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연못
태양이가 저승사자의 손에서 빠져나온 일은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저승사자들 앞에서 터벅터벅 잘 걸어가고 있던 아이가 잠시 멈칫 하더니, 무슨 소리라도 들었는지 뒤를 한번 돌아보고는 갑자기 미친 듯이 뛰는 것이었다. 그 바람에 신유리도 아이를 따라 정신없이 뛰었다. 그들을 뒤따라오던 처사들은 숲속 어디 쯤 들어서자 무슨 이유에선지 더 이상 뒤를 쫒지 않았다.
“왜 그랬던 거야?”
“할머니가 빨리 오라고 막 부르잖아.”
“할머니? 돌아가신 외할머니?”
“아니, 우리 할머니. 친할머니 말야”
“에?”
그때 옆에서 세별이가 다가왔다.
“넌 어디 있을 거야?”
“옆을 지나가면서도 모르고, 내가 불러도 쳐다도 안보고 계속 뛰기에 나도 따라서 뛰었지. 뭔 일이 있나보다 하고…”
태양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누나에게 말해주었다.
“하도 정신없이 도망을 다녀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겠다.”
신유리는 또 아까 그 저승사자를 다시 만날까 두려워 왔던 길로는 못가고, 두 애들과 함께 무턱대고 앞으로만 걸었다. 또 산이 나왔다.
“모로 가나 바로가나 가기만 하면 되지 뭐. 어차피 우리가 길을 알아서 다닌 건 아니잖니.”
“맞아. 그 무당이 길은 가다보면 나온다고 했잖아.”
“그런다고 막가?”
그들은 온전히 넘을 때 까지 쉬지 않고 걸었다. 산을 다 내려오니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마치 봄의 나라에 온 것처럼 여기저기로 풀밭 여기저기엔 온갖 종류의 자그마한 패랭이꽃들이 끝도 없이 이어져 앙증맞게 피어있었다.
그로인해 산길은 알록달록한 색들로 곱게 물들어있었다. 신유리는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며 감탄해마지 않았다.
“우리 천국에 온 거 아닌지 모르겠다.”
각시패랭이, 난쟁이패랭이, 구름패랭이, 수염패랭이, 술패랭이 등 수많은 종류의 작은 패랭이들이 하양, 보라, 분홍, 빨강의 다채로운 색들로 단장하고 작은 화동처럼 귀여운 자태로 풀밭에 숨은 듯이 앉아 있었다.
“패랭이 좀 봐. 귀엽다. 애기들 같다.”
신유리는 야생화들에 감동하여 자꾸 걸음을 멈추고 감탄 어린 시선으로 꽃들을 바라보았다.
“엄청 많네, 조금씩 모양이 다른데, 이게 다 패랭이라고?”
“응, 패랭이라도 종류가 다 달라. 국화도 종류가 많잖아. 저건 술 패랭이고, 다른 건 이름을 잘 모르겠다.”
신유리의 말에 세별이가, “저건 기린이야.” 하고는, 드문드문 수문장처럼 목을 길게 빼고 서있는 나리꽃을 가리켰다.
신유리가 빙그레 웃으며 태양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아무리 찍어도 사진이 나오질 않았다.
“여기선 디지털 기기가 안 되나.”
그녀는 중얼거리면서 핸드폰을 닫았다.
그곳을 지나자 은방울꽃이며 얼레지, 노루귀, 큰 괭이밥 등이 숨어 있다가 얼굴을 내밀었다.
숲속 어디서 “쪼로롱~”하는 방울새 소리가 들렸다. 이어 “뻐꾹!”하는 뻐꾸기 소리와, “꾸꾸루루루 꾸꾹!”하는 산비둘기 소리도 들려왔다.
색색의 꽃들 위로 나비가 날아다니고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까지 들리니 천국에라도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좀 쉬었다 가면 좋겠는데, 길을 제대로 찾으려나 모르겠다.”
신유리가 중얼거리자 태양이가 엄마 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갔다. 그리고는 네비맵 앱에 ‘집으로’를 쳤다. 그러자 지도 대신 무슨 암호처럼 꽃과 연못 기차 그림이 나타났다.
“엄마, 계속 직진해야 돼. 이봐, 꽃이 있고, 더 앞에 연못, 계속가면… 어, 기차네? 또 기차를 타야 되나? 그 다음엔 길이 끊어져버렸어.”
“여기서도 핸드폰이 돼?”
“된다고도 할 수 없고, 안 된다고도 할 수 없어. 이상하게 나타나.”
태양이는 엄마에게 핸드폰 화면을 보여 주었다.
화면은 그것만 보여주기로 한 것처럼 그 외의 다른 것은 터치를 해도 반응하지 않았다.
“사흘짼데, 오늘 안에 빨리 돌아가야 돼”
“길도 모르잖아, 지난번같이 헤매다가 밤새면 큰일인데.”
“그럼, 우리 돌아가지 못하고 영원이 저승에서 사는 거지.”
“한마디로 죽는 거군”
세별이와 태양이 떠드는 소리를 듣자 신유리도 갑자기 불안해졌다.
얼마쯤 가자 핸드폰에서처럼 연못이 나왔다. 자그마한 연못이었다.
“진짜 연못이 있네.”
신유리는 가까이 다가가 물을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그대로 비칠 정도로 거울처럼 맑았다. 약수터처럼 앞에 박을 말려 만든 바가지가 하나 놓여있었다.
“얘들아, 여기서 물이나 마시고 가자.”
“콜-”
목이 말랐던 태양은 얼른 먼저 다가서서 바가지를 집어 들었다.

76
바가지로 연못의 물을 듬뿍 떠서 마시려던 태양이는 머리 위에서 깍깍 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갑자기 뭐가 생각났는지 엄마를 돌아보았다.
“삼족오인 줄 알았더니 까치 같아.”
“그러게, 신화에서 까치는 저승 명패를 전하는 일을 하는데…”
신유리는 저승처사 사만이 이야기가 떠올라 아이에게 간단히 내용을 들려주었다.
까치 때문에 저승처사 사만이가 명패를 잃어버려 저승 갈 사람을 순서도 없이 아무나 뒤죽박죽 데려가게 됐다는 내용이었다.
엄마의 말을 듣자 아이는 물을 마시려던 것을 그만두고 바가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 동네는 모든 게 영 찜찜해. 이거 혹시 또 이상한 물 아냐?”
“괜찮아. 바가지가 있는 걸 보니 마시라는 물 같은데.”
신유리가 아이를 안심시켰다.
“근데, 여기 안에 뭐라고 쓰여 있어.”
신유리는 아들에게서 바가지를 뺏어 들었다. 그리고는 물을 도로 쏟아내고 바가지 안의 한자를 읽었다.
“일년일박”
신유리가 바가지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뭐야? 일박 이일도 아니고, 일 년 일박은 뭐야 엄마?”
“글쎄 나도 모르겠어. 1년에 한 바가지란 먹으란 건가?”
그들의 머리 위에서 깍깍 소리가 났다. 까치가 나뭇가지에서 그들을 내려다보고는 꼭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았다.
“마시지 말라나봐.”
세별이가 그러고는 웃었다.
“네가 정말 그랬니?”
신유리가 까치를 보며 물었다. 혹시 이 물이 저승과 관계된 것은 아니지?
까치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쳐다보았다.
“엄마 여기가 저승이야. 저승에서 저승하고 관계되지 않은 게 뭐가 있어.”
세별이가 엄마에게 핀잔어린 말을 했다.
“이게 젊어지는 샘물이면 좋겠다. 한 바가지 마시면 1년이 젊어지는 거야.”
“엄마, 그럼 43바가지 퍼 마셔. 애기가 되면 내가 데려다 키우게.”
“네가 날 키워. 너 자신이나 제대로 키워”
“싫어. 엄마 키우면서 막 패줄 거야.”
그러고는 아이는 생각만으로도 재미있는지 키득키득 웃어댔다.
“너 그러면 아동학대야.”
“엄마도 나 때리며 아동 학대 했거든. 나도 복수 해야지”
“그래도 그렇게 어려져서 인생 좀 다시 살고 싶긴 하다.”
“엄마, 그렇게 될 때까지 마흔 세 바가지나 마셨다간 젊어지기도 전에 배 터져 죽어.”
세별이 말에 모두 웃었다.
“어쨌든 마셔 보자. 엄마가 마루타 될게.”
신유리가 웃으며 바가지로 물을 퍼 들었다. 한 모금, 두 모금을 삼켰다.
그만 멈추려는데 이상하게 멈춰지지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한 바가지를 다 비워버렸다. 그러자 물이 다시 가득 찼다. 이젠 그만 마시고 싶었지만 입이 바가지에서 떨어지지가 않고 계속 물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세 바가지 네 바가지… 끝도 없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배가 터질 것 같고 너무 너무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마술에 걸린 듯이 물마시기를 멈출 수가 없었다. 그녀의 배가 물로 채워지며 점점 남산 만하게 부풀어 올랐다. 그제야 아이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엄마 그만 마셔!”
그녀는 물 때문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뭐가 잘못 된 거 같아”
“뺏어!”
아들과 딸이 바가지를 빼앗으려 했지만 아무리 잡아 당겨도 놓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연못가에서 밀어냈지만 물은 계속 채워져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한참을 아이들과 씨름을 한 뒤에야 바가지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바가지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쓰러져버렸다. 배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남산 만해져 있었다.
“울렁거려, 죽을 것 같아.”
그녀가 간신히 중얼거렸다. 그런데 치우가 제 엄마를 보더니 깜짝 놀라 소리쳤다.
“헐, 누나, 엄마가 엄청 젊어졌어.”
“진짜!”
그런데 두 아이가 지켜보는 동안에도 그녀는 점점 젊어지더니 20대 처녀의 모습에서 소녀로, 급기야 아이처럼 변해갔다.
“누나, 어떡해!”
치우가 발을 동동 굴리며 울었다.
“큰 일 났다. 이거 젊어지는 샘물인가 봐.”
“설마… 진짜! 젊어지는 샘물이야.”
두 아이가 얘기하는 사이에도 그녀는 점점 어려져 벌써 갓 태어난 아기처럼 되어버렸다. 그런데 배는 아직도 물이 찼는지 터질 듯이 볼록했다.
“배를 눌러서 물 좀 토해내 볼까?”
“그래. 빨리 해.”
치우는 스카웃에서 배운 대로, 물에 빠진 사람을 구조하듯이 배를 눌렀다.
“왝!”
그녀가 물을 토해냈다. 한번 토를 시작하자 그걸 빌미로 계속되는 토와 함께 물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와, 엄마가 돌아온다.”
치우가 박수를 치며 소리쳤다.
다행히 그녀는 다시 원래 엄마의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완전히 처음과 같아진 것이 아니라 한 10년 세월은 덜 돌아온 것 같았다.
“엄마, 엄청 어려졌어. 한 서른 살 밖에 안 돼 보여.”
“어쨌든, ‘젊어지는 샘물’ 전래동화에서처럼 이게 그 샘물이네. 누나도 마셔.”
“그래 네가 마셔”
“싫어. 엄마처럼 될 까봐 무서워!”
“하긴, 끔찍했어. 조금만 늦었으면 엄마 완전히 사라질 뻔 했다고.”
“너야 어려지면 엄마가 다시 키우면 되지 뭔 걱정이야.”
“그건 망각의 샘이야.”
“뭐?”
모두들 소리가 난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말을 할 사람이 까치 말고는 없었다. 하지만 까치는 이번에도 시치미를 떼고는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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