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 나 어떤 숙명을 맞이하게 되든 나 무엇을 체험하게 되든 그 속에는 방랑이 있고 산 오르기가 있으리라. 사람은 결국 자기 자신을 체험할 뿐이니.

내게 우연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때는 지나갔다. 이미 나 자신의 것이 아닌 그 어떤 것이 새삼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되돌아올 뿐, 끝내 집을 찾아 내게 돌아올 뿐이다. 나 자신의 자기, 그리고 그 자기를 떠나 오랫동안 낯선 곳을 떠돌고 모든 사물과 우연 사이에 흩어져 있던 것은.

거기에다 나 또 하나를 알고 있으니 그것은 내가 지금 마지막 정상을 , 더없이 오랫동안 내게 남겨진 것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아, 나 더없이 험난한 나의 길을 올라가야하는 것이다! 아, 나 더없이 외로운 방랑을 시작한 것이다!….

너 위대함에 이르는 너의 길을 가고 있다. 네 뒤에 되돌아갈 길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네게 더없는 용기를 불러일으켜야 하리라! …

올라갈 사다리가 더 이상 없다면 너는 너 자신의 머리를 딛고 올라갈 줄도 알아야한다.(*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 즐겨 인용한다는 구절) 달리 오를 방도가 없지 않은가?

너 자신의 머리를 딛고, 그리고 너 자신의 심장을 뛰어넘어서 말이다! 네게 있어서 더 없이 부드러웠던 것도 이제는 더없이 준엄한 것이 되어야한다.

어느 때고 몸을 많이 사리는 자는 결국 많은 몸사람 끝에 병들고 만다. 그러니 찬미해야 할 것이다. 준엄하게 만드는 것을! 나는 버터와 꿀이 흐른다는 땅을 찬미하지는 않는다!….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러나 너, 모든 사물의 바탕과 배후 바탕까지 보려고 했지. 그러니 너너 자신을 뛰어넘어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 너의 별들을 발아래 둘 때까지 위로, 위를 향해!

그렇다! 나 자신과 나의 별들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경지, 그것만이 나의 정상이렸다. 바로 그것이 내가 오를 마지막 정상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곡두와 수수께끼에 대하여’ 역시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테마이다. 여기에 나오는 ‘중력의 악령’은 니체가 악으로 간주하는 자의 이름이며, 삶의 무게를 가중시키는 존재, 두 발 가진 존재를 무릎 꿇게 하는 위험한 악마로 보며, 반 난장이나 반 두더지라고 지칭한다. 또한 이 테마는 영원회기 사상이 들어있는 성문에 대한 유명한 비유와 함께 나온다.

이 성문의 이름은 ‘순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성문 앞에서 중력의 악령과 대화를 한다. 난장이는 시간 자체가 둥근고리라고 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시간은 일직선이고 떠나간 시간은 돌아오자 않는다고 한다. 아마도 난장이의 시간은 세상이 종말에 이르면 신이 재림하는 돌고 도는 세상을 말하는 것이고, 차라투스트라는 돌고 도는 것은 시간이 아니고 존재 그 자체, 인간은 영원히 되돌아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영원회기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차라투스트라는 영원히 되돌아오는 이 순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무한히 긍정하는 것이다. 삶의 현장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는 것. 삶은 오로지 지금 여기, 즉 순간이라는 성문 뿐이라고 말한다.

제4부 및 최종부

여기서 차라투스트라는 백발이 된 모습이다. 그는 이른바 지체높은 자들이 내는 절박한 부르짖음을 따라 예언자, 왕들, 마술사, 실직 당한 교황 등등과 만나게 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동굴로 초대를 한다. 조건은 스스로 동굴을 찾아와야한다는 것과 차라투스트라를 기다려야한다는 것이다. 이는 스스로가 앎을 찾아가야한다는 것과 시간을 들여서 때가 무르익기를 인내할 수 있어야함을 암시한다. 그리하여 차라투스트라는 그들과 마침내 최후의 만찬을 가진다. 그러나 차라투스트라가 새벽에 일찍 일어나 솟아오르는 태양을 보면서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체 높은 자들에 대해 실망하며 그들은 차라투스트라가 기다리던 미래가 아님을 깨닫는다. 태양은 또 오르는데, 맞이 하는 자 차라투스트라 뿐인 것이다. 그 속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아 내 아이들이 가까이 와 있다…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의 시작이다. 자, 솟아 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라는 때가 도래했다는 조짐을 받는다.

글 | 박화진(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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